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30] 묘향산 독립운동 시절
당시 묘향산에서 제자를 기르며 독립투쟁을 벌이던 최승호 장군이라는 기인이 있었다. 운룡보다 20여세가 많았는데 전우치(田禹治)의 무술과 도술의 계보를 잇는 기인(奇人)으로서 천하장사라 할 만한 괴력과 신출귀몰하는 도력으로, 그 역시 수많은 일본군들을 때려눕힌 애국지사이기도 하였다.
그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 가운데 그가 모월 모시 만주의 모처에서 일행들과 밥상을 받아 놓고 식사를 하기 직전에 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각났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더니 일행이 그 식사를 마치기도 전에 한걸음에 한반도 중간 지점인 대전(大田)까지 가서 볼일을 보고 돌아왔다는 얘기가 있다. 축지(縮地)의 능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였다. 최 장군의 도술 경지를 가늠케 하는 대표적인 예는 축지법과 아울러 물 위로 걷는 것을 들 수 있다. 최 장군이 고무신만 신은 채 걸어서 강을 건넜는데 물이 고무신 위로 조금도 넘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을 때 최 장군은 아름드리 나무를 뿌리째 뽑아 휘둘러 일본군을 여럿 쳐죽였으며 일본군이 마구 쏘아대는 총알이 최장군의 몸에는 닿지 않을 정도로 몸놀림이 가볍고 번개 같았다고 했다. 한때 백범 김구 선생이 최장군의 능력을 아껴 임시정부의 주요 임무를 맡기고자 그를 상해로 불러들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한 끼에 혼자서 수십 인분의 음식을 먹어제끼니 가난한 임시정부로서는 감당키 어려웠다. 이에 최장군은 스스로 임정을 떠나 묘향산에 은거하여 주로 제자들을 양성하며 독자적으로 활약하였다.
이런 최장군의 소문을 들은 20대의 운룡이 최장군을 찾아가 제자로 입문하여 무술을 배우겠다고 하자 최 장군은 운룡의 관상을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 “당신은 천하의 학자로 학문을 익힐 사람이지 무술 따위를 배울 사람이 아니네. 이왕 찾아왔으니 한번 지내나 보시게.”
이에 정식 제자로 입문하지는 못하고 함께 기거하는 동안 수제자들이 수련하는 것을 어깨 너머로 조금씩 익혔는데 운룡이 워낙 천재적인 자질이라 잠깐 사이 많은 수련의 공력이 쌓여 그 후 무술과 축지에 일가견이 있게 되었다. 당시 최 도사의 수제자로 입문하려면 줄넘기를 할 때 한번 뛰어 오르는 순간 몸을 솟구쳐 공중에 있는 동안 줄을 100회 정도 돌릴 수 있어야 했다. 복싱선수 등 줄넘기를 잘하는 운동선수들이 보통 한번 도약에 3회 정도 줄을 돌릴 수 있는데 100회라면 그 날렵함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겠다.
운룡도 눈대중으로 익힌 줄넘기 실력을 한번 시험해보니 한번 뛰면서 15회까지 줄을 돌릴 수 있었다. 지금의 운동선수들 수준에 대비해보면 운룡의 15회 줄 돌리기 실력은 누구도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대단한 고수의 실력이라 하겠다. 그 정도이다 보니 최도사의 수제자들은 비오는 날 곤봉을 들고 마당에 나가 휘두르고 있으면 몸이 비에 젖지 않았다. 최승호 장군같은 도인에게는 총알조차 천천히 날아왔다고 한다. 그 정도로 움직임이 번개같이 날쌨다.
운룡이 어깨 너머 배운 후 잠시 힘을 써 축지함으로써 10리 밖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추월해 갈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탄 사람으로서는 뭔지 모를 물체가 자기 옆으로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운룡은 물 위로 걷기도 시도해 보았다. 발바닥에 물이 닿을 때 몸의 중심을 잡고 발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발바닥의 각도를 계속 바꾸어야 더 이상 물에 가라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물가에서 운룡을 보는 사람은 운룡이 그냥 선 채로 둥둥 떠서 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최승호 장군의 거처에 머물던 짧은 동안 익힌 눈썰미만으로도 그런 수준의 도력(道力)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운룡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바야흐로 일제의 칼날 아래 한반도의 신음은 더 깊어지고 독립투사들의 투쟁도 점점 장기화되고 있었다. 오로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모인 의인들이었다. 좋은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명예와 복록을 누릴 유능한 인재였고, 따뜻한 가정에서 처자식과 오순도순 행복하기만 할 그들이었지만 못난 구한말의 무능한 정부와 부패 관리들의 잘못 때문에 어이없이 나라를 뺏기고 추위와 싸우고 긂주림과 싸우고 적의 총칼과 싸워야 했다.
전 재산을 모조리 독립운동에 바친 지사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군자금이 바닥나자 대낮에는 신분을 숨기고 노동으로 식량을 마련해야 했다. 군대의 대이동은 노출되기 쉬워 둘씩 셋씩 소규모 게릴라전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속전속결 번개같이 일본군대의 후미를 공격해 몇 놈의 일본군인을 죽이고 산으로 달아나고 그러다 운이 다하면 총칼에 난자당해 이름 모를 산야에 피를 뿌렸다.
어제 의기투합해 어울리던 동지가 오늘은 처참한 시체가 되어 자빠진 꼴을 보면서 불처럼 타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시신을 수습할 시간도 없이 산속으로 몸을 숨기곤 했다. 독립운동이라면 오늘날 우리는 전쟁을 떠올리겠지만 실상은 하나 둘씩 외로운 들짐승 마냥 치고 빠지는 소규모 게릴라전 형태가 많았다.
북방의 한겨울은 너무나 잔인했다. 독립투사들은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오줌발이 그대로 얼음 줄기가 되어 굳는 시베리아 만주 벌판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주머니에 조그만 비상 주머니를 차고 다니며 못 견딜 정도가 되면 술에다 독극물인 비상을 조금 타서 마시며 죽지 않고 견뎌나갔다. 무릇 세상의 독은 불의 성질을 띠고 있다. 비상 역시 강력한 독극물의 일종으로 조금 마시면 금새 화독으로 열이 확 올랐다. 운룡은 다른 동지들의 10 배나 되는 비상독을 술에 타서 마시곤 했다.
“아니, 지동지 비상독을 그렇게 많이 먹다가 죽으면 어쩌려구.”
“걱정 마시게. 내 몸뚱아리는 천하 독종이라 끄덕도 없다네. 조금 먹어서는 난 간에 기별도 안간다네.”
운룡은 비상독을 스스로의 체내독으로 생체실험을 해보며 독에 대해 연구했다.
적을 죽이고 친구가 죽기도 하는 잔인한 전투 속에서도 불행한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 간경화로 황달과 복수까지 차 생명이 얼마남지 않은 환자를 만나게 되었다. 마침 운룡 일행과 사냥꾼은 우연히 산속에서 만나 협동 작전으로 곰을 잡게 되었다.
약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급한 김에 생웅담을 그냥 환자에게 먹이려 하자 운룡이 제지하고 부싯돌로 화로불을 피웠다. 웅담이란 말려서 술에 타먹어야 약효가 간에 돌아 효험이 있는 법이다. 환자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화롯불을 피워 먼 불로 웅담을 밤새 불에 쪼여 급속 건조시켰다.
현대인들이 웅담에 대해 잘 몰라 생웅담을 액체 상태로 그냥 마시기도 하는데 그건 웅담에 대한 잘못된 복용법이다. 생웅담을 액체 상태로 복용하면 먹어봤자 약성분이 대부분 위장으로 들어가서 대소변으로 빠져나가 버리니 별 효과가 없다. 웅담은 건조된 것을 알콜에 타서 마셔야 웅담의 약성이 직통으로 알콜 기운을 따라 간으로 들어가 간세포를 살린다.
하룻 밤새 급속으로 웅담을 말려 술에 조금 타서 환자의 입에 넣어주자 환자의 간세포가 강력한 도움을 받아 해독 기능을 조금 회복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일단 급한 병세를 돌린 후 운룡은 간병에 대한 탕약처방을 써주며 정성스레 달여 먹으면 깨끗이 나을 거라고 일러주었다. 훗날 그 환자는 두고두고 청년도사가 자기를 살렸다고 전설처럼 말하곤 했다.
일본군대는 우리 민족에게는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철천지 원수인지라 두 말할 필요없지만 같은 한민족인 관동군 촉탁도 일본군대 못지않게 독립투사들을 잔인하게 괴롭혔다. 일경의 앞잡이 관동군 촉탁은 일본 군대의 지시를 받고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을 발본색원하겠다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가혹 행위를 자행하였다.
관동군 조선인 촉탁은 일제(日帝)의 개 노릇을 하며 온갖 만행을 일삼았으며 오히려 일본인들보다도 더 극렬하고 간악하게 동포를 핍박하고 못살게 구는 짐승 같은 자들이 때로는 밀정(密偵)으로 때로는 헌병 보조원으로 이미 없어진 나라, 영원히 다시 회복되지 않을 나라로 여기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