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56] 국민의료법 제정과 한의사자격증에 숨은 이야기들

한의사자격증을 거부했던 일에 대해 후회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일관된 각오만이 금강석처럼 굳어져 갈 뿐이었다. ‘나는 비록 비참하게 늙어 죽을지라도 다음에 태어나는 세대들은 행복하게 살다가 가게 해주어야지. 병에 걸린 사람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을 알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은 오래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어야지.’(본문 중에서)

1951년 9월 25일, 정부는 국민의료법을 제정ㆍ공포하였다. 비록 전시(戰時)이긴 하였지만 정부 수립 이후 각 방면에서의 국가 체제 정비를 해나간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 법에 따라 그 이듬해 1월 15일에 한의사국가시험령이 반포되었고, 같은 달 30일에 국가시험 응시자격 검정시험 규정이 마련되었다. 전통 의학에 입각하여 환자들을 치료해 오던 한의사들이 비로소 법적 근거를 갖고 개업을 할 수 있는 제도가 그때 생긴 것이다.

당초에는 한의사를 의사로 볼 수 없다는 편견과 의료인으로서의 역할 분담에 저항감을 가진 양의사 측의 주장에 따라 한의사 제도를 제외시킨 가운데 양의에 대해서만 이를 의료인으로 규정한다는 내용의 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하지만 방주혁ㆍ김영훈ㆍ박호풍ㆍ박성수ㆍ조헌영 등을 비롯한 한의계 인사들의 줄기찬 노력으로 한의와 양의를 아우르는 이원제(二元制) 국민의료법안이 새로 마련돼 최종 확정되기에 이르는 곡절을 겪은 결과였다.

당시의 보건부 관료들 대부분은 양의 측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한의학을 의학의 범주에 넣는 일은 국가 의료 정책에 혼란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과학적 상식에 비추어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처음의 법안을 기초했던 것이다. 그때 오랜 역사 속에서 연면(連綿)히 이어져 온 전통의학의 맥이 끊어질 뻔한 위기를 넘긴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인산은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보건의료정책을 수립함에 있어서 무조건 서양의학만을 그 중심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 이어져 내려온 의학이나 그 밖의 실효성 있는 의학체계를 두루 포괄할 수 있는 포용력 있는 자세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며, “동서양의 의학을 망라한 통합 의료기관을 각 도시마다 설립한다든가, 또 그런 성격의 교육기관을 다수 설립하는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었다.

또 “서양 의술의 독주는 우리 국민들의 건강과 생존에 공연한 화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최소한 서양의학과 전래의 우리 동양의학과의 접목 정도는 정책적으로도 감안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국민의료법에 한의사 제도를 포함시킨 일에 대해서는 인산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반갑게 여겼다. 특히 한의계의 거두 일송(一松) 박성수 선생이나 송운 방주혁 선생은 인산과 개인적으로도 자별(自別)하게 지냈던 사이이고, 김영훈ㆍ박호풍 선생들도 몇 차례에 걸쳐서 우리나라 의료계의 미래에 대해서 인산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곤 했던 분들이었다.

그들 모두 인산보다 적게는 10년에서 많게는 30년 이상의 연장자들이었으나, 인산이 지닌 신의학의 세계에 깊은 관심과 긍정을 보이며, 그가 불치병으로 다 죽어가는 환자들을 살려내는 실제의 사례 앞에서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기도 하였었다.

돌이켜보면 한의학은 사회적 인식 면에서나 내실(內實)의 측면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미 한 차례 소금에 절여진 배추의 몰골이 되어 있었다. 우리의 전통이나 정신적 바탕이 될 만한 것이라면 모조리 없애버리려 했던 일제의 폭압에 의해 한의학 자체가 쇠잔 일로를 걸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새로 선 우리의 정부마저도 한의학을 의료 체계에서 제외시키려 하는 등 전통의학을 홀대하자, 한의계 인사들은 오히려 대동단결을 꾀하게 되었다. 당시 이같은 의견이 분분하였었다.

‘한의학의 튼튼한 버팀목이 될 한의사들을 규합하자.’
‘전통 의학의 맥을 잇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나갈 인재들을 양성하자.’
‘한의학을 가르치는 정규대학을 설립하고,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정립해야 한다.’

방주혁ㆍ박호풍 선생 등은 인산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통의학인 한방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몇몇 방안을 개진하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인산이 치료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 한ㆍ양방의 상호 협력과 교류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ㆍ양방 종합병원의 설립안을 제시한 것이나, 한의과대학의 설립을 건의한 것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고 있던 터였다.

그랬기 때문에 한의계의 초석을 새로이 다지는 일에 관여한 인사들은 ‘인산’으로 하여금 반드시 자기들과 합세케 하여 그의 식견과 능력을 크게 쓰고자 하였다. 하지만 까다로운 자격조건을 내세울 것도 없이 그저 ‘어느 정도’의 요건만 충족시키는 사람이라면 한의사로 인정하여 줌으로써 한의계의 사회적 세(勢)를 키우는 것이 합당하다는 생각을 지닌 그들에게 동조할 수 없었던 인산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김영훈 선생을 비롯한 인사들은 새로 발효된 국민의료법의 한의사 제도 규정에 따라 인산에게도 한의사자격증을 발급해 주겠다고 하였으나, 인산은 수령을 거부하였다. 너나 할 것 없이 한의사 자격증을 받으려고 발 벗고 나서는 판에, 이를 거부하는 인산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로 대했다.

“인산, 거 너무 외곬으로만 생각지 마시고 좀 세상을 여유 있게 보시면 아니 되겠소?”

인산이 자격증 수령을 거부하자 초창기 한의계를 이끌던 인사 한 사람이 인산에게 그렇게 말했다.

“세상을 여유 있게 보는 것과 개나 소나 먼저 달려온 자에게 자격증을 뿌리듯이 발급해 주는 처사를 인정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릅니다. 물론 선배 여러분께서 한의계의 조속한 부흥을 위해서 고육지책으로 그런 방법을 쓴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명(人命)을 다루는 의사의 자격 기준을 그렇게 낮춰 잡는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양의학계에서 한의학계를 업신여기는 현상도 더욱 심해질 터이고요. 내가 생각하기에 한의학계를 위해서는 지금이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봅니다. 지금 잘못 떼어놓은 한 발짝은 10년, 백년 뒤에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여 돌이킬 수 없는 화(禍)가 될 것입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듯이…… 지금 당장 한의사의 머릿수만 많이 채우려 든다면 한의사들의 질적 수준 저하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으로도 한의사들에 대한 불신을 키워 환자들로 하여금 한의원을 멀리 하게 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나는 어차피 한의학을 공부한 한의사가 아니므로 호의인 줄 알면서도 그 자격증을 넙죽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인산은 인간들이 모여 이루는 ‘사회’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그 ‘사회’ 속에서 요령 하나로 휘젓고 다니는 자들이 득세하고 올바른 생각을 지닌 사람은 도리어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현상이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닐 테지만, ‘자격증 나눠 갖기’는 아무리 변명해도 협잡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방주혁 선생까지도 나서서 인산에게 한의사로서 제도권 내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인산에게 깍듯이 ‘선생’이라는 호칭을 썼다.

“우리 한의학계는 누구보다도 인산 선생 같은 분을 필요로 하오. 대국적인 견지에서 인산 선생 개인의 생각은 잠시 접어두는 것도 지혜라면 지혜라 할 것이오. 나는 일찍이 작고하신 형님께서 인산 선생이 이 나라의 국운을 새로이 열어 나갈 비범함 인물임을 예언하였던 일을 잊지 않고 있다오. 인산 선생 같은 분이 우리 한방 의학계를 위해 진력해 주신다면, 한의학계의 미래는 탄탄대로를 걷게 될 것이라 믿고 있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인산 선생이 일단 우리 한방 의학계에 몸을 담은 연후에, 그 지니고 있는 큰 뜻을 하나하나 펼쳐 나가는 것이 보다 바람직한 것 아니겠소? 그러니 너무 냉정하게 거절하지 마시고 새로이 태동하는 우리 한방 의학계의 중지(衆志)를 받아들여 주오.”

인산은 인간적으로 거역하기 어려운 분의 권유인지라 잠시 망설인 것도 사실이지만, 아무리 되생각해도 자신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송운 선생님, 외람되지만 저는 여러 선배님들께서 가고자 하시는 지금의 노선은 이 나라 한의학계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미 그 능력이 의심되는 많은 사람들이 한의사로서 행세를 해왔거니와, 지금의 방침대로라면 그런 엉터리 한의사들이 더욱 양산되어 무분별한 진료 행위로 한의학계에 씻을 수 없는 불명예를 가져다주는 행태를 저지를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의 ‘거짓말 의학’을 깨끗이 쓸어버리고 새로운 의학, 누구라도 스스로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그러한 의학의 길을 열고자 이 세상에 온 사람입니다. 어린애들 장난같은 짓거리인 면허증 때문에 천치같은 자들 앞에서 시험이랍시고 말도 안되는 무식한 글을 긁적거릴 수는 없습니다.”

사실이 그랬다. 인산은 ‘옛날 할아버지들’이 써놓은 기존의 의서들의 내용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죽은 의학’의 신봉자들-이미 한의사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앞으로 배출될 사람들을 통틀어-이 자격증을 갖추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에게서 인간 질병 구제에 대한 무슨 희망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말이다.

시대는 점차 눈부신 기계ㆍ공업 문명의 발달로 치닫고 있는데, 어떤 의서가 그런 문명에서 파생되는 각종 공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생기는 질병에 대해 그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장차 그런 의서들이나 기존의 의학 이론들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후세 영원토록 인류의 건강을 지키고 질병을 극복할 수 있는 간편하고도 확실한 의료 방법을 밝혀내 세상에 전해주고자 40여 평생을 연구하며 살아온 인산에게 대한민국의 한의사자격증이란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는 거짓투성이 구시대 의서를 익혀 그것을 토대로 의원 노릇을 해온 사람들에게 한의사로서의 자격을 인정해 달라고 청원하여 자격증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인산은 그냥 시험장에 참석해서 시험지에 이름 석자만 적어주면 자격증을 발급해 주겠다는 호의에도 들은척 만척이었다.

사람들은 인산에게 우선 한의사자격증을 받아 그것을 활용하여 구세제민(救世濟民)의 성업(聖業)을 펼쳐 나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 아니겠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격이라는 것은 특정 분야의 전문지식을 익히고 그에 따르는 수련(修鍊)을 쌓은 다음 일정한 시험을 통과했을 때, 그 분야를 대표하는 사람에게서 부여받는 것이다.

일곱 살 때 우주의 원리에 따라 만물에 깃든 약성의 원리를 터득하여 이 세상의 의술로는 살릴 수가 없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치병 환자들을 낫게 해주면서 40여 평생을 살아온 그에게, 누구라서 옛 의서나 들여다보며 익힌 알량한 지식으로 밥벌이에 급급한 일반 의료인들과 같은 반열에 설 것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석가모니에게 불교학 박사학위를 받으라고 하거나, 예수에게 신학 박사학위를 받으라고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누가 그들에게 학위를 수여할 것이며, 누가 그들의 학위 심사를 할 것인가? 이 세상을 두루 보아 그 허(虛)를 메우고 실(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자에게 세상 사람들의 줄서기에 동참하라고 권유하는 것이 과연 호의(好意)인가, 아니면 무지의 소치인가?

국민의료법의 발효로 시행되기 시작한 한의사 제도는 그 초창기에서부터 갈 지 자 걸음을 걷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한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과 임상(臨床) 경험을 엄정하게 심사하여 자격증을 주는 대신, 의료인을 자처하며 행세했던 어중이떠중이들에게 나눠 먹이 식으로 자격증을 남발해 한의학계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 결과 각종 의료사고가 빈발하고, 심지어는 한의사면허증을 타인에게 빌려준 대가로 먹고 사는 사람들까지 생겨나는 망국적 폐단이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시의 한의사 자격시험은 열 개의 과목으로 치러졌는데, 과목당 10점 만점에 총점 60점을 획득하는 사람은 합격시켰다. 그나마 전쟁이 끝나지 않은 혼란을 틈타 과목당 2만 원씩 20만 원의 돈을 갖다 주면 면허증을 살 수 있다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다. 지나간 시절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연유에 따라 인산은 제도권 밖에서 고독한 의인(醫人)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가 개척하고자 한 신의학의 길은 전인미답의 길이요, 당대에는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기 힘든 세계였다. 그 나름대로 백 번 양보하여 한의학이 되었든 양의학이 되었든 그가 보는 우주의 원리에 부합하는 내용의 장점이 있다면 이를 살려 나가며 명실 공히 한ㆍ양방을 망라한 새로운 의학 체계를 보다 신속하고 수월하게 이루어보겠다는 계획은 이로써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알고 있어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는 마음, 알고 있는 우주의 비밀을 혼자만의 가슴속에 묻어놓고 아프게 지내야 하는 세월이 때로는 짐 겨울 때도 있었지만 인산이 한의사자격증을 거부했던 일에 대해 후회를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일관된 각오만이 금강석처럼 굳어져 갈 뿐이었다.

‘나는 비록 비참하게 늙어 죽을지라도 다음에 태어나는 세대들은 행복하게 살다가 가게 해주어야지. 병에 걸린 사람은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길을 알 수 있도록 안내해 주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은 오래오래 살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어야지.’
인산은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 김면섭에게 약속하였던 <신약본초>(神藥本草)를 세상에 남김으로써 자신이 보아서 알고 있는 우주 신약의 비밀을 만천하에 공개할 것을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다짐하였다.

‘그것이야말로 인류 건강을 위한 만고불변의 이정표가 되리라. 나의 사후 세세 만년토록 지구상의 인류는 내가 밝힌 비밀에 따라 자신의 질병을 고치고, 건강ㆍ장수케 되리라. 내 기필코 인류의 미래에 꺼지지 않는 등대 불을 켜리라.’

인산은 이후로부터 별세(別世)하기까지 도합 아홉 차례 허가 받지 않은 상태에서 ‘불법 의료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당국의 제재(制裁)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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