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43] 마침내 조국 광복의 날이

광복의 기쁨을 나누는 조선 백성들

운룡은 소년시절에서부터 자주 찾아가곤 하였던 의주 천마산 영덕사를 새로운 은신처로 삼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그곳은 깊음에 있어서 묘향산만 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가족들과 더불어 살던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무렵 그와 새로 연결된 모종의 항일 비밀결사의 일을 도모하기에도 편리한 지리적 장점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일제의 패망이 멀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있기에 오랫동안 자신의 흔적과 냄새가 밴 묘향산에서 몸을 빼 천려일실(千慮一失)의 우(愚)를 미연에 방지하자는 뜻도 있었다.

“머지않아 해방이 될 것이지만, 산 너머 산이라고 이곳을 비롯한 한반도의 북쪽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접 받으며 살 수 없는 압제의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와 형님들께서는 해방을 맞으면 지체하지 마시고 가솔들을 이끌고 경성(京城, 서울)이나 그 이남으로 이주하시어 새로운 터전을 잡으시기 바랍니다.”

운룡은 오랜만에 집에 들러 아버지와 두 형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번에 영덕사로 가는 길에 집에 들러 특별히 해방 후 닥쳐올 세상의 변화에 미리 대처할 것을 가족들에게 알린 것이었다. 그러나 형들은 조상 대대로 이어온 삶의 터전과 선영을 두고 타지로 떠날 수는 없노라고 잘라 말했고, 아버지 경삼 씨만 할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해서 ‘해방이 되면 그때 가서 보자.’는 말로 잠정적인 동의를 했다.

운룡은 경찰의 시선이 닿을 것을 염려하여 가족들 곁에서는 단 하룻밤도 묵지 못한 채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날이 밝았다. 아침 이슬이 촉촉이 내린 산상의 절집 마당가에서는 먹을 것을 찾아 나온 까마귀들이 이리저리 부산을 떨면서 이따금 탁한 목청을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바야흐로 뜨거운 태양열이 순식간에 이슬 기운을 거두어 가고, 절집 지붕 위를 달구며 내리쬘 것이었다.

운룡이 다시 의주군 천마산의 영덕사로 옮겨온 지도 어느덧 1년 가까운 시간이 흘러갔다. 운룡은 그곳 영덕사에 딸린 작은 암자에 은거하며 하루하루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광복의 때가 무르익었음을 직감한 터였기 때문이었다.

‘놈들의 광분(狂奔)이 잠시간 주춤했으면 좋으련만…….’

‘까악 깍, 클락클락 까아악 깍…….’

갑자기 까마귀들의 우짖는 소리가 유별났다. 반가운 사람이 방문하고 있다고 소리쳐 알리려고 깍깍대는 것이었다. 표고 1천3백여 미터에 달하는 높고 깊은 심산의 여름은 고산지대라서 그다지 후덥지근하지 않았다.

‘누구기에 까마귀가 저리도 반가이 알려주는 것일까?’

운룡이 궁금하여 산 속 암자 방문을 나서자 얼마 안 가 낯 익은 한 남자가 땀에 범벅이 되어 오솔길로 들어섰다. 운룡과 형님 아우하는 사이의 유운승(劉雲昇) 통사(통역관)였다. 당시 그는 천마동에서 벌 1백여통을 치는 양봉업자였다. 유통사는 운룡을 보자 한달음에 달려와 땀이 줄줄 흐르는 벌건 얼굴로 숨을 헐떡이며 운룡의 손을 덥썩 잡고 “아우님!”이라고 간신히 한 마디 내뱉은 후 감격에 겨워 할말을 못 잇고 있었다.

“아우님, 이제 살았소. 드디어 해방이 되었단 말이오. 오늘 새벽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대요.”

그토록 갈구하던 광복의 날이 온 것인가! 이제 광복된 조국은 나의 말을 듣고 불행한 역사에서 벗어날 것인가.

운룡은 암자 안으로 들어가 남들이 본다면 보잘 것 없을 자신의 짐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가 지닌 짐으로 치자면 그가 인류의 난치병, 특히 무서운 공해와 화공약독으로 생겨날 신종 난치병들을 구제할 신의(神醫)라는 사실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산에서 뜯어말린 약초 몇 가지와 침통(鍼筒) 한 개가 전부였다. 운룡은 그것만을 가지고도 이미 수천수만 명의 환자들을 낫게 하였다. 그 환자들 중에는 운룡이 아니었으면 더 이상 이 세상의 삶을 이어갈 수 없었던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운룡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 세상에 널려 있는 것이 약이었기 때문에 그 약들을 옆에 두고도 죽어가는 어리석은 대중에게 약의 존재를 알려주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어떤 약이 어떤 증세에 얼마큼의 효능을 발휘하는지 그것만 알고 적용하면 그만이었다. 기존의 의서라고 일컬어지는 것들 안에 적혀 있는 내용만 가지고는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는 인간의 질병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운룡은 잘 알고 있었다.

병과 약의 근본을 전혀 모르고서 막연한 추측과 우연한 경험에 의해 저술된 그 책들이 과연 어디까지 인간의 질병을 낫게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해부학이라는 것을 통하여 인체의 구조를 파악했다 하여서 인체를 마구 째고 인체의 장기를 도려내고 떼어내고 하는 서양 의학을 과연 사람을 살려내는 의학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서양을 통해 들어온 약이라는 것도 그렇다.

화공학적으로 합성하여 제조해 낸 그것들은 순전히 또 다른 양태(樣態)의 독(毒)이 될 뿐이다. 서양 의학의 수술이나 약 처방은 모두 너무나 미개하여 의사들은 눈뜬 장님이고 의술이란 어린애 장난 수준밖에 안 되는 것이었다. 한 가지의 증상을 완화시키기 위해 열 가지의 질병을 인체 안에 키워놓는 것과 마찬가지의 악술(惡術)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운룡이 펼쳐 보이는 의술은 명쾌하고 혁신적이었다. 기존에 약이라고 여겨지던 것들 대신 전혀 새롭고도 평범한 것들로써 소경의 눈을 뜨게 하였고, 간질 발작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 짓무르던 나병 환자의 피부가 그의 처방에 따라 매끈해졌고, 폐병으로 한 대접씩 피를 토하던 환자가 멀쩡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운룡은 병을 낫게 할 뿐 아니라 그 병을 낫게 하는 약의 약성 원리와 근거, 그 제조 방법까지 소상히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누구라도 그 방법을 익혀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그의 생각 속에는 자기 자신 혼자서 접할 수 있는 환자의 수에는 물리적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류라는 거대한 집단의 질병을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신의술(神醫術)의 요체를 기하급수적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사람들이 기존의 경험과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적’들을 양산해 내면서 그 각각의 현상들 뒤에 숨겨진 보편적인 원리를 설명하고 보여주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손바닥만 한 동리도 아니었고 단순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생각과 의술을 널리 전파할 특별한 수단도 없었다. 거기에다 그는 지금껏 도피 중인 탈옥수의 입장이었다. 그가 접하고 치료한 환자들에게는 이미 무엇보다 소중한 광명의 빛을 주었지만, 그것은 망망대해에서 들어 올린 작은 횃불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가 가는 길을 막는 것은 고산준령의 높다란 석벽만이 아닐 것이다. 그 시대가 형성하고 있는 제도권 의료계의 무시와 백안시ㆍ질시 등이 있을 것이고, 치료의 대상인 일반 환자들의 몰이해와 의심도 있을 것이다. 운룡은 그 모든 현실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그에 따른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묵묵히 짐 보따리를 챙겼다.

‘이제 내 평생에 이곳에 다시 오기는 어려워질 터이다.’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해가 등줄기에 내리쬐어 베적삼이 땀으로 흠씬 젖었다. 복중(伏中) 더위가 산 위에까지도 그 기세를 떨치고 있음이었다.

운룡은 물에 불려놓았던 곡식 한 줌으로 끼니를 때우고 즉시 하산하였다. 의주에서 친구 네 명과 함께 못된 일본인 열댓 명을 흠씬 두들겨 패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도망간 이래 멀리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전전하였고 백두산ㆍ낭림산ㆍ묘향산 속에 칩거하며 보낸 세월이 22년이었다. 그 사이 춘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탈주에 성공하여 다시 산 생활을 이어온 것이 그날로써 종지부를 찍게 된다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일제가 조선 땅을 강제로 병합하기 한 해 전에 태어나 시간이라는 도도한 물결에 떠밀려 흘려보낸 37년이라는 세월이 실로 무상하였다. 이 지구 역사상 전에도 없었고 이후로도 다시 없을 위대한 자신의 존재가 세상의 덫에 걸려 속절없이 허송한 세월이 37년이었다.

‘숲속의 제왕인 범도 올가미에 걸리면 힘을 쓰지 못하듯이, 천지의 정기를 받아 종기(鐘氣)한 나도 시간이라는 굴레 속에서는 어쩔 수 없구나!’

뼈저린 자각이 운룡의 가슴을 쳤다. 하지만 마냥 감상에 젖어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단 하루, 아니 단 한 시간이라도 속히 인환(人?)의 거리에 나서서 질병 구제의 본분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의주 천마산 영덕사에서 하산하여 산 아래 마을에 당도하자 ‘해방’의 소식이 곳곳에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날 정오에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는 것이었다. 막상 그 말을 듣는 순간 운룡은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우러렀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병적(兵籍)에도 올라가 있지 않은 독립군으로서 산야를 누비며 전투를 했던 일과 체포당하여 고문을 받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자신은 자신대로 ‘독립운동’이라는 하나의 당위적 부채감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자각했다.

‘이제 비로소 온전한 나의 길을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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