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44] 해방과 몽양 여운형···”이젠 ‘질병과의 투쟁’이다”
하산한 운룡은 산도적떼처럼 제멋대로 자란 머리털과 수염을 깎으러 이발소에 들렀다. 이발사가 운룡의 이발을 하다가 주저주저하더니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공손히 청했다.
“선생님, 눈 좀 감아주시지요.”
운룡이 “왜 그러시오” 하니 운룡의 두 눈빛이 너무 강렬하여 거울에 반사되어 되튕겨나온 빛이 눈부시게 번쩍여 이발사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 이발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21년 세월을 깊은 산속 험하게 굴린 몸뚱아리라서 많이 망가졌겠지만 그래도 아직 형형한 눈빛이 다 사그러든 것은 아닌 것이었다.
이발 후 바로 충재 김두운 선생댁을 예방한 뒤 8월 16일 밤 경성(서울)행 열차에 몸을 실었고 이튿날 오전 서울에 도착하였다. 열차에서 알게 된 이로 경성에 이르기까지 운룡의 말벗이 된 사람은 창성군에 산다는 강씨였다.
‘이제 광복을 맞이한 조국에서는 나의 뜻과 지혜를 마음껏 펼칠 수 있으리라. 치료법을 모르기 때문에 무고하게 죽어가는 수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에 하루 속히 착수해야 한다.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만이 이 세상의 절대 진리인 것으로 믿으며 사는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그 생명만큼은 더없이 소중한 것이니 누구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애초에 만유(萬有)를 존재하게 하고 그 만유를 통해서 만유가 존속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 우주의 기본 원리이다. 서로가 서로를 보충하고 지지(支持)하는 데에서 세상 화합의 순리(順理)가 완성되는 것이다.
내가 세상에 전할 새로운 의학도 바로 그러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인체 내에 완성되어지고 지속되어야 할 균형이 무너짐으로써 나타나는 것이 곧 질병이며, 그 무너진 균형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신약(神藥)이다. 세상 사람들이 아직 모르고 있는 신약들을 밝혀 알리는 것 또한 나의 사명이다. 백두산 천지의 감로정과 한반도 상공에 충만한 산삼 분자가 말해 주듯이, 내가 신약의 보고인 한반도에서 태어난 것도 그 까닭이 있는 것이다. 내게도 수명이라는 한계가 있으니, 짧은 생애 동안 신의학의 기틀만이라도 반드시 세워놓아야 한다.’
운룡은 해방의 감격이 물결치는 한반도를 종(縱)으로 내달리는 열차 안에서 그런 각오들을 가슴에 새겼다. 어렸을 적부터 다져온 해묵은 생각들이었지만, 해방이라는 계기를 맞아 되새기는 가운데 그 각오는 금강석보다도 단단히 영글어 가는 것이었다. 어느덧 열차는 먼 길을 달려오느라 숨이 턱에 찬 듯 거센 입김을 뿜으며 경성역 플랫폼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김형은 경성에 어디 머물 데가 있으시오?”
강씨는 운룡에게 특별히 찾아갈 목적지가 있는지를 물어 왔다. 안면 있는 동지가 몇 명 정도 떠올랐으나 마땅히 갈 데는 없었다. 운룡은 평생 바람이었고 구름이었다. 운룡의 존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밥이야 술이야 칙사 대접받고 알아주는 이 없으면 그저 하늘이 지붕이고 땅이 이불인 고단한 삶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일제에 대한 무력 투쟁의 길을 택했던 독립운동가들 가운데에는 후세에 그 존재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스러져간 인물들의 수효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거기에 구한말 일제의 강제 합병에 항거하여 들고일어났던 의병대와 3.1운동 당시까지 활동한 사람들 중에는 이렇다 하게 구분지어 말할 대상이 없었는데, 상해에 임시정부가 생긴 이후로는 독립운동가 중에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 짓는 슬픈 현실이 비롯되었다.
임정파가 어떻고, 만주파가 어떻고 하는 그들 스스로의 구별에서부터, 실제로는 손 하나 까딱 않는 사람들이 입으로만 조국과 민족, 그리고 광복을 들먹이며 우국지사연하는 일까지……. 알고 나면 구역질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민족정기 회복과 조국 광복이라는 대의명분의 뒤안길에도 인간의 하찮은 공명심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웃지도 못할 희극이라면 희극이라고 할 것이다.
나중의 일이기는 하지만 우리 민족이 마침내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건설하게 되자 일제에 항거하여 몸 바쳐 싸운 경력을 하나의 장식물처럼 자기 일신상에 걸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도 해방과 더불어 재빨리 가면을 뒤집어쓰고 “독립운동을 했었네” 하면서 행세를 한 경우가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운룡에게 독립운동이란 뼈조차 묻어주지 못한 동지에 대한 피눈물 나는 회한뿐이었다.자신이 모화산 부대원으로 활동했던 사실이나 충재 선생과 더불어 조선총독부를 치려 했던 일 등을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이제 자신은 일제가 아닌 질병과의 투쟁을 위해 남은 삶을 바쳐야 한다는 일념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운룡이 정해둔 거처가 없다는 말을 듣자 강씨가 선선히 자기와 동행하기를 청하였다.
“거 잘됐소, 나는 지금 몽양 여운형 선생 댁을 찾아가려는 참이오. 이미 그곳에는 여러 지사들이 모여 해방된 조국의 앞날을 위한 설계에 몰두하고 있을 거요. 몽양 선생과 나와는 막역한 사이라오.”
강씨는 사람 좋은 웃음기를 얼굴 가득 띤 채 운룡을 잡아끌었다. 운룡은 그동안 두세 차례 연락 임무를 띠고 동지들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몽양 선생 댁을 찾아갔던 적이 있어 몽양과는 구면이었다. 그러나 지을룡이란 가명만 사용했기 때문에 몽양 선생은 운룡을 기억한다 하더라도 만주에서 내려온 ‘지을룡’ 대원으로만 알고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이 도착하자 몽양 선생이 반가이 맞았다. 그러자 흘끗 시계를 쳐다보던 몽양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다.
“동지의 본명이 혹 김운룡이 아니오?”
운룡은 몽양이 대뜸 자신의 본명을 대었기 때문에 약간 의아했다.
“예, 그렇습니다만……”
몽양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랍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운룡을 다시 쳐다보며 두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오, 그대가 바로 김운룡 동지였구려. 이렇게 신기할 데가 있다니……. 설마 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김 동지가 오셨구려. 지금 방송운 선생께서 그대를 눈이 빠지라 기다리고 계신다오.”
몽양은 어리둥절한 운룡과 강씨와 좌중을 향하여 자신이 신기하다고 놀란 사연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송운 방주혁 선생은 당대 명의로 이름이 드높았다. 구한말에 전의원(典醫院) 참의(參議)로서 흥선 대원군의 주치의 역할을 맡기도 한 분이었는데, 대원군이 그분을 어찌나 잘 보았는지, 충청남도 금산에 만석 거리 농토를 하사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가 맥을 짚어 여인의 태중에 든 아기가 사내아이인지 계집아이인지 예견하여 빗나간 적이 없었고, 자신의 의술로 고칠 수 없는 환자일 경우 그 죽음의 시점을 정확히 알아냈다고도 했다. 그래서 궁궐 내의 상궁들이 ‘방주혁 영감(令監)’의 말이라면 전폭적으로 지지했으며, 황후 윤비마저도 물어볼 것이 있으면 방주혁 선생을 들라 하지 못하고 직접 그에게 행차하여 물을 정도로 권위가 막강하였다고도 했다. 그분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지극하여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이후로는 그 많은 전답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등 물심으로 독립운동 세력들을 도왔다.
“송운선생이 저 김운룡 동지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린 데에는 내가 지금 생각하기에도 신비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 있었소. 송운 선생께는 당신께서 이 세상 누구보다도 존경하여 모시던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나도 만나 뵌 일이 있지만, 그 식견이 드높고 세상 보는 안목이 가히 신과 통할 정도였었소. 일찍이 이 세상의 벼슬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오직 인간의 참된 도리를 밝혀 평화로운 세상을 구축하는 길을 찾는 데 온 정열을 바친 분으로서, 세간에서는 그분을 일러 그저 ‘방 도인’이라고만 하였소. 그런데 그분은 애석하게도 수년 전에 세상을 뜨시고 말았소. 지금에 와서 보면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는 일인데, 그분은 살아생전에 을유(乙酉, 1945년) 7월(음력을 말함, 그해 8월 15일은 음력으로 7월 8일이었음)에 우리나라가 해방될 것임을 수차례 예언하시기도 하였소. 아무튼 그토록 존경하는 가형(家兄)을 임종하는 자리에서 송운 선생이 해방 이후의 나랏일에 대해서 여쭈었더니, ‘처음에는 갈팡질팡하겠지만 해방 후 20년이 지난 뒤부터는 괜찮아질 것’이라고 대답하셨다오. 그래서 송운 선생이 다시 ‘형님이 가신 뒤에 형님을 대신할 만한 지혜를 저희가 다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목숨불이 꺼져 가는 그 와중에도 목소리를 높여 ‘모르는 소리……. 나를 능가하는 지혜들이 속속 나타날 것’이라고 한 뒤에 ‘특히 광복이 되는 날로부터 이틀째 되는 날 모시에 묘향산에 머물던 김운룡이라는 사람이 몽양의 집으로 올 터이니 그를 잘 맞아들여 앞날을 함께 의논하라.’고 말씀했다는 거요. 누가 궁금하여 김운룡이 어떤 인물이냐고 묻자 복잡하게 설명할 거 없이 그저《삼국지》의 제갈공명같은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지 않소. 거 참 신기한 일 아니오? 방 도인께서는 저 김운룡 동지를 만난 일도 없을 터인데, 그 이름자를 어찌 아실 수 있었는지…… 김 동지가 내 집에 오는 시각까지 미리 점찍어 말씀하셨다니……. 그리고 실제로 오늘 오후, 방금 전에 김 동지가 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소? 송운 선생이 몇 차례나 두고두고 부탁하시길래 염두에 두고는 있었지만, 오늘 이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줄은…….”
몽양이 거기까지의 얘기를 마치자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들 침을 꿀꺽 삼키며 마치 홍길동이 도술을 부리는 장면의 얘기를 듣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운룡은 그 얘기가 조금도 신기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다만 ‘아, 나의 있음이 하늘에 반사되어 그분의 영경(靈鏡)에 비친 게로구나.’ 하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튿날 새벽, 몽양의 전화연락을 받고 송운 방주혁 선생이 몽양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마와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히고 눈매에 세월이 주는 온갖 지혜를 오롯이 담고 있는 듯한 모습의 송운 선생은 운룡을 소개받자 백년지기를 만나기라도 한 듯 감격에 떠는 손길로 운룡의 손을 움켜잡았다. 그 뒤 자신의 승용차에 동승시켜 운현궁 곁에 있는 그의 집으로 데려갔다.
운룡은 그날부터 임정요인들이 모두 귀국할 때까지 송운 선생 댁에 머물면서 당시 국내 거물급 인사들과 두루 교우하게 되었다. 대부분 조국의 광복을 위해 싸웠고 장차 새로운 나라 건설의 주역이 될 중심인물들이었다.
송진우(宋鎭禹)ㆍ김성수(金性洙)ㆍ김범부(金凡父)ㆍ정인보(鄭寅普)ㆍ장덕수(張德秀)ㆍ김준연(金俊淵)ㆍ조병옥(趙炳玉)ㆍ장택상(張澤相)ㆍ이명룡(李明龍)ㆍ김병로(金炳魯) 선생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인사차 방송운 선생 댁에 왔다가 운룡과 만났고, 그때그때마다 새 조국 건설이라는 대역사에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담아내는 게 합당할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였다. 승려로서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는 백성욱(白性郁) 선생도 송운 선생과의 친분 관계로 자주 출입하다가 운룡과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백성욱 선생 역시 방 도인이 임종 시에 손꼽았던 지혜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운룡과 시국을 논하고 철리(哲理)를 주고받는 사이에 운룡을 깊이 신뢰하였다.
해방의 여명은 운룡에게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으나, 운룡이 지니고 있는 일생지망구세(一生之望救世, 평생토록 바라는 소원은 세상의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구제하는 것임)의 뜻을 펴기에는 아직 때가 아니었다. 그 무렵 운룡은 이름을 ‘일훈(一勳)’이라고 스스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