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40] 해방 전야의 행보와 인연…’인산’ 아호를 받다

인산 김일훈 선생 행적과 근영

금선대 역시 언제 누가 조성해 놓은 것인지 모르는 일종의 기도막이었다. 첩첩한 능선과 골짜기를 넘고 또 넘은 연후에도 산길을 벗어나 아슬아슬한 바위 사이로 몇 굽이를 돌아가며 올라간 곳에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의 자그마한 구조물이 제비 둥지처럼 바위 절벽에 붙어 있었다. 그것이 금선대였다. 마당이라고 할 것도 없는 좁은 공간에는 용트림을 하듯 줄기를 비틀며 자란 소나무 세 그루가 바위 틈새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곧바로 수십 길 낭떠러지가 이어졌다.

금선대에 앉아 맞은편을 바라보면, 아득한 하늘 끝으로 묘향산의 주봉(主峰)인 비로봉(毘盧峰, 1909m)이 올려다 보였다. 금선대 바로 뒤에는 절벽의 틈새에서 솟아 흐르는 물이 고이도록 사람의 손으로 우묵하게 파놓은 확 모양의 샘이 있어서 식수 문제는 해결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식량을 조달하기 어려운 점이 문제였다.

운룡이 가지고 간 식량은 이내 바닥이 났고, 아주 이따금 기도객들이 찾아와 놓고 가는 곡식이 유일하게 조달 받는 식량이었다. 운룡은 그것을 물에 불려 생식(生食)하면서 겨우겨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는 마침내 이도저도 먹을 것이 다 떨어지고 꼼짝없이 굶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었다. 하지만 운룡은 그럴 때에도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자기 자신을 보호해 주었던 신장들과 산신들의 도움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 믿음대로 식량이 바닥날 때마다 ‘꿈에 계시를 받았다.’며 먹을 것을 들고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1939(己卯)년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밖에서 부드러우면서도 낭랑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성(大聖) 관음불을 친견하러 왔습니다.”

갑자기 운룡의 코끝에 까마득히 잊고 지낸 옛 향기가 감돌았다. 자신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가까운 사람의 목소리임을 금세 알아차린 운룡은 얼른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나갔다. 검은 가사 장삼 옷을 입고 있는 그분은 2500년 전에 열반에 드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이었다. 운룡은 반가운 마음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 절을 하려고 하자, 석가모니 부처님은 손을 저으며 만류를 하셨다.

“대성께서 어찌 제게 절을 하시려 합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의 곁에는 문채(文彩)가 화려한 꼬리를 활짝 펼친 공작(孔雀) 한 마리가 따라와 있었다. 운룡은 다소 황공한 마음으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천지 정기를 종기(鐘氣)하신 대각자(大覺者) 세존께서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몸들 곳이 없지 않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은 빙긋이 웃으며 운룡을 마주 보다가 공작과 더불어 홀연히 그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 신들의 공간에서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금선대에서 한동안 머물던 운룡은 한 장소에서 오랫동안 머무는 것이 현명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강선봉에 있는 강선암으로 거처를 다시 옮겼다.

강선암에서 운룡과 한 식구처럼 지내는 까마귀 한쌍이 요란스레 아침의 고요를 깨뜨려 놓는다.

‘까-악 깍 깍까악 까-악.’

강선암의 나지막한 지붕 위에서 뒤편의 늘어진 노송 가지 위로 화들짝 놀라는 날갯짓을 하며 옮겨 앉은 두 마리의 까마귀가 번갈아가며 짖어 댄다.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라도 알려주려는 듯. 밤새 물에 담가 불려 두었던 쌀을 한 움큼 남짓 바리에 담아 아침 식사를 하려던 운룡은 순간적으로 눈살을 가볍게 찌푸린다.

‘또 불청객이 올라오는가 보군.’

바깥을 내다보니 주위를 둘러싼 뾰족뾰족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멧부리들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청아하게 빛났다.

‘몹시도 서두른 모양이로군. 이리도 이른 시간에 예까지 당도하는 걸 보면…….’

운룡은 재빠른 솜씨로 아궁이에 쌓여 있던 묵은 재를 한 주먹 쥐어 부엌의 허공에 흩뿌렸다. 부뚜막(이랄 것도 없었지만)과 작은 살강에 고르게 내려앉은 잿가루는 그곳에 오랫동안 사람이 기거하지 않은 것 같은 상태를 연출해 줄 것이다. 자신의 잠자리이기도 한 법당 안에 들어가 약간의 곡식이 담긴 자루와 외출 시 입는 허름한 양복, 읽던 책 서너 권을 재빨리 꾸려 내놓고, 이번에도 역시 아궁이에서 고운 재를 한 줌 쥐어다가 맨 안쪽에서부터 입 앞에 대고 불어내면서 뒷걸음질로 나왔다. 이제는 누가 보더라도 강선암의 안팎이 오랫동안 인적이 끊어진 상태에서 방치된 모습으로 비쳐질 것이다.

그 사이에도 까마귀들은 더욱 기세를 올려 사뭇 울부짖듯 성화를 해대고 있었다. 영리한 까마귀가 적이 두 명이라는 것까지 운룡에게 알려준다.

‘알았다, 알았어. 고마운 녀석들…….’

운룡은 짐 보따리를 어깨에 걸쳐 메고는 계곡 쪽으로 내려가 강선암의 모습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맞은편 석벽으로 올라갔다. 산 생활이 몸에 밸 만큼 밴 운룡인지라 그 움직임이 날랜 범 같았다.

오랜 세월 풍상을 겪으며 그 자리에 있어온 강선암의 퇴락한 모습이 왠지 정겨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 즈음, 그곳을 향해 다가가는 두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강선암의 마당에 들어선 그들은 먼발치에서 보더라도 여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떼어놓는 게 아니었다. 그중 한 사람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권총임에 틀림없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운룡이 그곳에 있다는 정보를 얻고 체포하러 온 형사들이었던 것이다. 참으로 집요한 추적자들과 용의주도한 도망자 사이에 벌어지는 숨바꼭질이었다. 만주→백두산 금점판→묘향산 설령의 설령암→ 묘향산 강선봉의 강선암으로 심산 절벽 원시림에서 원시림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추격전이었다.

강선암의 안팎을 샅샅이 살펴본 두 사람은 하릴없이 도로 내려가고 말았으며, 운룡은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에 ‘이제 여기서도 몸을 뺄 때가 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강선암으로 돌아왔다. 운룡의 얼굴-넓은 이마 밑에 가늘고 긴 눈초리, 어깨에 닿을 듯이 두툼하게 축 늘어져 있는 귓불, 굳게 다물려 긴 가로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에 좀처럼 보기 힘든 외로움과 수심이 내려앉았다.

‘내 일생토록 고행할 것임은 스스로 알고 있던 바이거니와, 세상 지혜가 부족하여 인명을 앗아가는 무자비한 난치병들과 무서운 공해에 의한 모든 중독 병들을 말끔히 치료할 다시없을 이 사람을 알아보기는커녕 도리어 이렇게 손발을 묶고 숨통을 죄니…… 이 현실이 안타깝구나. 각자(覺者)의 지혜라도 대중을 구원하기에 미흡하다면, 그 알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 이미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간질병 환자의 발작을 멎게 하였으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 걷게 하고, 문둥병 환자를 깨끗하게 낫게 하였건만 정작 나 자신은 지난 20년 동안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몸을 피하며 묻혀 있지 않은가? 뇌염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거적을 덮어놓은 아이에게 침을 놓아 살려냈을 때에도 나는 미친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었다. 물에 빠진 처녀를 건져놓고 이미 죽은 것으로 생각하여 울부짖는 가족들을 밀쳐내고 그 처녀의 젖가슴을 풀어헤쳐 중완혈(中脘穴)에다 뜸을 떠서 살려냈을 때에도 나는 성난 군중들에게 몰매를 맞아 죽을 각오를 해야 했었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며 법당 안에 앉아 있는 운룡과 대면하고 있는 존재는 채색이 벗겨지고 빛이 바랜 목조 관음불상이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이목구비가 자기와 닮은 그 관음상을 보면서 운룡은 문득 동병상련의 따스한 정을 느꼈다. 아무도 찾아와 공양을 바치지 않는 깊은 산중의 쓰러져가는 암자에서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바라보며 서서히 소멸해 가는 목조 관음불의 모습이 흡사 자신의 모습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영원히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해진 명대로는 앞으로 50년을 채 못 살 터인데…….’

어느새 어둠이 운룡의 어깨를 감싸 들고 있었다.

그 무렵 운룡은 자주 평안북도 영변군 고성면 남산리 약산(藥山)에 사는 충재(充齋) 김두운(金斗運) 선생 댁을 찾아가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학덕, 그리고 우국충정을 접하며 더불어 학문과 시국담을 논하는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충재 선생은 조선 후기 유림의 4대 학파인 화서학파(華西學派)를 형성한 화서 이항로(李恒老) 선생의 직계를 이루는 학자로서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조선총독부에 일격(一擊)을 가하기 위해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화서학파라 하면 구한말에 위정척사론의 사상적 기초를 다져놓은 이항로 선생을 필두로 하여, 그 제자들로서 탐관오리와 매국 역적을 응징하고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지키고 민족정기를 내세우기 위해 의병으로 떨쳐 일어나 활약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ㆍ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ㆍ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黙)ㆍ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선생 등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지니고 있는 학파였다.

충재 김두운 선생은 그중의 유인석 선생의 강학에 참석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가 의암 선생이 의병대장으로 나섰을 때 의병으로 동참하여 김정업(金鼎業)ㆍ김성련(金聖鍊) 등과 함께 개천 안주 박천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한 전력이 있는 애국지사였다. 그러한 김두운 선생이 운룡의 범상치 않은 인물됨에 주목하여 그를 문인(門人)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여기서 화서학파와 의병운동 내지 독립운동과의 밀접한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곁가지 얘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자면,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과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 통감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를 빼놓을 수가 없다.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 진사(進士)는 안 의사가 어렸을 적에 후조(後凋) 고능선(高能善 혹은 高錫奎)을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의 자기 집 사랑채에 숙사(塾師)로 초빙하여 자제들에게 한학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그때 동학 의병으로서 해주 성을 습격하였다가 패주한 김구 선생이 안 진사 집에서 은거하면서 안중근 의사와 더불어 고능선에게 동문수학을 하며 한학을 공부한 것이다. 김구 선생의 나이 19세, 안중근 의사의 나이 17세 때였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 고능선은 유중교 선생의 고제자로서 김두운 선생의 스승인 유인석이나 금계(錦溪) 이근원(李根元) 선생과는 동문이다. 화서학파의 계보를 잇는 고후조에게서 배운 김구 선생(《백범일지》를 통해서 보면 그때 김구 선생이 안 진사 댁에 머문 기간은 45개월이었음)이나 안중근 의사가 화서학파에 이어진 인물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무튼 충재 김두운, 강재(康齋) 문창수(文昌洙) 선생의 주도하에 조선총독부를 습격하기 위한 작전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운룡도 그 계획에 참여하여 의견을 내고 연락 역할을 맡는 등 활동을 하던 참이었다.

한번은 운룡이 충재 선생과 석계(石溪) 김문빈(金文彬) 선생, 그리고 희산(希山) 김승학(金承學) 선생과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있었다. 석계 선생은 충재 선생과 더불어 의병 활동을 했던 분이었으며, 희산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았던 분으로서 두 분 모두 투철한 항일정신을 몸소 실천해 온 애국지사였다. 그 자리에서 충재 선생은 운룡을 ‘신약(神藥)으로써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의학의 세계를 열어 나갈 신의(神醫)’라고 소개하면서, ‘왜놈들이 우리 조선을 없애려는 미친병도 고칠 사람’이라고 했다. ‘신약’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해 하는 두 사람에게 운룡은 동해산 마른 명태와 토종 오이, 집오리, 죽염, 쑥뜸 등에 관해 간략히 설명하면서 그런 신약들이 어떻게 해서 약성을 띠게 되는지 별들의 운행과 공간 색소와의 관계를 연결 지어 설명했다. 한학과 항일투쟁으로 삶을 일관해 온 사람들인지라 운룡이 얘기하는 내용을 단박에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운룡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낸 여러 가지 사례들을 소개하자 비로소 입을 벌리며 놀라워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 동지가 알고 있고 볼 수 있는 것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보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겠소이다. 세상을 잘못 만나 그 놀라운 의술을 마음껏 펼쳐 보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구려.”

강재 선생이 자탄(咨歎)을 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김 동지의 말씀을 들어보니 석가세존이 불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려 한 것에 못지않게 김 동지는 그 신통한 의술로써 세상 사람들의 병고(病苦)를 치료하여 대각(大覺)의 반열에 들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드오. 참으로 금일에 귀한 만남을 하게 되었구려.”

희산 선생도 한마디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김 동지에게 아호(雅號)를 하나 지어 주려고 생각해 왔는데, 어떤 이름으로 하면 좋을지 이왕 이 자리에 모인 동지들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어떻겠소?”

충재 선생이 흐뭇한 눈길로 운룡을 바라보며, 나머지 두 사람의 의견을 물었다.

그날 그 세 사람은 잠시 동안의 의론을 한 연후에 ‘산중에서나 저자에서나, 아니면 길을 가다가도 아픈 사람을 만나면 달려가 짧은 시간 안에 그 아픔을 치료해 주는’ 운룡의 행위 자체가 곧 ‘인(仁)’이라는 사실에 공감하여 ‘인산(仁山)’이라는 아호를 지었다.

“앞으로는 이 이름을 사용하여 그 ‘어짊[仁]’을 사해(四海)에 널리 펼쳐 만인(萬人) 만세(萬歲)에 길이길이 덕을 끼치기를 바라오, 인산!”

충재 선생은 운룡의 손을 굳게 마주 잡으며 축원의 말을 해주었다. 운룡은 감사한 마음으로 ‘인산’이라는 아호를 받아들이고, 평생토록 인류의 질병을 극복해 나가는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로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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