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35] 진짜 독립군과 밀정출신 가짜들

“만주의 풀 속으로 다니던 무장 독립투사들은 처절한 그 시기에 이름도 성도 모두 가짜였으므로 문헌으로 그 존재가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살아서 체포되고 재판에 회부되면 간혹 재판기록은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짜 독립군은 만주의 풀숲에 백골로 굴러다니는 이름 없는 그 용사들이 대부분이고, 해방 후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독립군 행세를 한 이들 중에는 오히려 관동군 촉탁들이 더러 섞여 있었다.”(본문 중에서) 이미지는 구한말 독립군 자금을 조달하고 만주, 러시아 등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표적 노블레스 오블리지를 실천한 이회영 일가

운룡은 투옥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신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했었기에 탈옥 이후 자기 한 몸의 종적만 감추면 그만이었다. 경찰은 운룡의 본적지이며 가족 관계, 연고지 등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정확히 아는 게 없었던 것이다. 만약 본명을 알게 되면 고향에 남아 있는 가족, 친지, 친구들이 대신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탈옥자 운룡은 경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묘향산, 백두산 등지의 깊은 산속 오지로 은신해 들어갔다..

산속에서는 누가 독립군인지, 누가 적의 끄나풀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조선인으로서 일본 관동군에 장교로 속해 있거나 일본 경찰의 경시(警視)ㆍ경부(警部)ㆍ경부보(警部補) 등의 직(職)을 갖고 있던 자들은 자신의 보신(保身)과 영달(榮達)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총동원하여 일본국에 충성하였다. 특히 그들은 떳떳치 못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하여 같은 조선인들 가운데 다수의 기민한 자들을 앞잡이로 삼아 조금이라도 제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자를 발견하면 ‘독립군을 잡았다.’고 하며 죽이기를 일삼았다. 그런 자의 손에 걸려 애매하게 죽은 동포가 수도 없이 많았다.

산속에는 그런 자들의 앞잡이들이 깔려 있었다. 그들이나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이나 공히 이마에 나는 ‘일본의 앞잡이다’라거나 ‘나는 왜놈들을 원수로 여기는 독립군이다’라고 써 붙이고 다니지 않는 이상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 쉽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동지들이 잡혀도 나머지 동지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서로 본명을 말하지도 않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인사들이 주로 문사였던 반면, 한반도 북쪽이나 만주에서 주로 활동하던 무장 독립투사들은 참으로 처절하고도 조악(粗惡)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그것도 중대나 소대 병력 규모도 되지 않아 산적마냥 두세 명씩 짝지어 다니다가 일본군대를 만나면 몰래 몇 놈이라도 쳐죽이고 들키면 이름도 성도 모른 채 개죽음을 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여 일본을 응징하려는 기백만큼은 하늘에 닿았다. 그렇게 죽으면 ‘누구누구가 독립군이었다’,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다’라고 일컬어질 수조차 없게 된다.

몇몇 독립운동가들이나 정치적으로 활동하던 독립인사나 문사들은 남의 눈에 띄고 문헌상으로도 그 활동 근거가 남아 있지만, 만주의 풀 속으로 다니던 무장 독립투사들은 처절한 그 시기에 이름도 성도 모두 가짜였으므로 문헌으로 그 존재가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살아서 체포되고 재판에 회부되면 간혹 재판기록은 남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짜 독립군은 만주의 풀숲에 백골로 굴러다니는 이름 없는 그 용사들이 대부분이고, 해방 후에 사람들 앞에 나서서 독립군 행세를 한 이들 중에는 오히려 관동군 촉탁들이 더러 섞여 있었다. 독립투사들을 밀고하고 잡아내고 고문하던 그들은 자신이 죽이거나 고문했던 독립투사들에 대해 세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만이 아는 그 정보로 스스로를 독립운동가로 탈바꿈시켰고 덕분에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몇몇 가짜 독립유공자 때문에 대다수 독립유공자를 의심해선 안될 것이다. 이 세상 일에는 늘 예외가 있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하늘과 땅만이 그들의 진실을 알아주리!

운룡은 극심한 굶주림과 몇 고비의 사선을 매번 화엄신장 등의 가피(加被)로 무사히 넘기고, 양식을 마련하는 일이라면 어떤 막노동도 닥치는대로 해나갔는데 한번은 백두산 깊숙한 곳에서 만난 몇몇 동지들과 함께 초막을 얽어 기거하면서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어딘가에 있는 금맥을 스쳐온 냇물의 가장자리에 퇴적되어 있는 모래를 퍼서 쌀을 일듯 일면 때로는 참새의 눈물만한 금가루를 얻을 수 있다. 그 일을 수십 수백 번 반복하여 금을 모아놓으면 정기적으로 사금 수집상이 식량과 소금ㆍ삼베ㆍ광목 등을 가지고 올라와 금과 바꾸어 가는 것이다. 하늘과 땅의 기운을 한데 뭉쳐 종기(鐘氣)한 자신의 존재를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는 운룡이었지만, 목구멍에 풀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육체적 노동뿐이었다.

육신은 고달프고 비참했지만 영혼만은 자유자재로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장차 도래할 신약(神藥)의 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는 그의 곁을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갔다. 운룡과 그의 동지들이 일경에게 쫓기는 처지임을 간파한 사금 수집상은 그 점을 기화로 하여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하였다. 장사치의 생리상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생각만 앞세웠지, 고정 거래자로서의 의리나 대의를 위해 모진 고생을 하고 있는 동포들에 대한 인간애 따위는 고려할 것이 못되었던 것이다. 운룡과 그의 동지들이 애써 모은 금가루를 거저 빼앗다시피 해도 달리 어쩌지 못할 것이라는 얄팍한 계산을 앞세운 사금 수집상은 갈수록 야박한 인심을 드러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상금에 눈이 어두워 애국투사들의 소재를 일경에 밀고하는 파렴치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시대이니만치 운룡과 그의 동지들의 약점을 잡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의 행위를 나무랄 수만도 없었다. 그러나 사금 수집상의 이악스러운 태도에 번번이 농락당했다는 느낌을 받은 운룡과 그의 동지들은 더 이상 사금 채취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 아래, 급기야 완력으로써 그 사금 수집상을 징치(懲治)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로부터 두들겨 맞아 초주검이 된 사금 수집상을 사금 채취장인 냇가에 버려두고 그들은 제각기 갈 길을 잡아 흩어지게 되었다. 운룡은 눈에 선한 묘향산 깃을 찾아 남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가 개마고원을 지나고 낭림산맥의 험준한 고개를 넘어 묘향산 기슭에 당도한 것은 1937(丁丑)년 가을이었다.

멀고 험한 여정을 거치는 동안 극도의 굶주림과 피곤함으로 운룡의 육신은 피폐할 대로 피폐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지구의 보물을 두 손에 쥐고 뜻을 펼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일본이 아무리 발악을 하더라도 결국 때가 되면 이 한반도에서 쫓겨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묘향산의 갈피마다 운룡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예로부터 금강산에 못지않은 절경으로 이름난 묘향산에는 대소 350여 처소에 이르는 암자들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향산이 기도를 하거나 수신의 도를 닦기에 적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운룡이 다른 어느 산보다도 묘향산에 오래 기거했던 것은 묘향산이 한반도에서 가장 약성분자를 많이 함유하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험준한 산속에서 청춘의 때를 보낸 것은 무장 독립투사로서 일본 경찰의 마수에서 도망 다녀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었지만 운룡은 어쩌면 그 때문에 한반도의 구석구석 신비한 신약의 보고를 혼자 조용히 탐구할 기회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묘향산, 백두산, 금강산의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을 돌아다니며 하늘과 땅이 신비롭게 교류하는 천혜의 대자연속에서 운룡은 모든 신의학의 이론을 정립해 나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리에서 절로 읽히는 신약의 세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몸으로 체험하면서 손으로 만지면서 그렇게 신의학은 구체적으로 완전한 형태를 이루어 나갔다.

산중 생활이라는 것이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지난의 연속이다. 며칠 굶기는 예사고 어쩌다 발견한 조그만 절에서 밥이라도 한술 얻어먹을라치면 고약한 중이 다 쉰밥 한 덩이를 주면 그거라도 시냇물에 씻어 허기를 때우기도 하였다. 한 여름 홑 베적삼 하나로 겨울까지 걸치고 그거라도 없는 것보단 한겨울 바람막이는 되는데 나무장작이라도 패느라 땀을 흘리면 그 순간 땀에 젖은 베적삼이 얇게 얼어붙어 얼음이 서걱거렸다.

특히나 엄청난 적설(積雪)로 고립된 채 먹을 것 하나 없이 지내야 하는 기나긴 겨울철의 혹한은 산중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에겐 너무도 가혹한 자연의 시련이었다. 운룡은 조국이 해방을 맞기까지는 산중 생활을 영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천지의 운행과 삼라만상의 존재 양태(樣態)를 차분히 관조하겠다는 마음을 되새기며 설령암(雪嶺庵)의 자그마한 마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마침 사용자 없이 비어 있는 설령암은 천혜의 기도처라 할 만한 위치에 있어서 운룡이 은둔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언제 누가 건립하였고, 그동안 어떤 도인과 스님들이 머물다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월림(月林) 주재소에서 순사가 온다 하더라도 하루 만에 왕래할 수 있는 거리가 넘었으므로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기 전에는 검문을 나올 염려가 적었다.

일반 기도객들도 일단 아래쪽의 큰 절에서 하룻밤을 묵은 연후에라야 설령암에 당도할 수 있었으며, 특히나 11월 초부터 이듬해 봄까지의 대여섯 달 동안은 험한 산길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더더욱 사람의 왕래가 어려운 곳이었다. 세 평 남짓한 크기의 방과 제법 규모를 갖춘 부엌은 운룡이 혼자서 지내기에는 오히려 넉넉할 정도였고, 이중으로 되어 있는 벽과 방문은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적합한 구조였다. 부엌에는 장작이 가지런히 쌓여 있어 이전에 머물던 이의 따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온돌로 통하는 아궁이에는 자그마한 무쇠 솥이 걸려 있어 취사와 난방이 가능한 상태였다.

부뚜막 위에는 소박한 나무 그릇 몇 개와 제기(祭器)가 역시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정면에 나지막한 불단(佛壇)이 있고, 그 위에는 빛바랜 등신대(等身大)의 목불상이 좌정(坐定)하여 있었다. 운룡은 물을 길어다 독을 채우고, 아궁에 불을 지펴 인적(人跡) 없던 기간의 쓸쓸함에 훈기(薰氣)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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