[인산 김일훈 65] 결핵성 척수염을 치료하다

결핵성 척수염

인산은 해방 이후 이북에서 아내를 데려온 이후로 1992년 사망할 때까지 도합 여든 번의 이사를 하였다.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2~3년간 머물러 살던 곳에서 또 다른 거처를 향해 변변치 않은 이삿짐을 싸고는 했다.

“내가 그렇게 많은 환자들의 병을 고치면서 이사를 자주 했던 이유가 뭔 줄 아나? 나하고 인연이 닿는 환자들을 찾아다니기 위해서였지. 나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은 내가 이사를 다님에 따라 나를 만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는 것이고, 나하고 인연이 없는 사람은 나를 만날 수 없으니 그대로 죽을 수밖에……. 그건 나로서도 어쩔 수 없잖아? 내 몸 하나를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환자들을 다 만날 수는 없는 것이잖아? 그러니 나하고의 인연은 운명에다 맡겨야지 어쩌겠나?”

인산은 말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인산이 그렇게 거처를 옮겨 다니며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가난한 이에게는 뜸을 떠주어서 살리고, 돈 있는 이에게는 약화제(藥和劑)를 일러줘서 병을 낫게 하고, 또 지나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죽게 된 이를 보면 침을 놓아 살려주기를 몇 차례나 했는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 옛날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얼마나 많은 환자들의 병을 낫게 해주었는지는 몰라도, 그들을 능가하면 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을 것이라고 인산 스스로 생각하는 것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은덕을 입은 그 많은 사람들로서는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 해도 일 년이 멀다 하고 옮겨 다니는 그의 거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를 다시 만날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래서 인산도 자신이 고쳐준 환자들의 이름이나 연락처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인산이 죽을 처지에 놓인 사람을 살려준 사례로서 유일하게 오래도록 전화번호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지민(李知玟, 가명)이라는 처녀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인산으로부터 병 고침의 은혜를 입은 이래 줄곧 인산에게 연락을 취하거나 인산을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1979년 9월, 지민은 홀어머니 우(禹)씨와 함께 서울 성북구 동선동 1가 태극당 뒤편 동네에 살고 있었다. 전통 명문여고를 졸업하고 치의대에 지원했다가 불합격하는 바람에 진학을 포기한 채 지내고 있었다. 여고를 졸업할 때까지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던 그녀가 진학을 포기한 것은 단지 한 번의 대입 시험에서 실패를 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째는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는 빈한한 가정 경제가 그녀의 학업을 가로막았고, 둘째는 그녀 자신의 건강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정상적인 대학 생활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 이태 전에 몸에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다가 폐결핵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 급속도로 야위어가는 몸은 그렇다 치더라도, 항시 나른한 피로감이 그녀를 사로잡아 아무런 의욕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그녀를 더욱 힘들게 했다. 병원의 처방에 따라 결핵 치료약을 계속 복용하였지만 병세는 차도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악화 일로로 진행될 뿐이었다. 그녀가 스물한 살이 되던 1978년 7월 10일에는 심한 복통이 찾아와 이웃 남정네에게 업혀 세 곳의 병원을 전전한 끝에 네 번째로 찾아간 병원에서 복막염 수술을 받았다. 종로 2가와 청계천 2가 사이에 있던 S병원 M 원장의 집도로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그때의 결핵성 복막염이 그 후에 그녀를 덮칠 무서운 병마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알 길이 없었다.

지민은 1979년 9월의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서 양쪽 무릎 아래가 왠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움직여 보려 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급기야는 발바닥을 꼬집어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당시의 일반 시민들은 어디가 아프거나 이상이 생기면 으레 가까운 약국에 가서 약을 지어다 복용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녀의 어머니 우씨도 집 근처 약국에 가서 딸의 양쪽 다리에 마비 증세가 있다는 사실을 얘기하였다.

“아마 혈액 순환이 잘 안 돼서 그럴 겁니다. 잠자는 자세가 잘못되었을 경우 그런 증상이 나타날 때가 있지요.”
약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그렇게 말하며 며칠간 복용할 약을 조제해 주었다. 지민은 이틀간 그 약을 복용하였다. 그러나 다리의 마비 증세는 여전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네에 있는 내과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일종의 말초신경염입니다. 적어도 두 달가량은 약을 복용하면서 치료받아야 합니다.”

그곳 의사는 지민을 진찰한 결과 그와 같은 판정을 내렸다. 일반적으로 말초신경염은 어떤 약물이나 화학물질에 중독되었거나, 당뇨병ㆍ알코올 중독ㆍ비타민 결핍ㆍ갑상선 질환 등의 원인 질환이 있을 때 그 합병증으로서 증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의사는 지민에게서 그 어떤 원인도 발견하지 못한 채 두루뭉수리 식으로 진단을 내린 것이다. 하나의 질병을 대함에 있어서 환자의 몸 전체를 파악하지 않고 부분별로만 보려 하고, 병증으로만 진단하려고 하는 서양의학의 단점을 여실히 드러낸 경우였다. 하지만 의사의 진단을 믿을 수밖에 없었던 지민과 그의 어머니는 하릴없이 귀가하여 그 의사가 조제해 준 약을 복용하며 또다시 5일을 지냈다. 그러나 지민이 느끼는 병세는 그 기간 중에도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결국 모녀는 집에서 가까운 모 대학병원을 찾아가 정밀검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결핵성 척수염’이란 진단이 내려졌다.

“이 병은 수술로는 치료할 수가 없으므로 약물 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녀는 이름조차 생소한 병명과 함께 두툼한 약봉지를 받고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그 약을 복용한 지 두 달쯤 경과하였을 때 환자의 온몸이 퉁퉁 부어 피부가 터지는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면서도 양쪽 다리의 마비 증세는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병원 측에 문의하니. ‘부신피질 호르몬제의 부작용 같으니, 약의 복용량을 줄이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몇 차례 거듭한 끝에 ‘약의 복용을 중단하라’는 최종 권고를 받았다.
‘이제 약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어쩌나? 꼼짝없이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나?’

지민은 자리에 누워 끝없이 피어오르는 절망감을 곱씹고 있었다.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가 무색할 뿐이었다.
그러나 명색이 나라 안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다는 대학병원에서도 손을 놓아버린 환자를 유일한 혈육으로 두고 있는 지민의 어머니는 거의 미쳐서 돌아갈 지경이었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용한 재주를 가진 점술가ㆍ침술가ㆍ의원ㆍ약사는 어째서 그렇게 널려 있는지 모를 일이다. 지민의 모친 우씨는 귀에 들리는 대로 그런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하기야 하나밖에 없는 딸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마다할 일이 무엇이랴?

해가 바뀌어 1980년이 됐다. 인천의 무슨 한의원이 용하다고 해서 열흘에 한 번씩 택시를 대절하여 찾아다녔다. 지민은 그곳에서 첩약을 지어다 먹고 침을 맞았다. 별반 차도가 없었지만 치료를 계속하다 보면 점차 나을 것이라는 그곳 한의사의 말을 믿고 정성을 바치는 마음으로 인천을 오갔다. 그러기를 8개월여 했을 때, 지민은 침을 맞던 도중 쇼크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호흡이 불규칙해지면서 체온이 40도까지 올라갔다. 처음으로 결핵성 척수염 진단을 내린 대학병원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1980년 9월이었다.

“그동안 병을 너무 많이 키우셨군요. 죄송스럽지만 이제 따님의 병을 완전히 낫게 할 방법은 없습니다. 결핵균이 퍼질 대로 퍼져 있어서 신경 조직이 망가지고 뼈마저도 허약해진 상태입니다. 수술을 하여 기적적으로 성공을 거둔다 하여도, 이미 손상된 신경 조직과 뼈는 회복할 길이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자의 생명을 건진다 해도 하반신은 영영 쓸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수술을 할지 여부에 대해서는 보호자께서 결정할 일이겠으나, 저희 병원으로서는 수술을 권할 입장이 아니라는 점은 알고 계십시오.”

지민의 어머니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 속에서도 딸의 생명만은 건질 가망성이 있다는 의사의 말을 한 가닥 위로로 삼았다. 지민의 하반신에 마비가 오기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이 지난 그 무렵, 지민은 이미 하반신을 전혀 쓸 수 없는 상태에 있었고 대ㆍ소변을 혼자서 처리할 수 없음은 물론 여성으로서의 생리마저도 끊긴 지 오래였다. 뼈와 가죽만 남은 환자의 몰골은 그야말로 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대학병원에서는 ‘기적적으로’라는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환자의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비쳤으므로 환자의 모친은 그것만으로도 희망을 갖기에 족했던 것이다. 지민의 병구완을 하는 틈틈이 부정기적인 품팔이로 생계를 꾸려가는 그녀의 모친은 자신의 뼈를 깎아서라도 딸의 목숨을 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신체 일부를 떼어 팔아서라도 딸의 목숨 값을 댈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녹록한 것이 아니었다. 지민의 증세가 하루아침에 좋아질 리도 없는 것이고, 젊은 나이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 지내는 가운데 생기는 좌절감과 비관적인 생각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홀어머니와 단둘이서 외롭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처지에서 자기가 앞서 세상을 뜰 것 같은 예감은 지민을 가혹한 고통의 불구덩이로 몰아붙였다. 그저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지민의 어머니는 딸의 방에서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물건들을 치워버렸다. 지민이 자칫 생각을 잘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툭하면 ‘내가 빨리 죽으면 엄마가 덜 고생할 텐데…….’ 하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곤 하던 지민이었다.

“지민아, 아무 걱정하지 말고 네 몸 빨리 나을 생각만 해. 수술을 하면 나을 수 있다니까 우리 희망을 갖자, 응?”

지민의 어머니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딸의 마음을 달래며 딸이 삶에 대한 애착과 용기, 그리고 희망을 가져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앞길이 막막한 것은 지민의 어머니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한두 푼으로는 해결될 수 없을 수술비용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야속한 시간은 흘러갔고, 지민의 상태는 계속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지민은 밥은커녕 죽도 제대로 목 안으로 넘기지 못했다. 바싹 말라 엉치뼈에 가죽만 붙어 있는 것 같은 지민의 둔부는 욕창(?瘡)으로 시커멓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움직이지 못하는 채 누워만 있었기 때문에 눌린 피부 조직에 오랫동안 피가 통하지 않아서 생긴 궤양이었다.

지민의 어머니가 ‘수유리 도사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들은 것은 곤궁한 형편에 갇혀 한 발짝도 떼어놓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 시점이었다.

지민네 모녀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의 안주인인 변(卞) 여사를 자주 찾아오는 아주머니(李某 여사) 한 분이 계셨다. 두 사람은 같은 평안도 출신인 데다 사별한 이 여사의 남편이 변씨였기 때문에 한 동네에 살면서 유달리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성격이 괄괄하여 막힌 데가 없는 그 이 여사가 변 여사에게 자신의 사위(주부 가수 변해림 씨의 남편)와 외손자의 고질병을 고쳐준 ‘도사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을 지민의 모친이 듣게 되었다.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 누구인가요?”
지민의 어머니는 병을 잘 고친다는 말에 귀가 번쩍 띄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면서 물었다.
“저 수유리에 사시는 분인데, 나랑은 같은 평안도 출신이에요. 오래전에 묘향산에서 도를 닦으셨고…… 못 고치는 병이 없다고 소문이 나신 분이죠. 뭐 그동안 소경도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웠대요. 주로 뜸을 떠서 병을 고치시는데…… 내가 그분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 사위하고 외손자의 병을 감쪽같아 낫게 하는 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에요. 사방팔방 안 다녀본 병원이 없을 정도로 찾아다녀도 고칠 수 없었던 병인데…….”

이 여사는 신바람이 나서 얘기했다. 그 이 여사가 말하는 도사 할아버지란 다름 아닌 인산이었다.

“그래요? 어떻게 그런 신통한 의술을 가진 분을 여태 모르고 있었을까? 아주머니, 그분이라면 우리 애 병도 고쳐주실 수 있을까요?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우셨다면…….”

지민이 어머니는 마치 이 여사가 딸의 병을 낫게 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사뭇 매달리면서 물었다.

“글쎄요…… 댁의 따님 병은 워낙 위중하다고 들었는데…… 어떨지 모르겠네요.”

이 여사는 갑자기 말하던 기세를 누그러뜨리며 애매하게 대답했다. 하기야 이 여사로서는 ‘수유리 도사 할아버지’가 전신마비로 방 안에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는 위중한 환자의 병을 고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가 어딘지 가르쳐주세요. 내일이라도 당장 찾아가 보겠어요.”
지민의 어머니는 물에 빠진 사람의 심정으로 ‘수유리 도사 할아버지’에게 지민이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스물세 살 처녀의 삶을 마지막으로 몰고 가려는 병마의 횡포는 참으로 잔인하였다. 지민이는 이제 목 위쪽과 두 손을 제외한 나머지 부위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감각 기능도 상실하고 있었다. 온몸의 뼈대가 그대로 노출되다시피 말랐고, 결핵균이 시신경까지 침투했는지 시야마저 흐릿해져 갔다. 그녀가 있는 방 안에는 살이 썩는 냄새가 가득하여 그녀 자신도 코를 싸쥐고 있어야 할 형편이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가 지탱할 수 있는 생명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흔히 어느 한 사람이 ‘죽고 싶다.’는 심정을 갖게 되는 때는 더 이상 살아서 누릴 생명의 기쁨이 전무(全無)하다고 느낄 때이다. 고통이 극에 달하거나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지민은 이미 헤일 수 없이 많은 순간에 ‘죽고 싶다.’는 마음의 염원을 가졌었다. 생각하는 기능만은 오히려 정상인보다도 더욱 민감했기에, 어차피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자기가 먼저 죽게 될 바에는 ‘불필요한 고생을 면하시게나 해드려야겠다.’고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그녀가 결행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곱다시 시들어 말라 죽는 도리밖에 없었다. 병마의 잔인함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도 말라붙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민네 사정을 모르는 대학병원에서는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하니 서둘러 입원 수속을 밟으라고 하였다. 지민의 어머니 우씨는 담당의사인 성(成) 박사에게 아무래도 수술을 포기해야 될 것 같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수술비용을 마련할 길이 없어서……. 딸자식이 죽어가는 걸 그냥 보고만 있으려고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형편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네요. 수유리에 묘향산에서 도를 닦으신 도사 한 분이 계시는데, 그분한테나 가보려고 해요. 소경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앉은뱅이를 걸을 수 있게 해주신 분이랍니다.”

우씨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성 박사는 실소를 머금으며 말도 되지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따님의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호언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사기꾼일 겁니다. 대한민국 내에서 첫 손가락에 꼽는 이 병원에서 못 고치는 환자를 대체 어느 누가 고친다는 겁니까?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수술을 받을 방법이나 찾아보세요.”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신경외과 쪽 의사도 그 말을 거들고 나섰다.

“성 박사님 말이 맞아요. 요즘 세간에는 환자나 그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을 악용하여 엉터리 약이나 요법으로 돈을 뜯어내려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 사람들을 믿으면 안 돼요. 조심하셔야 해요. 그런 사람들한테 속아 돈은 돈대로 잃고 병만 키운 사람들을 여럿 봤어요. 아, 그런 사람이 따님의 병을 고친다면 이 세상에 소아마비나 척추 장애인 같은 불구자가 왜 있겠습니까?”

우씨는 의사들이 자기 모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 줄은 알았으나, 왠지 분하고 억울하여 눈물만 펑펑 쏟으며 듣고 있다가 돌아와 버렸다.

외롭고 불쌍한 두 모녀를 두고 고통의 시간은 꾸역꾸역 흘러갔다. 1980년도 달력의 마지막 장을 남겨놓은 12월 4일, 눈이 풀풀 날리는 날이었다. 지민은 변함없이 방 안에 누운 채로 창문을 통해 그 눈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고교 시절에 읽은 어느 시인의 시구가 생각났다.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지민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그리워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아보지 못한 자신의 삶이 가슴을 찌르듯 아프게 느껴졌다. 콧날이 시큰해지며 두 눈가에 괸 눈물이 주르르 귓전으로 흘렀다. 그때 부엌 쪽에서 어머니 우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선생님, 와주셨군요. 이렇게 눈이 오는 날씨인데도……!”

지민의 집을 누군가가 방문한 것이 얼마만의 일인지 모른다. 어머니가 몹시도 반갑게 맞이하는 방문객이라면 누구일까 잠시 생각하는 사이에 방문이 열리면서 어머니 우씨가 먼저 들어왔다.

“지민아, 수유리에서 네 병을 고쳐주시러 선생님이 오셨다.”
지민은 방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어젖힌 방문은 바깥의 환한 빛으로 눈부신 사각형이 되어 있었고, 그 사각형 안으로 어떤 사람이 들어섰는데 배경을 이루고 있는 빛으로 인해 하나의 실루엣처럼 보일 뿐이었다. 딴은 지민의 시력이 저하되어 있는 탓이기도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지민은 깜짝 놀랐다. 그 며칠 전 꿈에서 보았던 어떤 신령스러운 할아버지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꿈속에서 그 할아버지는 지민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는 아직 더 살아야 해.”
지민은 꿈에 보았던 할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현실 속의 할아버지와 눈길을 맞추었다.

몇 번이나 찾아와 애걸복걸을 하며 자기의 딸을 살려달라고 간청하는 우씨의 청을 받아들여 인산이 ‘일간 찾아갈 테니 집 약도나 그려놓고 가시오.’ 한 것이 이틀 전이었다. 스물세 살밖에 안 된 처녀가 결핵성 척수염에 걸려 몇 년째 자리보전을 하고 있으며, 극도로 쇠약해져 데리고 올 수조차 없으니 부디 자기 집으로 와서 딸의 상태를 살펴달라는 것이었다. 그 어머니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들은 것 자체가 인연이었으니, 달리 핑계를 대고 물리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틈을 내 환자의 집까지 발걸음을 했던 것이다.

인산은 지민의 손과 얼굴을 찬찬히 살핀 뒤, 이불을 걷고 그녀의 몸 전체를 살펴보았다. 첫눈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여길 수가 없을 정도라는 걸 알았다. 달라붙은 가슴과 배는 말할 것도 없고, 허벅지도 뼈가 그대로 노출되어 해골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위장의 기능은 미약하나마 아직 완전히 소멸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인산은 지민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친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말하듯 인자함이 그득한 말투였다.

“살고 싶으냐?”

방금 전까지 죽고 싶다는 염원을 곱씹고 있었던 지민이지만 인산의 물음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간절함을 담은 눈빛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럴 테지. 나도 네 나이가 아까워서 너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지금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뜸을 뜨면, 내년 가을쯤에는 네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게다. 알겠냐?”

인산은 장담을 했다. 지민도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만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인산은 지민의 어머니 우씨를 돌아다보며 말했다.
“오늘 일진(日辰)을 보니 그리 좋은 날이 아니고, 뜸 치료가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도 아니니 뜸은 내일부터 뜨기로 합시다. 내일 이맘때쯤 내가 다시 오리다.”

그 이튿날 인산이 지민네 집을 다시 방문하였을 때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사람들 여러 명이 대문 앞에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저 영감님이 수유리 도사 할아버지야?”
“글쎄 어제 와서는 1년 안에 이 집 처녀가 걸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대요.”
“그리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누? 병들지 않았으면 한창 시집갈 준비를 할 처년데…….”
“그나저나 저 영감님이 정말로 그렇게 용한 분인가?”
“누가 알겠수? 소문에 그렇다니까 그런 줄 아는 거지 뭐. 누가 직접 본 것도 아니고…….”
“그런데 대학병원에서도 고칠 수 없다고 한 환자를…… 뭘 믿고 1년 안에 걷게 해준다고 그랬을까? 이 집이 뜯어낼 만한 돈이 있는 집도 아닌데…….”
“보나마나 괜히 허풍 떠는 얘기지 뭐 별것 있겠어? 아, 어떻게 송장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1년 안에 살려내서 걸어 다니게 할 수 있겠냔 말야? 그게 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하는 소리야.”
아무튼 전날에 이어 다시 지민의 집을 방문한 인산은 우선 환자의 어머니로 하여금 환자의 웃옷을 위로 걷어 올리게 하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환자의 몸 상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처참을 극한 상태였다. 앙상하게 윤곽을 드러낸 갈비뼈 위에 얇은 살가죽을 감싸놓은 것 같은 환자의 모습은 도무지 살아 있는 사람의 형상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네 몸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너도 잘 알지? 그러나 지금부터는 반드시 네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신념을 잊으면 안 된다, 알겠느냐? 네 몸이 허약할수록 더욱 열심히 치료를 해야 하는 게야. 그래야 내가 말한 대로 1년 안에 걸을 수 있게 된단다.”

인산은 자애로움에 명확한 지침을 더하여 환자의 뇌리에 한마디 한마디 자기의 말을 심듯이 일러주었다. 그러고는 중완과 관원ㆍ슬안(膝眼)ㆍ족삼리의 뜸자리를 잡아 뜸을 뜨기 시작했다. 첫날 그 네 자리에 각각 9장의 뜸을 떴지만, 환자인 지민은 뜸 불의 뜨거움을 전혀 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목 아래쪽으로는 양손을 제외한 전신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당분간은 환자의 어머니께서 수고를 해주어야 하오. 우선 내가 가져온 뜸쑥을 주고 갈 테니, 그것을 모두 사용하게 되면 제기동 약재상에 가서 강화 약쑥을 사다가 내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계속 뜸을 떠주도록 하시오. 지금은 환자가 못 느끼고 있지만, 며칠 가지 않아 뜸 불의 뜨거움을 느끼게 될 것이오. 그것도 하나의 진전 현상이니, 아무 염려하지 말고 뜸을 떠주도록 하시오.”

인산은 마지막으로 뜸 치료에 따르는 여러 가지 금기사항을 상세히 일러주고 환자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면 곧바로 연락해 달라고 한 뒤, 환자의 집을 나섰다. 그 집 앞에 모여 수군거리던 동네 사람들이 인산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뜸 치료를 시작한 지민이 뜸 불의 열기를 감지하게 된 것은 불과 나흘 만이었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아니 자신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할 수 있을 만큼 움직일 수 있으려면 나아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지민은 그깟 뜸 불이 주는 고통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엄마, 쑥이 다 탔나 봐요. 새것을 올려놓고 다시 불을 붙이세요.”
지민은 죽기 살기로 뜸 치료에 매달렸다. 그녀의 어머니 우씨는 병약한 딸이 안쓰러운 나머지 하루에 스무 장 정도만 뜨는 것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가 딸의 성화에 못 이겨 다시 뜸쑥에 불을 붙이곤 했다. 그렇게 해서 하루에 뜨는 뜸이 40~50장에 이르렀다. 1주일째 되던 날 우씨는 딸의 기저귀를 갈아 채워주다가 딸의 몸에서 하나의 징후를 발견하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지민아, 이게 얼마 만이냐? 네가 다시 생리를 시작했구나. 아이고, 고맙기도 하지…….”

그날 지민은 모처럼 배가 고프다는 말을 했다. 그때까지는 하루 온종일 미음 한 그릇도 채 목 안으로 넘기지 못했었는데, 오후에 들어서면서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다섯 그릇의 미음을 먹었다. 환자도 제 어머니가 떠주는 미음을 받아먹으며 알 수 없는 서러움과 희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오랜만에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을 때에는 썩어가던 욕창 자리가 아물었고, 마침내 환자가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뜸 치료에 임하는 지민의 노력은 그 어머니 이외에는 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정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인산은 정기적으로 지민네 집을 방문하여 뜸 치료의 진행 과정을 확인하였고, 단계적으로 그 방법에 변화를 주도록 이르기도 하였다.

“이제 환자의 어머니는 뜸을 뜨지 않는 시간에는 환자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몸을 뒤척여주도록 하시오. 아직 환자가 스스로 운동을 할 수는 없으니, 그렇게 해서라도 혈액 순환을 돕고 근육에 새로운 힘이 생기는 것을 촉진시켜야 하오.”

그렇게 회복세를 보이던 지민의 몸은 치료를 시작한 지 1년이 거의 차가는 동안 계속 좋아지기를 거듭해 체중도 많이 불어나고, 상반신의 마비가 풀려 혼자 앉아 있을 수도 있게 되었다가 마침내 1981년 늦가을 무렵에 방 안의 의자를 붙잡고 가까스로 일어서는 기적을 이루고야 말았다. 인산이 말했던 대로 지민은 1년 만에 저 혼자의 힘으로 땅을 딛고 일어서게 되었으며, 1982년 늦봄부터는 한 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른 한 손은 어머니의 팔을 붙들고서 동네를 산책할 수 있게까지 되었다. 지민이가 죽으면 그 어머니도 뒤따라 죽을 것이므로 ‘겹초상’이 날 것이라고 예측하였던 동네 사람들은 그들 모녀의 그 모습을 보면서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러면서 ‘수유리 도사 영감’의 신통한 의술에 탄복을 금치 못했으며, 자기들 주변에서도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도사님에게 보이고 싶으니 연락처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해 오는 이가 적지 않았다.

지민이는 자기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때가 비로소 자기가 죽을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하고, 스스로 걸음을 다시 떼어놓을 수 있게 되자 그런 생각은 햇볕 아래에서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고 말았다. 숨 쉬는 공기의 맛이 달라졌고, 예전에도 늘 자기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을 하늘빛이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를 처음으로 알았다. 진정으로 살고 싶었다. 아니, 그녀에게 있어서 삶이란 이제 소망의 대상이 아니라 마땅히 충실해야 하는 당위적 목적의 대상이 되었다.

인산이 가르쳐준 대로의 쑥뜸 치료법, 즉 영구법은 지민의 가장 필수적인 생활 요소가 되었다. 그녀는 이제 얼마든지 스스로 뜸쑥을 뜸자리에 올려놓고 불을 붙여 그 열기를 몸 안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방 안에 자욱한 연기 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안위(安慰)와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물론 그에 따라 그녀의 건강 상태는 더욱 좋아졌다.

지민 모녀는1983년 여름에 부산으로 이사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지민의 이모가 두 모녀에게 방을 선뜻 내준 결과였다. 그때까지 살던 집에서는 집주인에게 너무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 또 새로운 방을 얻어 이사를 하려 해도 계속 쑥뜸을 떠야 하는 지민의 사정을 얘기하면 누구라도 방을 빌려주려 하지 않을 게 뻔했다.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서는 약쑥이 타는 연기 냄새를 늘 맡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려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거기에 살이 타는 냄새까지 겹치면 질색을 하기 마련이었던 것이다. 두 모녀는 부산으로 이사하자마자 경상남도 함양에 다시 내려와 살고 있던 인산을 인사차 방문했다.

“선생님의 하늘같은 은혜로 우리 딸아이가 이렇게 건강해졌답니다. 결핵도 완치되었고, 지팡이에 의지하기만 하면 제 다리로 어디든 갈 수 있게 되었답니다.”

두 모녀는 그동안 겪었던 지독한 고생과 되찾은 새 삶의 기쁨이 한데 섞여 있는 듯한 눈물을 흘리며 인산에게 감사해 했다. 인산은 지민에게 말했다.
“무엇보다도 너와 네 어머니의 강인한 의지가 너를 살린 것이다. 너의 몸은 앞으로 7년간은 계속 회복세에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기간에도 쑥뜸을 계속해야 한다. 다만 지금부터는 하지(夏至) 이후의 여름 두 달과 동지(冬至) 이후의 겨울 두 달 동안에는 쑥뜸을 중단토록 해라.”

지민은 인산의 그 말을 좇아 그 이후로는 1년 중 여덟 달 동안에만 쑥뜸을 계속했다. 쑥뜸이 지민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준 수단이었음을 말할 것도 없지만, 그것을 앞뒤로 합쳐 10년간 계속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세상의 다른 일들은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수월해지고 익숙해진다지만, 뜸 불의 고통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삼아 계속 이행한다는 것은 웬만한 결심이나 인내력을 가지고는 지키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지민은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감내해 냈다. 살아야겠기에, 그것도 정상인으로 건강하게 살아야겠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인산이 정해준 기간이 모두 지나간 1990년이 되었을 때, 지민은 이미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된 지 5년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마비가 덜 풀린 왼쪽 발목 때문에 약간 절룩거릴 뿐이었다.

그 후로 지민은 되찾은 자기 인생의 보람을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서 찾으며 값진 삶을 영위하고 있다. 꿈 많던 처녀 시절에 끔찍한 병마에 사로잡혀 속절없이 죽음의 세계로 끌려가다가 천행으로 인산을 만나 살아난 생명이기에, 죽음을 능가하는 10년간의 고통을 치르고 되찾은 제2의 인생이기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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