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49] 극심한 난치병들이 발호할 것을 염두에 두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1948.8.15, 중앙청)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지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인산의 신상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그 사이에 삼팔선을 넘어가 아버지 경삼 옹을 모셔왔고, 약혼녀 장영옥을 데려와 가정을 꾸린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인산은 그곳 계룡산 밑 불암리에 살며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해 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이었다. 그러는 틈틈이 인근 아동들에게 고전(古典)을 가르치는 일도 맡았다. 불암리에 있는 불암사에는 대한불교 법상종(法相宗)의 제2대 종정인 남궁규 대법사가 설립한 ‘계룡학원’이라는 사숙(私塾)이 있었다. 그 학원에서는 20여 명의 교사들이 인근 부락에서 모여든 1백여 명의 학생들에게 신학(新學)과 구학(舊學)을 함께 가르쳤다. 인산은 그곳에서 구학-사서(四書)와 효경(孝經)-을 맡아 가르쳤다.

그러나 예로부터 학동들에게 글[文]과 더불어 사회적 존재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덕목을 가르치는 데 교재로 사용되어 온 그 책의 내용들은 가르치는 그의 관점에서 볼 때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것들에 들어 있는 교훈들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따라야 하겠지만, 배우는 학생들의 지혜를 열어 무변광대한 우주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한 예로, 《논어》에는 공문십철(孔門十哲) 중의 한 사람으로 덕행이 뛰어난 공자의 수제자 염백우(廉伯牛)가 불치의 병에 걸려 문병을 간 공자가 그를 직접 대면할 수도 없어서 다만 창문 너머로 환자의 손을 잡아보는 데 족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렇게 된 것은 명이로다!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命矣夫 斯人也而有斯疾也 斯人也而有斯疾也)!’ 하고 한탄을 하는 대목이 있다. 이때의 ‘명’이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 해볼 수도 없고, 그 원리조차 파악할 수 없는 ‘운명’을 뜻하는 것이다. 공자는 그때 인간적인 제자 사랑의 모습은 보여주었으나, 제자의 병에는 속수무책인 한계를 드러낸 셈이었다.

또 공자가 가장 아끼던 제자 안연(顔淵)이 서른두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天喪予)!’라고 울부짖으며 통곡을 했다는 대목도 있다.

염백우가 앓았던 병은 나병(癩病)이었을 것이라는 주석이 붙어 있지만, 인산은 어렸을 적부터 나병 환자뿐만 아니라 세상에 보기 드문 별의별 희귀한 질병이라도 자신에게 치료를 요청하는 사람은 반드시 낫게 해주었던 자신이기에 공자의 탄식이나 통곡에서 그의 인간애[仁]는 볼 수 있을지언정 지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안연이 30대 초반에 죽은 것 역시도 단지 ‘그럴 운명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를 끔찍이도 아끼면서 그가 더 오랫동안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지 못한 것은 공자가 ‘소천지(小天地)’인 인간의 신체와 우주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례일 따름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 가운데 나이 30을 넘기지 못하고 생애를 마감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신체 구조의 결함으로 인하여 보다 긴 시간 동안 생명의 불꽃을 태우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개 얼굴에 나타나는 단명상(短命相)을 보더라도 몇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에 세상 경험이 많은 노인들은 타인의 얼굴에 나타난 단명의 징후를 읽어낼 수 있다.

아무튼 신체 구조의 결함은 질병을 야기하는 까닭이 되지만, 그 결함을 보완하여 더 이상 결함으로 남아 있지 않게 해주면 질병을 예방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생명 연장도 가능하게 된다. 질병의 치료 원리도 그와 매한가지이다. 이미 신체 내에 허(虛)함과 실(失)함, 과열(過熱)ㆍ과랭(過冷)ㆍ감염 등의 원인이 생겨 정상적인 균형이 깨지면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각종 질병이다.

그때 그 원인을 제거하는 행위가 ‘치료’이며, 그 원인을 없이 해주는 것이 ‘약’인 것이다. 그리고 우주가 영겁의 시간 동안 스스로 존재해 왔듯이, 인체는 어느 정도의 신체적 균형 손실은 스스로 보완할 수 있는 자구(自救)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한 자구 능력을 최대한으로 키워주는 역할도 ‘약’으로써 가능한데, 요는 우주ㆍ약ㆍ인체 간의 상관관계를 알고 그에 따른 적절한 대처[處方]를 하는 지혜를 지녔더라면 공자가 제자의 죽음을 두고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고 통곡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1948(戊子)년까지 불암리에 살던 인산은 1949(己丑)년에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백암동 서문달 산기슭의 양지바른 곳에 손수 초막을 얽어 지어 거소(居所)를 옮겼다. 그해 겨울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집으로 찾아오는 동네 아이들에게 《명심보감(明心寶鑑)》ㆍ《사략(史略)》ㆍ《통감(通鑑)》ㆍ《효경》 등을 가르쳤다.

그러는 중에도 인산은 향후 점점 더 극심한 난치병들이 발호할 것임을 염두에 두고 가슴을 찧었다.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새로운 문물들이 개화된 신문명이라는 미명하에 물밀 듯이 들이닥칠 게 확실했다. 그것은 석탄과 기름을 비롯하여 엄청난 화석 연료를 태워야 하는 문명일 것이며, 국토의 상당 부분을 뒤집어엎는 개발 문명이 될 터였다. 또한 늘어나게 되어 있는 인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 농토에는 화학비료가 다량 살포될 것이며, 공장에서는 물품 생산에 쓰인 맹독성 화공약품들이 마구 하천으로 흘러들 것이다.

사람들은 시커먼 기름 먼지가 섞인 공기를 호흡하고, 각종 독성 물질이 녹아 있는 물을 마시며 살게 될 것이다. 농약으로 범벅이 된 곡식과 과일ㆍ채소를 주식으로 하고, 체내에 독성 물질을 잔뜩 지닌 물고기를 먹게 될 것이다. 인체 내에 들어간 그러한 독성 물질들은 인체의 자연적인 균형과 면역 체계를 무너뜨리고, 변종 암세포들이 생기게 할 것이다. 또 뼈를 녹이고, 신경을 마비시키며, 혈관을 막히게 하고, 장부의 기능을 저하시키며, 피부를 썩게 할 것이다.

동의보감

그러나 제 아무리 《동의보감》 한 질을 통째로 달달 외고 약을 잘 쓰는 사람이라도 앞으로 생겨날 질병에는 대처할 방법이 없다. 인체의 내부를 샅샅이 뒤져보았다고 큰소리치는 양의학이나 실험실에서 화학적으로 개발되는 양약(洋藥)으로는 이미 그 당시에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질병이 허다한데, 하물며 신종 질병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인산에게 보이는 신약(神藥)의 세계를 하루 속히 세상에 알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신약들을 합성하여야만 가공할 괴질ㆍ난치병들에 대처할 수 있으련만, 세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덧없는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다시 인생을 입고 이 지구에 올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라는 인간은 산속에서 지게질이나 하며 그저 산사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어야 하는구나! 지혜로 치자면 만고(萬古)에 처음으로 온 사람이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하등 인간으로 처할 수밖에 없구나! 그래, 내게 신약의 세계를 열어놓을 능력은 있지만, 귀인 대우를 받을 능력은 없는 것이다.’

지나치게 큰 그릇은 쓸모가 없다(大器無用)고 하였는가? 과연 인간세상에서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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