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52] 종교집단으로부터 교주 제안을 받지만…

국내 최초 죽염 발명가이자 한방 암의학 창시자인 인산 김일훈 선생(1909~1992)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인술(仁術)이 무엇이던가? 의자(醫者)로서 재물을 밝힌다면 어찌 인술을 베푼다고 자처하는 마음의 풍요를 누릴 수 있으리오?’

하루는 인산이 볼일을 보러 외출했다가 신도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길을 지나갈 때였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노인 한 분이 아무도 없는 길가에 혼자 서 있다가 인산을 보고서는 단걸음에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개 000인데 잠시 저희 집에 들러주시지요.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인산은 눈이 밝은 이인들이 가끔 자신의 존재를 미리 알고 기다리는 것을 여러 번 겪었기에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의아히 여기면서 달리 볼일이 없어 그 사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골목길을 지나 한참을 걸어가니 밖에서 보기에도 제법 웅장해 보이는 큰 집앞에 멈추었다. 대문으로 들어서니 넓고 정갈하게 꾸며진 마당이 나왔고 두 사람을 본 사람들이 이미 기다리고 있은 양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인산을 공손히 안으로 모신 노인은 이미 큰 상이 잘 차려진 방안에 들어섰다. 운룡은 시장하던 차에 음식이 가득한 상앞에서 노인이 이것 저것 권하자 기분 좋게 배불리 음식을 비웠다. 어느 덧 배불리 먹고 난 후 술을 권한 노인은 자세를 가다듬고 젊은 운룡에게 큰 절을 올렸다. 인산은 다소 뜻밖의 상황이 전개되는지라 어안이 벙벙하였지만 그래도 얼른 맞절을 하고 구체적인 사연이나 들어보자는 뜻에서 말을 던졌다.

“노인장은 생면부지인 젊은 저에게 이렇듯 은근히 대하시니 무슨 사연이 있으신 것 같은데…… 말씀해 보시지요.”

“저는 00교의 도유사(都有司) 김△△라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백 일 전에 저희가 모시던 태극상제(太極上帝) 성□□ 스승님께서 마지막 눈을 감으시면서 금일 oo 시간에 oo 장소에서 기다리면 묘향산 생불이 되신 분이 나타나실 것이니 새로운 태극상제로 모셔다가 교단(敎團)의 중흥을 도모하라고 유언하셨습니다. 스승님은 만약 그 분이 우리 교단의 교주로 모시게 된다면 우리 교가 크게 대성할 것이라고 신신당부하셔서 저는 그 때부터 오늘 이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노인은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리며 인산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말인즉슨 자기네 종교 집단의 새로운 교주로 임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인산은 늙은 아버지와 젊은 아내를 데리고 몸 담을 방 한 칸 없는 빈궁한 처지였지만 어이없어 하하 웃었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으오. 예로부터 성자(聖者)가 나타난 이후에 그로 말미암은 폐단이 얼마나 컸던가를 생각해 보시오. 석가모니 부처님이 났기 때문에 중들이 활개치고 다니며 혹세무민하는 경우라든가…… 예수님 팔아 가지고 자신이 재림한 구세주라고 떠드는 자들 또한 있지 않소? 그래서 나는 조용히 혼자 살며 지게꾼으로 늙어 죽으려는 것이오. 각자(覺者)란 한번 왔으면 조용히 있다가 가는 것이지…… 미개한 인간들 사이에서 무슨 말을 한들 손가락질밖에 받을 것이 더 있겠소? 그리고 그 종교라는 것이 또 얼마나 우스운 것인 줄 아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고 해서 그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참 진리가 무슨 소용이겠소? 나는 이 세상의 사람들을 살리려고 온 사람이지, 나를 위하여 교주라는 것이 되어 미개한 사람들을 이용하고 그들로부터 대우나 받으려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교주도 아니고, 어떤 단체를 이끌 인물도 아니오. 어쨌거나 잘 대접받았으니 고맙게 생각하지만 내가 있을 곳은 아닌 것 같으오. ”

노인은 너무나 아쉬운 마음을 술에 담아 권하며 이것저것 종단의 재산이며 딸린 신도들의 사회적 지위나 부, 명망같은 것을 속속 꼽아가며 인산을 눌러앉히고 싶어 간절한 마음으로 설득했지만 인산이 어떤 사람이던가. 한국을 통째로 넘겨준대도 관심없고 지구를 통째로 준들 관심 있겠는가.

스스로 지구 역사상 전무후무, 활인구세자로 여기는 존재이니 일개 종단의 재물이야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노인은 인산으로부터 종교나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몇 마디 배움의 말을 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끼 잘 대접받은 인산은 노인의 깍듯한 배웅을 받고 그 집을 떠나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인산은 그렇게 계룡산 자락에 자리한 백암동 서문달에서 1950(庚寅)년 3월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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