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38] 금강산 유점사 주지스님과 마주 앉다

금강산 유점사

세상이 주지하는 대로 금강산은 천하에 다시없는 명승지로서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봄에는 온갖 꽃들로 화려하고 산수가 청명하여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온 산에 짙은 녹음이 우거져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단풍이 불붙는 듯하여 풍악산(楓嶽山), 겨울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의 형체가 그대로 드러난다 하여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불린다.

예로부터 수많은 문인이나 화가·소리꾼 등이 자신의 예술 세계가 그 산을 닮은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과 그림과 노래로써 금강산을 표현하였고, 신라 시대의 화랑들을 필두로 심신 수련의 도량으로서 으뜸으로 치던 곳이 금강산이었다.

이 대목에서 운룡이 살아가는 동안 여러 차례 반복하였던 어떤 행위에 대해 잠깐 짚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하늘에 맞닿은 만학천봉(萬壑千峰)들의 기기묘묘한 형상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산의 골골 깊숙한 처처(處處)에 무후만년향화지(無後萬年享華地-자식이 없는 사람들이 무궁한 복을 누리는 땅)가 있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잘 모른다. 다만 그런 자리마다 사찰이나 암자들이 터를 잡았으니, 가히 불가에 귀의하여 승적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자식을 두지 않는 것이 불가의 이치에도 맞을 뿐더러 그가 거하는 절터의 땅기운에도 부합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 땅은 도리어 혈손(血孫)에 관하여는 망지(亡地)이므로 그런 땅 위에서 자식을 두어 키우면 자식이 제 명에 살지 못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대처승(帶妻僧)들은 그런 절터에서는 성직자 노릇을 해서는 아니 된다. 절터를 달리 표현하면 타성양자지지(他姓養子之地)라고 할 수 있다. 핏줄에 의한 계보가 아니라 승가(僧家)의 법적(法籍) 계보를 잇는 종교적 자손(양자)에 의해 영구히 복을 받는 땅이 바로 절터인 셈이다.

금강산 경내에는 그런 절터가 부지기수로 많았고, 또 그런 절터에 세워진 사찰이나 암자에는 수많은 승려들이 구도의 길이랍시고 정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운룡은 승려들이라면 백안시(白眼視)부터 하고 대했다. 무엇보다도 혈육의 정을 끊고 부모에게서 등을 돌린 출가 행위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호랑이가 와서 자식을 물어 갈라치면 그 호랑이한테 덤벼드는 게 어머니의 사랑이다. 그런데 그런 모성애를 저버리고 절에 들어간 게 중들 아닌가? 미련한 돼지도 제 어미를 따르는데,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 저를 낳아준 부모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부처님과의 인연을 거들먹거리지 마라. 인연은 무슨 인연? 인연은 아버지와 아들 간의 인연이 인연인 것이고, 정이라는 것은 어머니하고 자식 간의 정이 진짜 정이다. 차라리 절에 들어가 부지런히 일하면 밥은 얻어먹을 수 있어서 중이 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은가? 집에서야 피죽 한 그릇 먹기도 힘든 형편이니…….

인간은 누구나 조상의 영력으로 계통이 서 있거늘, 당신들이 먹물 들인 승복을 입었다 해서 부처님 하고의 계통이 생겨날 줄 알았단 말인가? 예로부터 효심이 지극하면 얼음 속에서도 부모의 병구완에 쓰일 잉어가 나오고, 눈 위에서도 부모님 봉양할 수박이 익으며, 마른가지에서도 홍시가 열린다고 했다. 효심이 지극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기적이 없는데, 당신들은 중이 되어 평생토록 부처님을 위해 지극 정성을 들여 과연 무엇을 이루고, 무엇이 되었는가?

당신들이 제 아무리 염불을 외워봐라, 부처님이 감동하던가? 하지만 효자에게는 하늘이 감응한다. 승가(僧家)에서 선사(禪師)라고 불리게 되면 그 뜻을 이루었다고 할 것인가? 당신들이 맹물 그릇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신들의 근원이 부처님과 일치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예전의 신라가 화랑정신으로 무장하였을 때에는 능히 삼국을 통일하고 중국의 당나라조차 무서워서 벌벌 떨게 하던 강국이 될 수 있었으나, 원효가 부처님이 제일이라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망하고 말았던 사실을 보라.

충효의 기백으로 기상 드높던 화랑의 무리들이 모두 늙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부처님을 숭앙하는 불교가 자리함으로써 끝내 앉아서 염불만 외다가 망해 버린 것이다. 그 이후의 고려도 불교를 버리지 못하다가 말기에 원나라의 침략을 받아 어떤 수모를 겪었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고려장(高麗葬)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라. 원나라의 되놈들은 고려인들에게 부모의 나이 70이 되면 산속에 내다버리는 악습을 전파하였지 않은가?’ 하는 것이 운룡의 생각이었다.

또한 운룡이 생각하기에 일반적으로 ‘공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세상 보는 눈을 밝게 하고 생각하는 머리를 틔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자기를 없애고 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불가에서는 왜 자기를 없애는 공부를 하고 있는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집에 사는 중들은 자기를 없애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절 공부를 통해서 자기가 없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중들이 참선을 한답시고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틀고 앉는 것 자체가 운룡의 눈에는 거슬렸다. 그 자세가 중들의 건강을 얼마나 해치는지 알고 있는 운룡으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어떤 분이시냐? 만고의 대근기(大根氣)이신 그분은 어떤 자세로 앉아도 괜찮을 뿐더러, 그분이 결가부좌를 하고 앉았던 것은 다리에 그처럼 정신을 집중시키면 설산(雪山) 위에 앉아도 무릎 온도가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중들은 말할 나위도 없이 소근기(小根氣)에다 허약 체질이므로 결가부좌를 할 경우 금세 무릎에 마비가 오게 마련이다. 십중팔구 신경통이나 관절염에 걸려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석가모니는 석가모니 자신에 맞는 수행법을 행하시며 사셨던 분이다. 후세의 중생(衆生)들을 제도(濟度)하기 위해서 당신을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묘법(妙法)을 일러 전하셨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수행 시의 앉음새를 당신이 한 것과 같이 하여 골병들라고 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면서 자기를 돕는 것이 공부이다. 자기를 죽이기 위한 공부? 그런 공부를 해서는 안 된다. 자기를 괴롭히거나 자기를 죽이면서 무슨 공부를 한다는 건가?’


평소에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던 운룡이 금강산 내에서 가장 큰 사찰인 유점사(楡岾寺)를 찾아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유점사의 경내에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름드리 느릅나무 숲이 울창한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의 집 문전에서 먹을 것을 청해 얻어먹으며 긴 여정을 이어온 운룡의 행색은 거지 차림이나 다름없었지만, 그의 얼굴과 형형(炯炯)한 안광은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유점사의 경내에 들어선 운룡은 ㄱ 자 형태로 지어진 선원(禪院)으로 들어가 그곳 툇마루 앞의 섬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짚신들을 일별(一瞥)했다.

대략 50여 켤레는 됨직했다. 운룡은 자신의 짚신을 벗어 그 열(列)에 더해 놓고 툇마루 위로 올라섰다. 땟국에 전 운룡의 버선발은 말끔한 마룻바닥에 금세라도 시커먼 발자국을 남겨놓을 듯했다. 그러나 운룡이 몇 걸음도 채 떼어놓기 전에 그의 눈앞을 가로막는 팻말이 있었다.

‘외인 출입금지’

그 문구를 본 운룡의 가슴속에서는 불쑥 욕지기가 일었다. 그에 따라 운룡은 풀썩 고소(苦笑)를 날리며 그 팻말을 무시해 버렸다. 그런 순간을 맞을 때마다 운룡의 자존심은 끝 모를 비상(飛翔)을 하기 마련이다.

‘흥, 외인 출입금지라고? 나를 못 들어오게 하겠다, 이 말이렷다. 너희들이 무엇을 믿고서……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나를 밀어내며 못 들어오게 하느냐? 그러면서도 너희들이 부처가 되겠다는 망상(妄想)을 갖는 게냐?’

운룡은 성큼성큼 걸음을 떼어 선방(禪房)의 큰 문을 밀어젖혔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6열 종대형(縱隊形)으로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참선에 들어 있던 승려들 중 서너 명이 벌떡 일어나 운룡의 앞을 가로막았다.

“대체 뉘신데 여길 함부로 들어오시는 게요? 당장 나가시오!”

그중 한 명이 나지막하나 강경한 어조로 운룡에게 말했다. 그러나 운룡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밀쳐 내며, 정면 좌대(座臺)에 역시 결과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는 조실(祖室)로 보이는 승려에게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일갈했다.

“노장(老長)은 들으시오. 노장은 조실 노릇이 한두 해가 아닐 터이니 여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승려들 가운데 암으로 죽을 사람이 몇이고 관절염·신경통으로 무릎·다리에 고질(痼疾)을 안고 지내게 될 사람이 몇이며, 풍을 맞아 쓰러질 사람이 몇인지도 알 것 아니겠소? 그렇게 죽어가는 저 사람들이 성불을 할 것이라고 한다면 아랫마을 개도 웃겠소.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앉혀놓고 참선을 시킨다고 하는 조실이라니…… 내가 보기에 노장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것 같소이다.”

그렇게 말한 운룡은 몸을 돌려 선방 문을 나서면 혼잣말로 덧붙였다.

“내 중놈의 세계가 어떻다는 것은 일찍부터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미친놈들 판인 줄은 몰랐구나. 에잇, 정신 썩은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저러다가 생각이 뒤집히면 연지(燃指)를 한답시고 손가락에 불을 붙이겠지? 무지몽매한 자들 같으니라고…….’

손가락을 태우면 손가락뼈에 불이 붙게 되고, 그리 되면 골수가 타게 된다. 뼈 속의 골수는 뇌수까지 하나로 이어져 있으므로 골수가 타면 뇌수 역시 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쇠붙이의 한쪽을 불에 달구면 마침내 그 쇠붙이 전체가 뜨거워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손가락에 붙은 불은 몸 전체로 퍼진다. 그렇게 해서 뇌수에 불길이 미치면 남아 있는 정신력과 섭취하는 영양소의 보조로 즉시 죽음에 이르지는 않더라도 항상통(恒常痛)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을 태우는 수행을 한 대선사(大禪師)’라는 허명을 얻은 것에 족하며 항시 머리 아파 쩔쩔매다가 종국에는 뇌가 다 상해서 없어지는 때에 눈마저 보이지 않게 되어 죽는 것이다.

일찍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반들로 하여금 그런 어리석은 수행법을 행치 못하도록 그 묘(妙)를 일러주지 않은 것은 당신이 열반에 든 뒤에 당신보다 더 좋은 시기에 새로운 각자(覺者)가 와서 그 일을 할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아닌 게 아니라 석가모니가 5백 나한들에게 여러 가지 가르침을 전했지만 나한들이라고 해봐야 모두 무지몽매한 우자(愚者)들이었을 테니, 그 모든 걸 어찌 다 전하실 수 있었으랴. 운룡은 그때 이미 연지의 후유증으로 뇌암에 걸린 선사들 여러 명을 살린 경험이 있었다. 단전에 뜸을 뜸으로써 뇌 속의 화독을 말끔히 빼내는 방법을 썼던 것이다.

운룡은 못 볼 꼬락서니를 보았다는 듯이 언짢은 기색으로 휘몰아치는 걸음을 옮겨 선원 문을 나서서 대웅전 앞의 널찍한 마당으로 들어섰다. 머리 위에 떠 있는 해가 오시(午時, 낮 12시)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때 나이 50 가까이 되어 보이는 승려 한 사람이 버선발로 뛰어와 운룡 앞에 넙죽 엎드리며 오체투지 예를 올리는 것 아닌가!

“어서 오십시오. 예까지 왕림하시느라 혹여 피곤은 없으신지요? 소승은 운택(雲澤)이라 하옵니다.”

운룡은 단박에 ‘이 중에게 뭔가 현몽(現夢)을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운룡은 그동안 ‘살아 있는 부처’라든가 ‘관음불의 현신(現身)’과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들어 왔던 터였다. 길을 가다 보면 느닷없이 누군가가 그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전생에 관음불이셨던 분을 뵙게 되다니……!”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접신(接神)을 한 무당들이나 일반인들 가운데에서도 그 즈음에 꿈을 통해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들이 그랬다. 그래서 운룡은 자신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는 승려를 보고 그가 모종의 꿈을 꾼 것이라고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유점사 주지 스님인 운택은 그 전날 밤 꿈에 ‘다음 날 정오에 전생의 관음불이 유점사 절 마당에 나타나신다.’는 계시를 받아 꿈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다가 그 시각에 나타난 운룡의 모습을 보고 버선발로 뛰어나온 것이었다.

“거, 주지 스님은 꿈을 철석같이 믿으시는가 봅니다.”

운룡이 다소 겸연쩍어 하며 말했다. 자신이 살펴보기에도 자신의 행색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렴요, 소승이 믿지 않으려야 믿지 않을 수 없는 꿈이었답니다. 아무튼 안으로 드시지요.”

운룡은 다시 한 번 합장 배례하는 주지 스님을 따라 법당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에 선방에 들어가 조실에게 한 말씀 전하고 오는 길입니다.”

운룡은 주지와 마주 앉게 되자 방금 전까지 격해졌었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선방에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셨다면 그게 무슨 말씀이셨는지……?”

주지는 운룡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면 무슨 말이건 받아 섬기겠다는 자세로 물었다.

“아 도반들이 절 공부를 하려면 육신이 건강하고 정신이 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먹는 것도 시원치 않은 데다 참선이란 걸 한답시고 장시간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하지(下肢)에 혈류가 통하게 하지 않으니 삭신이 쑤시고 온몸이 아프지 않은 데가 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 가지고 어떻게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불이란 게 어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게 애를 쓰다 보면 오는 것은 육신의 병뿐이지 뭐겠습니까? 게다가 철없는 사람들이 자꾸 손가락에 불을 붙이는 장난을 일삼아 뇌수가 타서 죽을병에 걸리고 마니, 그것 참 무슨 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신 것도 아닌데……. 대선사 소리를 듣는 게 그리도 좋은지…… 참, 별놈들이 다 중노릇 한다고 하니 한심할 뿐입니다. 내 그동안 그렇게 해서 죽게 된 노장들 여럿을 단전에 뜸을 떠서 살려냈습니다.”

주지는 운룡의 말을 들으며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간밤에 소승에게 현몽하기로는 처사께서는 전생에 관음불이셨다고 했는데…… 금생에 이르러서는 인간 육신의 병을 고쳐 주시는 업을 받으신 게로군요? 도반들의 참선에 대한 말씀 말고도 소승에게 들려주실 법문이 있으시다면 한 말씀 해주시지요.”

속세의 나이로 치자면 운룡의 나이의 갑절은 되었음직한 주지가 자세를 고쳐 운룡의 무릎 앞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렸다.

“관음불인들 무슨 대수겠소……. 내 그동안 지내오기를 남의 집에서 얻어먹는 날은 거지요, 산판에서 나무를 찍어 낼 때는 노동자요, 농사를 지을 때는 농부로 살아왔을 뿐인데…….”

어느새 운룡은 상대에 대한 존대를 생략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세상에 났을 때는 이 지구에 불구는 싹 없어질 거라고 자신했는데 지금은 거지 중에 상거지로 떠도는 신세가 되버린 것을 노승이 이리 대접해주시니 감사하기 그지없소이다. 단지 나는 영원토록 이 세상을 구원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을 스스로 믿을 뿐이오. 아무튼 내게 법문을 청하였으니 내 한마디만 하리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주지의 머릿속은 온갖 헛소리로 가득 차 있으므로 참말이 어디 비집고 들어갈 틈이나 있는지 모르겠구려. 내가 그 헛소리들을 모두 비우라고 한다면 얼른 비울 수 있겠소? 그보다는 지금의 육신을 버리고 다른 육신을 가지고 오는 편이 빠를지도 모르지.”

운룡은 그 말끝에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로부터 며칠간 유점사 주지 운택은 《금강경》을 펼쳐놓고 운룡과 마주 앉아 열띤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런 연후에 운룡은 다시 산중으로 제 갈 길을 잡았고, 운택은 여러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부처님하고 마주 앉아도 김운룡이란 분에게서 들은 것과 같은 법문은 들을 수 없을 것’이란 말을 거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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