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54] 부산 동광동 세춘한의원 시절…”거기 가면 못 고칠 병이 없다네”
마침내 김일성의 명령을 받은 공산군들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하여 한반도 전역이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시종 진행 과정이나 그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 사실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인산은 전쟁 발발에 앞서 부산에 내려가 있었으나, 그 전쟁을 미리 예견하고서도 이 민족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던 현실 때문에 내내 마음이 아팠다. 그 자신 역시 6.25 전쟁을 예견했던 백성욱 박사 한 사람만 인산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뿐, 그 밖의 사람들은 다가올 난리에 대비해야 한다는 인산의 말에 무관심과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세상 사람들이란 자신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채, 헛된 고집만 쇳덩이처럼 단단히 영글어 있는 존재들이었다. 결국 그 자신 역시 미래의 일을 미리 감지한 지혜자로서 백성욱 박사는 국가와 국민을 전란으로부터 보호하고 나아가 국토 통일의 위업을 달성코자 인산에게서 들은 대로의 ‘통일 전략’을 대통령에게 진언했지만,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를 하는 것으로 묵살 당함으로써 인산과 함께 계획한 그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 않았던가 말이다.
인산은 내무장관인 백성욱 박사를 통해 국난을 전화위복의 호기(好機)로 삼으려 한 자신의 시도가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며, 우리 국운(國運)의 빈약함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아쉬움과 안타까운 마음을 지닌 채 부산으로 내려간 인산은 부산역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동광동 5가에 6~7평 정도 되는 조그만 방 한 칸을 월세로 얻어 세춘한의원의 문을 연 것이었다. ‘한의원’이란 간판을 내건 것은 그 자신이 한의사를 자처했기 때문은 아니었으며, 다만 한 사람의 환자라도 더 찾아올 수 있게 하려는 뜻이 그 전부였을 뿐이다.
‘세춘’의 ‘세(世)’는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의미하고, ‘춘(春)’은 무릇 생명을 지닌 것들이 생명력으로 충만해지는 때를 의미함이니, 곧 병이 들어 고통 받는 환자들에게 새로운 생기를 되찾게 하여 건강한 삶을 살아가게 하겠다는 인산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는 이름이라 하겠다.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그에 순응하며 살기보다는 마음속의 욕심과 눈앞의 현실을 좇아 정신없이 살기 쉬운 것이 일반인들의 삶의 방식이다 보니, 자연 그들의 육신에는 질병이 침노하기가 십상이다. 세상만사에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다고 볼 때, 인간의 질병이란 결국 환자 스스로 자초한 것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질병의 표면적 증상은 약의 힘을 빌려 고칠 수 있지만, 근본적인 치료는 환자 스스로 삶의 방식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환자 치료에 임하는 인산의 마음속에는 그러한 믿음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소한 질병에 걸린 환자에서부터 중병에 걸린 환자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에게는 치료 이외에도 올바른 생활 태도를 강조하여 일러주는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망가뜨리는 숙살(肅殺)의 기, 즉 살기(殺氣)를 멀리하고 건강과 활력에 찬 삶을 살아가도록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주고 싶은 것이 인산의 마음이었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인민군들을 피해 사람들은 남으로 남으로 몰려 내려와, 항도(港都) 부산은 유사 이래 최대의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낯선 피란지에서 헐벗고 굶주린 피란민들 가운데에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못 먹어서 걸린 병,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감염으로 인한 병, 희망이란 것을 갖지 못해 생긴 병, 두고 온 고향이 그립고 빼앗긴 가옥이며 전답으로 마음속의 울화를 다스릴 수 없어서 걸린 병……. 전쟁은 쉽게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부산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만 갔다.
세춘한의원은 연일 찾아오는 환자들로 발 들여놓을 틈조차 없었고, 인산은 그들을 돌보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환자들의 주머니 사정이 넉넉할 리 없었기에 열에 아홉은 빈손으로 왔다가 약첩 봉지를 들고 돌아가고는 했다. 모든 물자가 귀한 전시 상황이라 약재 값 또한 부르는 게 값이었지만, 인산은 대가를 생각지 않고 찾아오는 모든 환자들에게 처방을 내리고 약을 지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춘한의원은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들은 인산이 제공하는 잠자리와 따뜻한 밥, 막걸리 사발에 기대어 피란지의 외로움을 달래는 한편, 인산이 들려주는 기상천외하고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걱정 모르는 사람처럼 즐거워하기도 했다.
세춘한의원은 그렇게 유지되었다. 전쟁의 혼란한 와중에 돈을 벌고자 문을 열었던 것이 아니었기에, 병들어 아파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구료(求療)하고 외로움에 맞닥뜨려 쩔쩔매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어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인산은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한의원을 꾸려 갈 정도의 수입이 끊어지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동광동 세춘한의원에 가면 못 고칠 병이 없다네.”
“부처님같이 생긴 의사가 진맥도 하지 않고 몇 마디 말만 물어보고 약을 처방하는데, 몇 년씩 묵은 고질병이라도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다네.”
“약이라고 해봐야 집오리를 삶아 먹으라고 하든가 북어 국물을 어떻게 해서 먹으라고 가르쳐주시는데, 그게 그렇게 신통한 효험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나한테는 외상으로 약첩을 지어주셨는데, 병이 낫고도 아직 약값을 못 갖다 드렸네. 어떻게 형편이 피면 그것부터 갚아 드려야 할 텐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세춘한의원의 ‘신의(神醫)’에 대한 얘기가 널리 퍼져 나갔다. 때로는 부인네 같은 사람들이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인산을 찾아와 손금을 봐달라고 하는 적도 있었다. 환자를 치료하면서 그의 미래에 대한 얘기와 조심할 사항들을 일러주곤 했는데, 그것이 와전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