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33] 일제 경찰의 모진 고문과 日교도소장 부부와의 인연
1934년 봄 변창호 대장이 이끄는 운룡의 모화산 독립군부대가 철원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조선이 완전히 일본에 합병된지 어언 25년이 흘러 이제는 조선이란 완전히 사라지고 일본제국만 남는 것으로 여겨지던 시점이었다. 백성들도 지치고 독립운동가도 지치기 시작했다. 영원히 일본국만 지상에 남고 조선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다시는 일어설 것 같지 않은 긴 터널같은 시절이었다.
일반 사람들은 현실의 삶에 익숙해지고 일제시대라는 그 시대적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합당한 듯 보였다. 그러나 독립투사들의 가슴속에 조국은 단 한번도 사라져본 적이 없고 언젠가 반드시 대한국이 일본인들을 모조리 일본반도로 몰아내고 다시 우뚝 서리란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특히 산속에서 무장 투쟁하는 독립투사들은 더욱 더 그러했다. 일본군대는 쳐죽여야 할 적군이었지 함께 대화하거나 어울리며 공존해야 할 사회적 대상이 아니었다.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적은 눈에 띄기만 하면 단 하나라도 없애버려야 했다.
조선이 완전히 일본 수중에 들어간지 25년이 흘러 독립운동이란 몇몇 소수 악질조선인이 시대적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말썽을 부리는 것쯤으로 치부하던 일본 경찰은 철원경찰서 습격 사전이 터지자 무기력해진 조선인들의 가슴에 다시 독립에 대한 생각을 일깨울까 염려되어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
그 해 여름 변창호 대장과 부대원들은 일본 경찰을 피해 쫓기고 쫓기다 마침내 금강산 유점사 부근의 제당골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경찰서 습격 사건이 워낙 중대하여 관련자들은 거의 모두 체포되고 변창호 대장과 운룡 등 대원 20여명이 아직 체포되지 않고 있었다. 몇 달을 산속에서 도피생활을 해오던 대원들은 봄에 입었던 옷을 여름이 되도록 한번도 갈아입지 못하여 땟국에 절고 군데군데 구멍이 났는데 산속에 워낙 먹을 것이 없어 끼니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몰골은 거지 중의 상거지고 시시각각 조여오는 포위망을 피할 길 없어 모두 수심에 차 있었다.
여름 밤 금강산 제당골은 나무의 향기와 달빛이 가득하여 아름답기 그지없었으나 체포와 고문과 죽음을 눈앞에 둔 도망자들의 가슴에는 하염없이 서글픈 기운이 감돌았다. 변창호 대장은 달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원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시나 한 수 씩 읊어보자고 하였다.
대원들은 차례대로 한 수 한 수 시를 지어 읊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앞날의 운명을 예언하듯 절로 서글픔과 비애와 탄식이 시에 배어 나왔다. 드디어 운룡의 차례가 되었다. 운룡은 즉석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태산용지 천강대, 명월승천 사해인(泰山聳地 千江帶요 明月昇天 四海印).” 뜻인즉 “우뚝 솟은 태산은 일천 강으로 띠 두르고 하늘에 떠오른 밝은 달은 사해에 옥새를 찍었도다.”
운룡의 힘찬 싯구절은 일순간에 어둡고 숨막히는 공기의 흐름까지 바꾸는 듯 했다. 시름에 겨워있던 변창호 대장의 안색이 달라졌다. “과연 지 동지는 만고에 이름을 전할 성자인 것 같소. 우리 모두가 죽는다 해도 지 동지는 틀림없이 살아남을 거요. 천신이 있다면 반드시 지 동지를 도울 것이오.”
변창호 대장은 운룡에게 급히 편지 한 통을 써주었다. 철원 근처의 모처 모인사에게 전하는 편지였다. 곳곳에 일본 경찰이 매복해 있고 마지막 남은 대원들을 체포하기 위해 일대를 이잡듯 수색하고 있는 것을 잘 알지만 혹시 운룡같은 기상의 위인이라면 천우신조로 포위망을 벗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일말의 요행을 바라며 변창호 대장은 운룡에게 부탁한 것이다.
이튿날 운룡은 편지를 가슴에 품고 대원들을 뒤로 하고 산길을 헤치며 나아갔다. 철원으로 가는 도중 금화군 금성면을 지날 때였다.
“지을룡. 꼼짝 말고 손 들어라.”
길가 숲속에 매복해 있던 조선인 형사 이희룡이 총부리를 겨누었다. 호루라기를 불어제끼고 순식간에 여기저기서 나타난 일본인 형사들이 운룡을 에워쌌다. 운룡은 꽁꽁 묶여 금화경찰서로 압송되어 70여일간의 취조를 당하고 형식적인 재판을 거쳐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춘천형무소에 수감되었다.
70여 일간 계속된 취조는 말이 취조였지 가혹하기 그지없는 고문의 연속이었다. 일본 경찰은 도살한 짐승의 살과 뼈를 추려내는 백정 같은 솜씨로 운룡의 육신에 고통을 가하고, 그의 영력(靈力)을 유린코자 하였다. 그러나 운룡은 육신이 부서지거나 피와 살이 튀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운룡의 고문을 담당했던 일본 경찰 하나가 운룡의 눈에서 불꽃처럼 이는 분노의 눈빛을 마주했다가 그 날 밤 밤새 악몽에 시달리며 정신이 나가버렸다.
운룡의 발톱 10개는 모두 뽑히고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잔인한 일본 경찰은 단 한 개의 발톱도 남겨두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고문에도 운룡은 굴하지 않아 고문 경찰관들은 혀를 내둘렀고 운룡을 천하의 독종이라고 불렀다. 운룡이 일본 경찰의 가혹한 고문에서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하나의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었다.
춘천형무소에서도 운룡은 특별 관리대상자로서 가장 악질분자에 속해 독방에 수감되었다. 형무소장은 운룡에 대해 고문 경찰관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내심 호기심으로 눈여겨 관찰했다. 육신은 피투성이로 처참하기 그지 없었으나 떡벌어진 균형잡힌 체격, 잘 생긴 귀족풍의 얼굴, 새벽별처럼 빛나는 안광, 운룡에게는 보면 볼수록 범상치 않은 선풍도골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형무소내 관사에 살고 있는 형무소장 부인도 운룡의 소문을 듣고 먼 발치에서 운룡을 호기심을 가지고 쳐다보고 내외는 저녁에 자주 운룡의 얘기를 주고 받았다.
“지을룡이란 조선인은 보통 인물이 아니라면서요. 조선의 기인이라는데 처음 보는 사람같지 않고 어디선가 그 전부터 본 사람처럼 낯이 익네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했소? 나 역시 지을룡이란 자를 옛날부터 오랫동안 본 사람같소. 어디서 보았을까?”
두 내외는 저녁에 안방에서 대화하다가 방안에 걸어놓은 부처님 탱화와 똑같다는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다. 부처님의 자비롭고 그윽한 눈매, 넓고 푸근한 어께. 얼굴뿐만 아니라 운룡이 독방에서 가부좌 틀고 앉아있는 그 모습까지 그대로 똑같았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 우리 형무소에 그 조선인이 있을 때 한번 보게 해주세요. 이것도 부처님의 뜻일지도 몰라요. 내일 당신이 자리를 한번 마련해 주세요.”
다음 날 소장 부인은 손수 음식을 정성스레 장만하여 소장과 함께 운룡의 독방을 찾아갔다. 운룡의 풍모는 어디서고 빛이 났다. 다부진 몸과 형형한 안광은 그가 남다른 존재라는 것을 온몸에서 내뿜고 있었다. 형무소장 내외의 눈에는 운룡에게서 후광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도 고마워하거나 놀라지도 않으며 담담히 소장 내외를 대하는 운룡의 태도에 소장 부부는 존경심이 절로 배어나와 묶여 있는 죄수 앞에서 오히려 말소리도 태도도 더할 나위없이 공손했다.
“제가 직접 정성껏 만든 것이니 한 개인의 마음으로 여기고 물리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훌륭한 말씀이라도 한마디 듣고 싶어 이리 온 것뿐입니다.”
소장 부인의 간곡한 말에 운룡은 음식을 한 점 집어 먹었다.
“나는 부모의 나라인 우리 조선반도를 침략하여 괴로움을 주는 일본이 배신자의 나라라 용납하지 못할 뿐이오. 단군의 혈통을 이어받은 일본이 같은 동족인 조선을 짓밟고 말살하려는 것은 역천이니 후일 반드시 그 화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운룡은 자신의 뜻을 밝혀 말했다.
“조선이 일본의 부모 나라라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말이오? 금시초문이라서…….”
형무소장 부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부처님 상과 너무도 흡사한 운룡에 대한 경외심이 가슴속 가득 일었다. 범상치 않은 운룡이 던지는 말 한 마디가 한 마디를 무슨 불법이라도 듣는 듯 귀를 기울였다.
운룡은 그들 내외에게 분명한 사실을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중국에는 상(商)나라가 있었소. 그 상나라의 마지막 왕이 31대 주(紂)라는 자이오. 달기(?己)라는 무희에게 빠져 갖은 포악한 짓으로 백성들을 괴롭힌 폭군인데, 그가 신하 문중(聞仲)에게 명령하기를 우리의 국조(國祖) 단군(檀君)이 창건하신 왕검성(王儉城)을 정복하라 하였소. 간신으로 이름 높은 문중은 태사(太師) 벼슬에 있던 자인데, 공명심에 빠져 군사 3만을 이끌고 왕검성에 쳐들어갔소. 상나라의 무자비한 군사들을 맞아 우리 국조 신인(神人)의 후예들은 철저히 유린을 당했소. 문중의 군사들은 닥치는 대로 왕검성 성민들을 학살하였고, 그들의 잔악한 만행을 피해 수많은 사람들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섰소. 하지만 대부분은 거친 풍랑에 휩쓸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고, 그들 중 극히 일부의 사람들만이 해류를 따라 흘러가다가 도착한 곳이 일본의 하관이었소.”
형무소장 내외는 일찍이 어느 역사책에서도 읽은 적이 없는 그 얘기를 들으며 똑같이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것은 얘기를 하는 운룡이 마치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일을 얘기하듯 확실한 어조로 말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지 선생. 여기는 대화하기가 부족한 장소이니 내일 저희 관사로 모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로서 영안(靈眼)으로 보고 하늘의 이치를 토대로 삼라만상의 실체를 꿰뚫어 아는 까닭에 이를 일러 말하였다가, 세상의 나이 다섯 살이 되던 무렵부터 ‘어린아이는 입이 있더라도 어른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가친(家親)의 엄명을 받아 보이지 않는 울타리에 갇혀 지내온 운룡이었다.
험한 산중을 떠돌아다니거나 만주의 너른 땅을 유랑할 때 몸을 담은 동지(同志)ㆍ선배(先輩)의 세계에서조차 재하자(在下者)는 유구무언(有口無言)이어야 한다는 주의가 지켜지는 고로, 어디를 가든 아는 바를 다 말하지 못하고 보이는 바를 다 말하지 못한 운룡이었다. 그러나 누구라도 청하기만 하면 운룡은 상대의 수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머릿속에 아는 바를 거침없이 들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