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50년 가위손”

18세기경까지 유럽에선 이발사가 외과 의사를 겸했다고 한다. 당시엔 사람들이 병에 걸리면 이발소에 가서 수술을 받거나 치료를 받았다. 사회 구조가 복잡해지고 의학이 발달하면서 이발소와 병원이 분리돼 1804년 프랑스인 장 바버가 최초의 이발사가 되면서 이발소와 병원이 독립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이발사가 영어로 ‘바버(Barber)’인지도 모르겠다.

이발소 입구마다 설치된 청·홍·백의 둥근 기둥은 이발소를 표시하는 세계 공통 기호인데 파랑은 ‘정맥’, 빨강은 ‘동맥’, 흰색은 ‘붕대’를 나타낸다.

1540년 프랑스의 메야나킬이란 이발사가 둥근 막대기에 파란색·빨간색·흰색을 칠해 이발소 정문 앞에 내걸어 사람들이 쉽게 찾아볼 수 있도록 하자 이발소들이 모두 따라 하며 세계 공통의 이발소 표시가 됐다고 한다.

대전시 중구 은행동 골목길의 허름한 조운이발소

4평 공간에 쌓인 50년 내공

대전이 고향인 정동진 할아버지(76)는 50여 년간 가위질(?)을 하며 사셨다.
17세에?처음으로 이발 기술을 익힌 뒤 26세에 지금의 ‘조운이발소’를 개업해 50년째 이어오고 있다. 기자가 물어물어 찾아간 4평 남짓한 이발소에서는 마침 한 손님이 이발하고 있었다.

서서 일하는 직업 덕에 건강을 유지한 것 같다는 정동진 대표(왼쪽). 거울 위로 표창장이 눈에 띈다.

“그땐 이용학원이 없어서 이발소에 들어가서 기술을 배웠지. 처음에는 청소하고 수건 빨고 면도하면서 틈틈이 기술을 배우는데 3년이 돼야 비로소 가위를 맡겼어.”

나이에 비해 정정하신 정동진 할아버지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3년 안에 힘들다고 관두는 사람도 많았어. 3년이 돼야 ‘정말로 이발을 배울 놈이구나’ 싶은지 그때야 비로소 손님들 머리를 깎게 했지.”

– 가장 좋았던 기억은?

“내가 90년부터 12년간 이발 봉사활동 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네. 주로 수급자나 임대주택 거주 할아버지와할머니들을 대상으로 경로당에서 이발 봉사를 했지. 경로당에 갈 때마다 2~3만 원어치씩 요구르트나 수박 등을 사가곤 했어. 다들 좋아하셨지. 1993년 어버이날에 염홍철 대전시장으로부터 표창도 받았어.”

“그땐 이발학원 수강생들도 실습을 나오곤 했는데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걔들한테) 한 번 깎아보시더니 내게만 머리를 맡기려 하시는 거야, 하하. 그분들도 이젠 (세상) 다 떠나고 없지···.”

4평 남짓 이발소 곳곳에 세월이 쌓여있다.

– 가장 힘든 점이 있었다면?

“몸이 아파도 쉬는 날을 제외하곤 나와야 하는 거야. 나를 보고 온 손님들인데 헛걸음하게 할 순 없잖아. 그리고 명절 대목 때도 너무 바빠서 힘들었지.”

– 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나?

“내가 이발을 배우고 서울에서 잠시 일을 하다 23세에 입대했는데 제대하고 26세에 지금의 이발소를 열고 결혼했어. 2남 2녀를 뒀는데 할멈은 40년 전에 떠났어···.”

– 그 뒤로 줄곧 혼자 생활했나?

“죽 혼자 살다가 큰 아들과 합친 게 한 4년 됐어. 너무 늙어 병들고 추해지면 애들이 싫어할 것 같아서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합친 거지.”

아가씨도 이발소 단골이라고?

– 가게 앞에 술집들이 많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술집 많았지. 거기 여자들이 돈을 잘 썼어. 한번은 얼굴에 솜털을 면도하면 화장이 잘 받는다고 했더니 그 뒤론 그 여자들이 계속 몰려와서 단골이 되기도 했었어. 그때가 좋았지.”

– 처음 이발 요금은 얼마였나?

“내가 17세 수습 시절 이발 요금이 30원이었을 거야. 지금은 8000원인데 그래도 다른 곳보단 싼 편이야.”

– 면도 요금은 6000원이라고 돼 있는데 면도만 하는 손님도 있나?

“예전에 술집 많을 때 남자들이 하룻밤 술 마시고 아침이 되면 와서 면도하고 머리 감고 출근하고 그랬어. 요즘이야 찜질방이 있어서 거기서 다 해결하지만 그땐 그런 거 없었잖아.”

– 수입은 어땠나. 돈은 많이 벌었나?

“이걸로 무슨 돈을 많이 벌겠어. 그냥 애들 교육시키고 남들한테 빚 안지고 그렇게 살았지. 장발 단속 있을 때는 그래도 수입이 괜찮았는데 그거 없어지고 나서 손님도 줄었어. 게다가 재개발 때문에 주민들이 많이 빠져나가 손님은 하루에 한두 명 될라나.”

– 이발소가 옛날과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엔 의자 세 개에 직원(이발사, 면도사)도 둘이 있었지. 지금은 의자 하나 빠지고 나 혼자야.”

칼을 다루는 직업이라 근무 중에는 절대 음주하지 않는다는 정동진 대표


음주 면도, 절대 안돼!!

–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쉬는 날(목요일) 운동으로 등산 조금하고 매일 아침 조금씩. 술은 소주 반병 정도 마시는데 일할 땐 절대 안 마시지. 음주 면도하면 안 되잖아(웃음).”

– 본인 이발은 어떻게 하는가?

“염색은 내가 하기도 하고, 이발은 친구가 해주지.”

아직도 할 일이?있어서 행복하다는 정동진 대표

-소망이 있다면?

“이 나이가 되어서도 애들한테 손 안 벌리고 내 용돈 벌어 쓰는 것에 감사하지. 매일 출근할 수 있는 직업이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고. 앞으로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하려고 해.”

조운이발소가 단골이라는 손님 김종석 씨(58)는 “동네에 미장원도 있지만 (거리가) 더 멀어도 꼭 여길 오게 된다. 미장원보다는 여기서 이발을 해야 머리를 깎은 느낌”이라며 “오늘도 손님이 계속 이어져서 세 번째 와서야 이발했다”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손때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구들

손님을 내보내고 청소를 마친 후 밖에 나가 담배를 피우는 할아버지의 표정에는 지난 시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듯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면도 거품을 닦아내는 신문지 조각 뭉치가 이발도구들과 함께?또 다른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민경찬 기자 kris@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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