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58] 천연기념물 154호 ‘상림’ 품은 함양, 성자를 기다리다

천연기념물 154호 함양 상림

 

경상남도 함양읍에는 ‘상림(上林)’이라는 인공 숲이 있다. 예전에는 ‘대관림(大館林)’이라고 불렀으나 그 숲의 중간 부분이 홍수로 무너져 상림과 하림(下林)으로 나뉜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하림은 훼손되어 흔적만 겨우 남아 있고, 상림만이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 상림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함께 우리 선조들이 홍수의 피해로부터 농경지와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발휘했던 슬기를 알 수 있는 문화 사료 가치도 매우 크므로 국가에서는 천연기념물(제154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상림에는 신라 말기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이 도력(道力)으로 함양읍에서 30여리 떨어진 백운산의 나무들을 하룻밤 사이에 옮겨 심어 조성한 것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전설의 내용을 간략히 서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0년 전, 최치원 선생은 문란한 국정을 통탄해 한 나머지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천령군(天嶺郡, 함양의 옛 지명)의 태수로 부임하였다. 그런데 어느 해 여름에 위천(渭川)이 범람하여 백성들이 애써 경작한 논밭이 물에 잠기고 가옥들이 무너지는 재해가 발생하였다. 그때 최치원 선생은 홍수 피해를 근절시키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위천 가에 호안림(護岸林)을 조성할 것을 생각해 내고는, 백운산의 산신(山神)을 불러 엄명을 내렸다.

“오늘밤 자시(子時)에서부터 축시(丑時) 사이에 백운산의 나무들 중 천령 땅을 침노하는 살기(殺氣)를 막아줄 나무들을 골라 위천수 가에 심어주시오.”

최치원 선생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백운산 산신은 힘 좋은 호랑이와 곰 등의 산짐승들을 모조리 불러 모아 뿌리가 튼튼하고 잘 자라며 병충해에도 강한 나무-갈참나무ㆍ졸참나무ㆍ개서어나무 등-들을 골라 천령 고을 서북쪽 위천수 가에 심게 했다. 그리하여 산짐승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30리 길을 오가며 밤새 나무를 옮겨 심었다. 약속한 축시가 되었을 무렵, 위천수 가에는 거대한 숲이 완성되었다. 숲의 길이는 고을 서북쪽에서 서남쪽에 이르기까지 약 10리에 달했고, 그 폭은 1백 길[丈]이 넘는 규모였다.

그렇게 대관림이 조성된 이후부터는 천령군에 어떤 재앙도 들어오지 못했다. 훌륭한 주재자를 맞아들인 덕택으로 천령 땅은 낙토(樂土)로 변모하여 새로운 역사의 장이 되었던 것이다. 대관림에 가득한 영기(靈氣) 탓인지, 숲속에는 파리ㆍ모기를 비롯하여 개구리ㆍ뱀 등 잡스러운 곤충이나 동물들이 일절 서식하지 않았다. 그리고 활엽수가 아닌 침엽수는 단 한 그루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최치원 선생은 천령군의 태수직에서 물러나면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천년 뒤, 대관림에서 소나무가 나고 짐승들이 서식하기 시작하면 내가 다시 이 땅에 온 줄 알라.”

최치원 선생은 그로부터 얼마 후에 사바세계를 뒤로 하고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영영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관림은 광복 이후에 탐욕과 무지로 눈이 먼 사람들에 의해 남쪽 부분에서부터 잠식당해 농경지로 전환되거나 주택이 들어서는 등 훼손되어 결국 절반이나 사라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고을 유지들이 힘을 모아 대관림을 보존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서서, 마침내 상림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알게 모르게 대관림 한 모퉁이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에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던 모기들이 숲속에 생기고, 새들도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상스런 일이었다. 과연 전설이 전하는 바와 같이,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었다던 최치원 선생이 이 땅에 다시 올 때가 된 것일까?

어느덧 인산은 4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 계룡산 서쪽 용화사(龍華寺) 골짜기 감나무골(일명 박살미)에서 이태 가까이 살면서 차남 윤세(윤世)를 얻었다(1955년). 그때까지도 인산의 삶은 빈궁과 고난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올 때부터 그가 지니고 있던 무량 지혜는 그로 하여금 자신을 사회적 존재로 인정하는 데 있어서는 아무래도 하나의 걸림돌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인산은 세상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것 자체를 꺼렸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어줍지 않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독존(獨尊)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숨어 사는 것처럼 살면서, 막노동으로 처자식과 더불어 근근이 살아가는 고단함 속에서 자신의 존귀함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세상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자신의 지혜를 기록으로 세상에 남김으로써 먼 훗날 그것이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또 퍼져 뿌리를 내리는 과정을 거치면, 만인이 질병을 모르는 세상을 이룰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잠시 상경(上京)하여 혼탁한 세상 물에 발을 담갔던 적이 있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은진의 최영호 선생이 찾아와 대통령이 찾고 있으니 함께 가보자고 인산의 손을 잡아끌었기 때문이었다.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金長興)의 안내를 받아 재회한 이승만 대통령은 인산을 보자 반색을 하며 이것저것 안부삼아 물은 연후에 만나자고 한 본론을 꺼냈다.

“인산, 내가 함 부통령에게 해놓은 얘기가 있으니…… 그분을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고 적극 나서서 추진해 주기를 바랍니다.”

인산은 6ㆍ25 직전에 백성욱 박사의 진언을 묵살하였다가 막상 전쟁이 터지자 수원으로 피신하면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북진 통일을 호언하여 국민들을 헷갈리게 했던 대통령의 처사가 생각나 내심 언짢았으나,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분은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존재하는 사람이고, 자신은 자신대로 존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경무대를 나선 인산은 서소문에 있는 함태영(咸台永) 부통령의 집을 찾아갔다. 부통령은 인산과 초면이었다. “오, 인산! 말씀은 많이 들었소.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많았소이다.”

부통령 역시 인산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통령은 이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삼일정신 선양회’라는 조직을 발족했는데, 인산에게 그 전국 조직의 책임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함 부통령이 그 조직의 총재였고, 대법원장인 김병로 선생이 부총재였다. 인산이 삼일정신 선양회의 성격이나 활동 방향 등에 관해 물어본 결과, 그 당시에 벌써 암암리에 이 대통령의 후계자로 알려지고 있던 이기붕(李起鵬)을 뒷받침해 주는 방조 세력으로서의 성격이 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는 그 일을 맡기에 적격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다른 인물을 알아보시는 것이 합당하리라 생각됩니다.”
인산은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 함 부통령의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인산이 묵고 있던 종로 1가의 화신여관으로 김병로 선생이 찾아왔다.

“오랜만이오, 인산.”
가인(街人, 김병로의 아호) 선생은 인산의 손을 굳게 잡으며 그 맑은 눈빛을 마주쳐 왔다. 인산과는 광복 직후 송운 방주혁 선생의 소개로 알게 되어 조국의 미래에 대해 허심탄회한 의견을 나누던 사이였던 그였기에 인산도 반갑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현 대법원장으로서 대쪽같이 곧은 성품과 청렴결백한 처신으로 세인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가인 선생님께서 여기까지 저를 보러 오시다니……. 제가 찾아뵈어야 했는데…….”
인산은 모처럼 불쾌한 냄새를 풍기지 않는 인물과 마주했다는 것 자체가 흡족하였다. 하지만 들어보나마나 삼일정신 선양회 건으로 자신을 설득하러 온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인산, 부통령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소. 아마도 삼일정신 선양회의 발족 취지에 대해 다소간 오해가 있었나본데, 웬만하면 마음을 돌려 애를 써주시면 좋겠소. 달리 복잡한 생각은 할 것도 없고, 오직 그 이름 그대로 삼일정신을 되새겨 우리나라를 받치는 하나의 기둥으로 삼자는 뜻 하나만 생각해 주시오. 그렇지 않아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애쓴 분들이 빠짐없이 모여 국가 발전을 위해 훌륭한 의견도 내어주시고, 또 활발히 활동해 준다면 얼마나 좋겠소? 나 역시 그런 뜻으로 부총재직을 수락한 것이니, 나를 봐서라도 생각을 다시 해주셨으면 하오. 사실 인산의 끝 모를 지혜나 성품으로 보아 그런 사소한 일을 맡기기에는 오히려 내가 민망하오만, 모처럼 인산에게 협력을 당부한 경무대 이 박사의 체면도 있지 않겠소?”

인산은 가인의 말을 들으며, ‘이래서 인간관계란 것이 대개는 번잡스럽다.’는 생각을 또 가졌다. 하기 싫은 일도 인간관계 때문에 마지못해 해야 하는 이런 경우가 그랬다. 그것도 끝까지 완곡한 말로 부탁하는 수준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나중에는 사뭇 강권하다시피 매달리는 상대방을 만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인산은 잠시 동안의 일탈(逸脫)이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수락 의사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인산은 그 이튿날부터 함 부통령으로부터 조직 대상자 명단을 넘겨받아 삼일정신 선양회의 조직을 갖추어 나가는 일에 착수하였다. 먼저 구한말에 판서(判書)를 지내던 사람의 아들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함 부통령과도 막역한 사이인 남상철 선생을 만나 중앙회 회장직을 맡아 달라고 요청해 수락을 받아냈다. 그에 따라 중앙 조직은 남 회장이 맡고 지방 조직은 인산 자신이 맡기로 약조했다.

인산은 그로부터 넉 달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흩어져 살던 독립운동가들을 차례로 만나 일사천리로 삼일정신 선양회의 조직 구성을 완료하였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 일에서 손을 떼고 싶었기 때문에 서두른 결과였다. 그 발족 취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좋았지만 종국에 가서는 조직의 힘을 선거에 이용하려 할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인산은 일을 마치는 즉시 온다간다 말도 남기지 않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최영호 선생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린 게 빌미가 되어 그런 일이 있게 되었으므로, 최영호 선생을 비롯한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지리산 자락으로 몸을 감췄다. 그리하여 그곳 전라북도의 남원과 운봉에서 두어 달간 머물다가, 최치원 선생이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땅 경상남도 함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인산의 행보가 흐르고 흘러 자연스레 귀착한 곳이 바로 함양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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