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62] 국적·인종·신분 관계없이 오직 질병 치료에 혼신의 힘

국내 최초 죽염 발명가이자 한방 암의학 창시자인 인산 김일훈 선생(1909~1992)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인산은 약속시간에 맞추어 서울 삼각지 로터리 한켠에 자리잡은 OO다방으로 갔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남씨 성을 가진 문관(文官) 한 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간청에 따라 그날 그 자리에서 미국인 위암환자를 소개받기로 하였던 것이다. 다방에는 남 문관과 부부 사이로 보이는 중년의 미국인 남녀가 이미 와 있었다. 대화는 남 문관의 통역으로 이루어졌다.

자신을 앤드류(Andrew)라고 소개한 미군 대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김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은 제 아내인데, 병원에서 말기 위암 진단을 받고 2년째 투병 중에 있습니다. 말씀드리나마나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저희 부부는 그동안 병을 고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1차로 위의 대부분을 절제(切除)해 내는 수술을 받았지만, 재발하는 통에 미국 내의 유명 병원들조차도 더 이상 손쓸 여지가 없다는 판정을 내린 상태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병원에서는 길게 잡아 향후 6개월을 넘기기 어렵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희 부부는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본인의 투병 의지가 강력하고, 저 또한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아내의 병을 고치고 싶다는 열망을 지니고 있기에 반드시 아내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제가 이번에 8군에 배속되어 한국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아내는 그것을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은 이미 5천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나라이기에 질병 치료에 관한 의술에 있어서도 뭔가 특별한 노하우가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의술이 현재로서는 첨단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제 아내의 병에 대해서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는 점에서 저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아내가 속수무책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 남 문관을 통해서 김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수많은 난치병 환자들을 낫게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언어와 피부색은 다를지라도 인류 보편의 사랑 정신에 기대어 김 선생님께 부탁드리니, 부디 제 아내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파란 눈에 진심을 담아 애소(哀訴)하듯 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인산은 마주 앉은 환자의 안색을 살펴보았다. 그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조차 힘에 부치는 듯 핏기 하나 없이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억지로 웃음을 잃지 않는 환자의 마음이 느껴졌다. 그들 내외는 보기 드물게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을 대하니 마치 동양의 신비스러운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선을 만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제 병을 고쳐주실 것만 같은 확신이 들기도 합니다. 선생님의 높은 인술로 제 병을 낫게 해주시기를 거듭 간청합니다.”

환자도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인산은 남 문관으로부터 이미 환자의 병증에 대해 듣고 준비해 간 약이 있었기에 그것을 꺼내 내밀었다. 바로 자신이 합성·개발하여 만든 ‘오핵단(五核丹)’이었다.

“이 약을 복용하시오.”

앤드류 대령 부부는 인산이 내민 것을 받아 조심스럽게 겉을 싸고 있는 종이를 펼쳐 그 안에 들어 있는 알약을 보았다. 메추리알 크기의 알약에는 금박이 입혀져 있었을 뿐, 그 성분이나 효능을 감지할 수 있는 아무런 실마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배를 갈라 암세포가 자리한 위의 대부분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했으며, 숱한 종류의 항암 치료를 받아온 환자로서는 인산이 불쑥 내미는 그 알약 하나로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게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앤드류 대령도 마찬가지였으며, 그들이 그렇게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환자는 자신의 병을 고치겠다는 굳건한 신념과 기왕에 인산에 대해 지녔던 신뢰가 있었기에 이내 경탄의 눈빛을 띠며 물었다.

“놀랍습니다. 저는 왠지 이 약이 저의 병을 낫게 할 것이란 느낌이 듭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 약은 어떤 재료로 어떻게 만든 것인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또 이 약을 앞으로 얼마 동안 복용해야 하는지도 궁금하고요.”

남 문관의 통역으로 그런 질문을 받은 인산은 되도록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 특히 우리나라의 상공에는 인체의 균형을 바로잡아 줄 수많은 영약(靈藥)이 분포되어 있소. 그리고 이 약은 그런 영약 가운데 쉽사리 고칠 수 없는 난치병과 새롭게 생겨나 괴질(怪疾)이라고 불리는 병들에 특효가 있는 아주 강력한 성분들만을 합성하여 만든 ‘신약(神藥)이오. 하지만 신약이라 하여 무슨 신의 계시에 의해 제조했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覺者)의 지혜로써 우주의 운행 원리에 입각하여 만듦으로써 그 비밀과 약성을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약’이란 의미로 알아두면 족할 것이오.”

인산은 그들에게 자신의 의료술이 어떤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인지 그 일면이나마 이해시키고 싶다는 생각조차 갖지 않았다. 그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일뿐더러, 이해는커녕 의구심만 증폭시킬 것이라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인산이 제조한 ‘오핵단’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인산은 광복 직후부터 정부가 수립되기 전의 기간 동안에 오핵단을 합성·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공간 색소 중의 특별한 약 분자들을 합성하여 인간이 복용할 수 있는 약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던 중, 살아 있는 생물체인 다섯 종류의 동물들을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대상 동물로는 유전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형성된 인자를 지니고 있는 토종 개 돼지 염소 오리 닭을 선정하였고, 그 동물들이 근원적으로 천계 28수의 어느 별에 조응(調應)하여 화생한 것인지에 따라 어느 약 분자를 집약할 수 있는지에 주목하였다. 예를 들어 개에게 인삼과 유황을 사료에 섞어 먹이면 공간 색소 중의 삼 분자가 개의 호흡을 통해 유입되어 그 간에서 인삼·유황과 합성·축적이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염소에게는 음양곽을, 돼지에게는 부자(附子)를, 닭에게는 독사에 슨 구더기를, 오리에게는 참옻 껍질과 유황을 섞어 먹여 1~3년간 사육하면 각 동물들의 간에 화학적으로나 물리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신비스러운 약 성분이 쌓이게 된다. 그 동물들의 간을 추출·건조하여 분말을 내고, 그것들은 일정 비율로 토종꿀에 개어 빚어낸 환약이 바로 오핵단이다. 살아 있는 동물을 이용함으로써 실험실에서 화학적으로 제조해 내는 일반 양약(洋藥)에 비해 성분 간의 결합·조화 능력이 탁월하여 약으로서의 효능을 보다 확실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1차적으로 생체를 통하여 걸러낸 뒤 2차적으로 인간이 복용케 함으로써 일반 한약(漢藥)을 비롯한 모든 약에 들어 있는 독성분을 제거하였다는 장점을 지닌 오핵단은 가히 지구상에 유일무이한 ‘신약(神藥)’이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는 것이었다. 인산이 몇 차례 실험해 본 결과, 오핵단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인체의 균형을 복원하는 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큰 효능을 발휘하였다. 그것은 인체의 특정 부위와 관련된 질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체의 온갖 장기에 두루 영향을 미쳐 소우주인 인체의 온전한 상태를 복원시켜 우주의 근본 질서와 합일시키는 신비로운 약이었다.

“일단 이 약을 4등분하여 3일 간격으로 복용토록 하시오. 그러노라면 필시 본인의 병이 나아가고 있음을 스스로 감지할 수 있을 게요. 약값일랑 효과를 본 연후에 들어간 재료비 정도만 받을 터이니 그리 알고 돌아가시오.”

‘당신의 병을 고칠 약은 이미 당신의 손에 쥐어졌으니, 그저 정성껏 복용하기만 하면 당신의 병은 단시일 내에 낫는다’는 무언의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내는 인산에게 앤드류 대령 부부는 어디서 배웠는지 두 손을 합장하여 코끝에 대고 이마와 눈길을 아래로 향하는 인사를 보내왔다.

“선생님, 정말로 저 앤드류 대령 부인의 병이 낫는다면 전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될 것입니다. 코리아의 전통 의료술이 첨단 과학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서양, 그것도 미국의 의료술을 능가했다고 말입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 대한민국을 미개인이나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저들의 높은 콧대가 납작해질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아서 저도 기대가 됩니다.”

약간의 흥분된 느낌을 담아 떠벌이는 남 문관의 얘기를 인산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딴에는 상시적(常時的)인 무력감이 그의 명치끝에 무겁게 걸려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코리아의 전통 의료술이라고? 여보게, 우리의 전통 의서 어느 것을 들추어 봐도 오핵단이라는 것은 털끝만큼도 비추이는 바가 없다네. 내가 이 세상에 가져온 의학의 비밀은 전통에 의한 것이 아니란 말일세. 아시겠는가? 그리고…… 첨단 과학이라고 일컬어지는 서양 의료술의 한계가 내 눈에는 훤히 비쳐 보이건만,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지혜가 지난 50년간 있는 듯 없는 듯 묻혀 지낸 비극을 자네는 짐작이나 하겠는가? 또 앞으로도 얼마 동안 그렇게 파묻혀 있어야 하는지 자네는 아는가? 서양 사람들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는 일만으로도 자네는 통쾌함을 느낄는지 모르지만, 점차 증대될 서양 의료술의 영향력과 그에 따라 무고한 인명이 아무것도 모른 채 무수히 희생될 것을 생각하면 내 가슴은 갈가리 찢어진다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 문관이 희색이 가득한 얼굴로 인산을 찾아왔다.

“앤드류 대령 부인의 병세가 눈에 띄게 호전되었습니다. 식사도 훨씬 수월하게 할 뿐만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30분씩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랍니다. 앤드류 대령은 꿈만 같다며 선생님에 대한 칭송을 입이 마르도록 했습니다.”

남 문관은 마치 자신이 크나큰 일을 해냈다는 듯이 어깨를 활짝 펴면서 말했다. 인산도 보람을 느끼기는 매한가지였다.

“흠…… 그 부인이 약을 정성껏 복용하긴 했던 모양이로군. 그렇다면 오핵단을 하나 더 주어야겠군. 암 덩어리의 뿌리를 뽑으려면 아주 확실하게 해야 할 테니까…….”

인산이 그렇게 말하자, 남 문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덥석 덤벼들었다.

“그렇잖아도 앤드류 대령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오핵단을 자기가 전부 사겠다고 말씀입니다. 값은 얼마든지 쳐서 드리겠다는 말까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순간이면 인산은 자신의 귀를 씻어내고 싶은 심정이 들고는 했다. 어쩌면 인간들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죄다 그렇게 욕심투성이 속물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자네는 지금 제정신으로 그 말을 내게 전하는 겐가?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오핵단을 다 내놓으라고? 이 세상 인류를 병고에서 건지러 온 이 사람이 돈에 혹할 것이라고 자네도 생각하나? 내가 돈에 욕심을 내었으면 벌써 이 남한 땅을 모조리 살 만큼 돈을 벌었을 것이네. 어째 그리도 사람 보는 눈이 어둡던가? 돈이란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가서 제대로 쓰일 때 가치가 있는 것이고…… 나라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병마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해줌으로써 기쁨을 벌면 그만인 것일세. 앤드류에게 가서 전하게. 미국 중앙은행에 있는 돈을 모두 싸 짊어지고 온다 해도 오핵단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고 말일세.”

인산으로부터 야단을 맞은 남 문관은 머쓱해진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몰라 쩔쩔맸다.

“어이쿠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무지하고 철없어서 선생님의 높으신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고…….”

“됐네, 이 사람아. 여기 오핵단을 하나 더 줄 테니, 앤드류 대령에게 전하게. 이것을 마저 복용하면 더 이상 오핵단을 복용할 필요가 없을 걸세. 그 이상은 쓸데없는 욕심에 불과해. 그리고 이것을 복용한 뒤에는 영양제나 일반 보약을 복용해도 좋다고 전하게나.”

앤드류 대령의 부인은 그로부터 얼마 뒤에 본국으로 돌아가 ‘위암세포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병원의 확인을 받고 새로운 삶을 얻은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편지를 남 문관을 통해 보내왔다. 그러고는 사례(謝禮)의 뜻으로 난데없는 사진 현상기 1대를 보내왔다. 아마도 친정 집안과 관계되는 회사의 제품인 것 같았다. 인산은 남 문관으로부터 그 기계가 아주 값진 것이고 사진 계통의 종사자라면 누구나 군침을 흘릴 만큼 우수한 장비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인산에게는 별무 소용의 물건이었다. 그러던 차에 인산에게 그런 기계가 손에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은 주변 사람 하나가 그 기계를 자기에게 양도해 줄 것을 요청해 와, “시세껏 값을 치르고 가져가라”고 했더니, ‘얼씨구나’ 하면서 당시로서는 거액이라 할 수 있는 120만 원을 내놓고 그 기계를 가져갔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사람은 그것을 다시 일본의 무슨 회사에 1천만원이 넘는 돈을 받고 넘겼다고 했다.

아무튼 인산은 환자를 대함에 있어서는 국적이나 인종, 신분 따위와 관계없이 오직 질병 자체만을 상대하여 자신이 지닌 의료 지혜를 발휘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본분이라고 여겼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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