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47] 죽음 앞둔 뇌염환자 고치니 되레 조롱이 쏟아져

1980년대까지만 해도 매년 수십명이 뇌염으로 숨졌다. 이 글의 배경이 된 1950년대 연간 수천명이 뇌염으로 목숨을 잃거나 정신이나 신체 불구를 후유증으로 앓곤 했다. 사진은 일본뇌염 매개체인 작은빨간집모기


인산 죽염으로 잘 알려진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은 각종 암치료 신약을 발명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독창적인 한방 암치료를 설파하며 난치병 환자를 평생 치료했다. 선생은 만성 질환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일이 없는 세상, 육신이 파괴되는 질병의 고통이 사라지는 세상, 암 환자 발생이 1%대로 낮춰지는 세상, 80대 노인들이 20대 청년들과 함께 일하며 낙원을 만드는 꿈. 이는 선생과 셋째 며느리로 인산 김일훈 문하에서 선생의 묘수, 비법을 전수받은 최은아 한의학박사의 바램이다. <아시아엔>은 최은아 박사가 쓴 <인산 김일훈 선생 전기 의황(醫皇)을 연재한다. 독자들의 애독과 건강 증진에 보탬 되길 바란다. <편집자>

인산이 뇌염에 걸려 속수무책으로 죽어 가던 아이를 단 한 시간 만에 살려냈다는 이야기는 이승만 대통령의 귀에도 들어갔다. “허허, 그 인산이라는 사람이 그런 신통한 의술을 지녔을 줄이야……. 가만 있자…… 그가 엊그제 나를 만나러 왔을 때 뇌염이나 뇌막염·독감 등의 예방 및 치료 대책을 수립하는 데 자신이 힘을 보탤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내가 귓전으로 흘려들었던 같군. 앞으로 우리 실정에 맞는 질병관리 사업을 추진하려면 아무래도 그 사람의 힘을 보태게 하는 게 옳을 것 같아.”

인산은 이 대통령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질병관리 사업을 통해 약화된 전통의학의 위상을 제고(提高)해 볼 생각에서 그런 건의를 했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 대통령은 보건부 약정국장을 불러서 물었다.

“국장, 지금 우리 정부가 자체적으로 질병관리 사업을 추진할 준비는 되어 있는가? 예를 들자면 한의학적으로도 질병관리에 필요한 요소들을 살려 가면 좋겠다 싶은 것이 내 생각인데…… 어떻겠는가?”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지금 현재 질병관리에 쓰이는 약품이나 재원(財源)이 모두 미국의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어서…… 자체적으로 질병관리 사업을 추진하기에는 제반 여건이 여의치 않은 편입니다.”

약정국장은 군정 당시에도 질병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미국인 고문에게 ‘한(漢)·양(洋) 합동 질병관리’ 시스템 구축을 건의했다가 “한의학도 의학이냐?”고 묵살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그대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 아무튼 그 인산이라는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 대국민 질병관리 정책에 대해 전반적인 상의를 해보도록 하게나.” 이 대통령은 약정국장에게 그렇게 지시했다. 당시의 우리나라 의료계는 양의학이 독주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으며, 한의학 내지 전통의학은 ‘비과학적’인 ‘경험방’ 정도로 취급되고 있었다. 양의학 쪽에서는 전문 의과대학에서 배출하는 의사들이 쏟아져 나왔으나, 한의학 쪽에는 이렇다 할 전문 교육기관도 없었거니와 개인적으로 진맥(診脈)과 약 처방을 배운 사람들이 한의원을 차려 진료에 종사하고 있었으니 환자들이나 일반인들이 옳게 평가해 줄 리 만무였다.

특히나 국가적 차원에서 국민보건을 담당하는 정책 입안자들은 미군정 당시부터 양의학 위주로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였고, 한의학에 대한 발전방안이나 사회적 필요성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인산은 자신이 지닌 신의학의 절대적 우월성을 널리 드러내 보이기 위한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우선 한의학이 올바로 자리매김을 하고, 정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제대로 대우를 받는 분위기가 갖춰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양의학에 대해서도 무조건 폄하(貶下)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고 서로의 미흡한 점을 서로 메워 가며 국민 건강이라는 대승적(大乘的) 목표를 이루고자 하였다. 어쩌면 자신의 ‘인간 질병을 고치는 능력’은 일개 ‘교육기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의한 것이고, 그것을 인간세상에서 제대로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는 지난(至難)한 어려움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건부 약정국장의 연락을 받고 약속된 시간에 보건부 청사에 발을 들여놓는 인산에게는 어떤 기대감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서 가야 할 길이 아니겠는가? 내 평생에 누구와 뜻을 맞춰 함께 갈 수 있단 말인가? 짧은 중생의 수명(壽命)을 입고 이 세상에 온 내가 그 어간에 어찌 누만(累萬)년 동안 인간에게 감추어졌던 신의학의 완성을 꿈꾸리오? 나는 다만 새로운 하늘을 여는 자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다. 하지만 내 사후(死後) 1백년이 지나기 전에 내가 세운 신의학의 기틀이 세계 만민이 두루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질병 극복의 묘법으로 서게 되리라. 나의 성취는 곧 인류의 성취이니, 당장의 모래 알갱이만도 못한 성과에 급급할 이유가 없다.’

인산은 스스로를 달래듯 마음을 다잡으며 약정국장실에 들어섰다. 국가질병관리위원회의 당연직 위원장은 약정국장이었고, 위원들은 하나같이 양의학을 공부한 의사나 대학교수들이었다. 그리고 그 위원회에는 수석 고문을 비롯한 서너 명의 미국인 고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인산은 위원 자격도 없이 대통령의 특별 지시에 따라 그 자리에 참석한 ‘국외자’인 셈이었다. 다분히 그날의 위원회에서는 인산에 대한 문답 형식으로 회의를 전개해 나가기로 되어 있는 듯, 간단한 수인사가 오고간 뒤에 곧바로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산은 자기를 ‘우리나라 한의학의 권위자이며 명의’라고 소개하는 약정국장의 말이 영 못마땅했지만, 모르는 사람이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고 토를 달지 않았다.

“얼마 전에 선생께서는 침술로써 상태 호전의 가능성이 희박한 뇌염환자를 치료하셨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모대학 의과대 교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다소 무례한 태도로 그렇게 물었다.

“그렇소. 귀하가 들은 그대로가 사실이오.” 인산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선생께서는 지금까지 그런 방식으로 뇌염환자들을 치료해 오셨습니까? 그렇게 했을 때 완치율은 대략 어느 정도라고 말씀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이번에는 또 다른 교수가 말투는 공손했지만 그 결과는 보나마나일 것이라는 예단이 역력히 묻어 있는 표정으로 물었다. 인산의 가슴속에는 이미 뜨거운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여기에 계속 앉아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왕 온 김에 할 말은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만은 참아 눌렀다.

“완치율이라고요? 거기에 ‘율’이 어디 있겠소? 하기야 1백 퍼센트도 율은 율이니까…….” 인산의 대답을 듣고 좌중의 위원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아니, 신이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1백 퍼센트 완치율을 내세울 수가 있습니까? 질문을 잘못 들으신 것은 아닙니까?” 완치율을 물었던 교수가 다시 물었다.

“잘못 듣기는…… 귀가 멀쩡한데……. 숨이 끊어지지 않은 환자는 1백 퍼센트 치료하였고, 숨이 끊어진 지 30분 이내의 환자는 열에 아홉은 살려냈소.” 그 수많은 환자들을 치료할 때의 정경이 주마등처럼 인산의 뇌리를 스쳐갔다. 제발 자기 아이를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부모가 있었고, 이미 구슬프게 곡성(哭聲)을 토하는 부모도 있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거적을 들추어 환자의 머리에 침을 꽂고 사혈을 하노라면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아이가 일어나듯 대개는 그렇게 소생하여 저희들 부모의 품에 다시 안기게 되는 것이었다.

“지금 한국에는 해마다 수만명의 어린이가 뇌염에 걸려 불구자가 되거나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대로의 완치율이라면 걱정할 게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뇌염의 치료약으로는 어떤 것을 추천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수석 고문이라는 미국인이 유창한 한국말로 물었다. 매우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천마탕(天麻湯) 세 첩이면 뇌염은 거든히 잡을 수 있소. 거기에다 침과 뜸을 겸하면 더욱 확실한 효과를 얻을 수 있지요.” “천마탕이라고요? 그게 어떤 약인가요?” “천마라는 식물을 위주로 해서 짓는 약이오.”

인산이 거기까지 대답했을 때, 맨 처음 질문을 던졌던 교수가 노골적인 조소를 감추지도 않은 채 끼어들었다. “정말로 선생께서는 뇌염환자들을 완치시키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몇 명의 뇌염환자들을 치료하셨다고 말씀하실 수 있나요?”

“이미 죽었다고 장사 지내려던 아이를 살려낸 것만 해도 수백명은 족히 될 게요.” 인산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 천마탕이라는 첩약으로 말입니까?” 재차 묻는 교수라는 사람의 입가에는 자기가 인산을 얼마든지 비웃어도 괜찮은 근거를 잡은 듯한 묘한 웃음기가 감돌았다.

“일본 놈들에게 쫓겨 다니던 사람이 웬 첩약을 지니고 다닐 수 있었겠소? 그때는 그저 동침 한 가지로 환자들을 살려낸 거요.” 최소한의 체면은 지켜주고 싶었다. 강단에서 젊은 학생들에게 인술(仁術)이랍시고 가르치며 국민 전체의 건강을 챙기는 위원회에 위원으로 활동하는 작자이니, 기본 양식을 갖추고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갈수록 태산이라는 말은 그의 형편없는 언행을 두고도 적용시킬 수 있는 말 같았다.

“동침이라고요? 그 가느다란 쇠바늘 말인가요? 이보시오, 선생!” 그 교수라는 자는 마침내 근질거리던 입을 가벼이 놀리기 시작했다. “그 쇠바늘로 사람의 여기저기를 찔러 대고 피부에 불붙은 쑥을 올려놓아 태우는 일…… 그리고 정제되지 않은 생나무 껍질과 풀뿌리, 열매 따위를 달인 물을 약이라고 복용시키는 일 또한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알기나 하십니까? 필경 멀쩡하던 생사람이라도 죽게 만들고 말 그런 무지몽매한 행위에 ‘의술’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입니다. 지금 이 자리는 사사로운 자리가 아니라 국가 대사를 의논하는 자리라는 것을 명심하시고, 시정잡배들을 현혹하던 그런 말을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도 마십시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인산의 두 눈에서는 노기로 가득 찬 불꽃이 일었다. “무엇이라고? 시정잡배들을 현혹하던 말이라고? 이런 날불한당 같은 자를 보았나! 그럼 뭐가 의술이더냐?” 인산의 입에서 태산이라도 흔들 만큼 거센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긴 세월 동안 억눌렸던 분노가 그때 비로소 출구를 찾아 분출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너희들이 꼭 살려낼 자신도 없으면서 환자의 배를 가르고 신체 장기에 손을 대는 것만이 의술이란 말이냐? 그게 과학이고 문명이라서……? 천하에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이란 바로 너 같은 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들이 메스를 들고 칼춤을 출 때, 우주의 축소판인 인체조직이 얼마나 심각한 파괴를 당하는지 알기나 하느냐? 이 인간 백정 같은 놈들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말을 듣거라. 너희가 볼 수 있는 것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어디 그 잘난 입으로 대답해 보아라. 쇠바늘로 찔러댄다고? 천하에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너 같은 놈이 먹고 사는 걸 보니, 세상에 쌀이 참 천하구나. 네 놈이 쇳덩어리 머리통을 쥐어짜 교수랍시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게 무엇이더냐? 장님이 더듬거리는 방법이 고작이지 않더냐? 네 놈이 내가 누구인 줄 어찌 알겠느냐만 나는 너 같은 놈들의 머리통 속에 들어찬 거짓말들을 모조리 바꿔놓으려고 온 사람이다. 에잇, 한심한 놈들……!”

인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일제 강점기 동안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산중의 도피생활로 점철했던 인산이지만,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사회적 몰이해와 제 밥그릇 챙기기에 밀려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펼쳐 보일 수 없는 현실이 한스러웠다. 국가질병관리위원회의 위원들은 필시 인산을 한의학계의 대표자쯤으로 치부하고, 아예 한의학이라는 것은 제도권 내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기에게 의도적으로 모멸감을 준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에게 아쉬울 게 무엇이더냐? 어차피 대세라는 것에 영합할 뜻이 없었을진대, 나는 나대로 나의 길을 갈 수밖에…….’ 허허로운 마음으로 보건부 청사를 나서서 계룡산 불암리의 불암사(佛菴寺) 근처에 자리 잡고 있던 거처로 발길을 떼어놓는 인산의 가슴속에는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던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느낌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짙게 고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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