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32] “후손들에게 다시는 이런 고통 맛보지 않게 하리”

국내 최초 죽염 발명가이자 한방 암의학 창시자인 인산 김일훈 선생(1909~1992)은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묘향산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던 젊은 시절에도 선풍도골의 비범한 외모,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매한 영혼의 빛이 넘쳤다. 

탄광 속 깊은 곳에는 송진이 몰려 있어 언제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으므로 소방화 작업은 필수적이다. 탄광 가장 깊숙한 막장에서 조기통을 깔고 빅구로 채탄을 할 때는 광부들은 탄가루를 무한히 마시게 되므로 자연히 진폐증 환자가 생긴다.

그때 막장에서 일하던 광부 중에 나이는 운룡보다 20년 연배였지만 함께 어울리던 최씨 아저씨가 있었다. 운룡과함께 일하던 광산 동료로서 무던히도 성실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잘 생기고 귀티가 흐르는 운룡에게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 하며 나이가 훨씬 더 어린 운룡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가난하지만 음씩 솜씨가 뛰어난 부인이 만들어준 소박한 김치 반찬이나마 나누어 먹기도 했다.

광산일이 바빠서 하루 3교대로 24시간 채광하고 있었는데 운룡은 1교대 하루 8시간 일했으나 어린 자녀 5남매와 부인과 자신까지 7명의 식구가 최씨의 임금으로 하루하루 굶지않고 살아갈 수 있어 최씨는 하루 2교대 16시간을 쉬지 않고 일했다. 운룡은 채광일을 한지 얼마 안되었지만 최씨는 오랫 세월동안 착암기로 굴을 파고 채광하던 사람이라 해마다 쌓이는 탄가루로 폐가 굳어져 마침내 드디어 쓰러지고 말았다. 숨을 쉬는 것도 고통스러워 하며 방에서 일어나 걷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으니 산중촌락에서 부인이 한약방 약을 지어 먹이나 진폐증을 모르는 한약방 약으로 차도는 전혀 없고 점점 병세는 더해 갔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자 광산 사무소 직원들과 광부들은 서로 의논하여 최씨가 광산 시작할 적부터 일해 온 인부인 만큼 처지가 가련하다 하여 사무실측에 주선하여 도립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였다.

그러다 며칠 후 최씨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운룡은 어찌되었는지 가 보았다. 초라한 방안에 일곱 식구가 밥은 먹었는지 마는지 울고만 앉아 있었다. 최씨는 누워서 콜록거리는데 병원에 갈 때보다 더 형편없는 몰골로 거진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최씨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병원 의사가 진폐증이라는데 대수술을 해서 폐를 완전히 들어내야 한다네. 수술하면 목숨은 건질 것이나 일은 아예 암 것도 못하고 평생 방구석에 앉아만 있어야 된다는구먼. 가슴을 잘라 하는 대수술이라 돈이 엄청 든다는데 당장 끼니거리 걱정하는 우리 집에 뭔 수술 비용이겠나. 할 수 없이 퇴원해 죽을 날만 기다리네. 이제 2개월만 살 수 있다니 나야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겠나만 저 어린 것들 다 굶어죽을 걸 생각하면 차마 눈이 안 감기네.”

운룡은 가슴이 미어지는 가련한 정경에 기가 막혀 쳐다보다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최씨를 살려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최형은 내가 2개월 안에 살릴 자신이 있으니 결심하고 참으며 내가 하는 대로 따라 하면, 저 어린 자식과 내외간에 해로하게 될 테니 그리 알고 시작합시다.”

망가진 폐로 숨을 못 쉬던 병인은 운룡의 말에 순간 가슴의 통증이 멎는 듯 했다. 최씨 부인도 꿈인지 생신지 긴가 민가하며 운룡을 하느님 쳐다보듯 멍하니 쳐다보았다.

돈도 없고 약재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도망자의 신세이지만 일곱 식구의 목숨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운룡은 그 길로 수중에 있는 돈을 다 털어가지고 150리 이상 영변읍으로 걸어갔다. 가진 돈을 모두 내고 약쑥 10근과 백개자, 행인, 생강, 대추, 감초를 살 수 있었다. 등에 약재를 짊어지고 다시 산길을 150리 걸어 왔다.

최씨 부인에게 약을 볶으라 얼만큼 볶아야 한다는 둥 일러주며 부산히 움직였다. 흐느낌과 신음소리만 흘러나오던 어두컴컴한 최씨집이 갑자기 밝은 희망으로 생기가 감돌게 되었다. 아버지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에 최씨집 아이들도 덩달아 활기를 찾았다.

운룡은 잘 볶은 백개자 한 근 반과 행인 한근 반을 절구로 곱게 분말한 것에다 유근피, 생강, 대추, 감초 한근 반을 함께 가마솥에 넣고 물을 부어 푹 달여 그 약물을 최씨에게 떠먹이게 하였다. 환자는 10여일 만에 호흡을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고 우선 죽음을 면할 수 있게 되었으나 완치는 아직 멀었다.

운룡은 약쑥잎을 하나하나 손으로 뜯어 절구에 넣고 찧었다. 그런 후 체로 잘 쳐서 뜸쑥을 마련했다. 그리고는 최씨의 중완혈과 단전혈에 뜸을 뜨기 시작했다. 최씨 부인이 운룡이 하는대로 따라 배워 쑥도 치고 뜸도 떠는 것을 도왔다.

운룡도 최씨도 당장 입에 풀칠할 돈이 없어 운룡은 밤에는 탄광에서 일하고 아침이면 일을 마치고 나와 최씨를 치료해주는 중노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진폐증을 완치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운룡은 다시 죽염을 구워야겠다고 결심하고 동료들에게 읍내 부잣집 환자를 수소문하게 하여 부잣집으로 찾아가 병자를 고치려면 약을 만들어야 하니 비용을 내라고 했다. 선풍도골의 비범한 외모, 안광에서 뿜어져 나오는 고매한 영혼의 빛에 마주한 사람은 누구라도 운룡에게 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운룡의 풍모에 압도당해 저절로 그의 말을 신뢰하고 돈을 내주었다.

운룡은 그 돈으로 사람을 사서 담양에 가서 왕대나무를 사오게 하고 쇠판을 사다가 편철통을 만들고 풀무도 손수 제작하였다. 낮에는 탄광에서 일하고 밤에는 퇴근하여 장비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모든 것을 손수 만들어내니 그 고생을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그러나 최씨 일곱 가족의 불쌍한 정경에 운룡은 이를 악물고 최씨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염을 굽기 위해 모든 준비를 하나하나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소나무를 패와 장작을 쪼개고 송진을 구해놓고 왕대나무를 잘라 놓았다. 아무 장비도 없이 그 많은 노동을 운룡이 다 해내야 하였다.

가련한 동료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에 운룡은 평안북도 영변 장터 구석 빈터를 빌려 죽염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소금을 왕대나무통에 다져넣고 산속에서 퍼온 황토를 마개처럼 바르고 스스로 만든 편철통에 차곡차곡 쌓아넣고 소나무 장작으로 불을 땠다. 불이 꺼지고 소금기둥이 식으면 다시 꺼내 절구에 소금을 찧어 대나무를 잘라 분쇄한 소금을 다시 왕대나무에 다져넣고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천신만고를 오직 동료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수행해나갔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해 이토록 고통스러운 중노동을 할 수 있으랴. 직접 풀무와 편철통을 제조하여 죽염 완제품이 나오기까지 그 과정의 고생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박복한 불운의 친구를 구원하기 위해 치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운룡은 평생 잊을 수 없었으리리라.

드디어 죽염이 완성되고 이 죽염과 약으로 운룡은 약속한대로 여러 부잣집 위암 환자와 자궁암, 직장암, 대장암 환자 등을 차례로 완치시켰는데 그에 따른 고통은 필설로는 도저히 형용할 길 없다.

이 죽염의 일부는 당연히 동료 최씨의 진폐증 치료에 이용하였고 중완과 관원에 쑥뜸을 계속하여 완전하게 친구의 생명을 구하였다.

이렇게 6개월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치료를 계속한 끝에 최씨는 완치되어 일하러 갈 수 있게 되었다. 병원에서도 포기하고 온 산송장이던 최씨가 6개월 후에 죽기는커녕 다시 정상적으로 일하러 나오니 주위에서는 최씨를 살려낸 운룡을 이상하게 여기며 여기저기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늦가을 저녁 최씨하고 친한 사무실 직원이 운룡을 찾아와 몰래 귀띰을 하였다.

“지금 여러 사람이 선생을 임시정부에서 온 사람이 아니면 만주에서 항일투쟁하는 사람이 틀림없다고 수근거리는 중이니 소문이 빠르므로 50리 거리밖에 안되는 주재소에 금방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선생께서 아무 혐의 사실이 없으면 안심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운룡은 그날 밤으로 쌀 조금과 옥수수 몇 말을 급히 구하고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그 사이 새벽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왔다. 떠나면서 최씨 부부에게 “결심하고 반드시 1년간 부부 관계를 금하시오”라고 주의 시켰다. 떠날 적에 최씨 가족과 이웃의 친한 친구들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초겨울 새벽별의 희미한 빛 속에서 친구 두 사람이 운룡의 짐을 서로 나누어 세 사람이 짊어지고 낭림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산삼을 캐는 삼뫼막에 짐을 내려놓은 뒤 날이 저물어 가는 터라 친구들은 서둘러 내려갔다. 운룡은 불기 한점 없는 산속 산막에 홀로 남겨졌는데 절후는 바야흐로 9월 한로여서 눈이 내리는 고산지대의 초겨울 추위 속에 떨면서 힘겹게 밤을 지샜다.

이튿날, 운룡은 그곳을 떠나 큰 석굴을 찾아 겨울을 나니 살아 있으나 죽은 것만 못한 고통스런 삶이었다. 냉랭한 석굴 속에서 이불 하나 없이 몸에 걸친 얇은 옷가지뿐, 나뭇잎을 긁어다가 잠을 청하고 반찬이고 고기고 아무 것도 없이 쌀 몇 줌과 옥수수로 연명하는 기막힌 삶이었다. 겨울 솜옷도 미처 장만하지 못한 채 떠나왔으니 축축하고 습한 냄새나는 석굴 바닥에 떨고 앉아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겨울 혹독한 추위를 생나무 가지를 태워 연기속에서 옥수수 낱알이나 익혀 먹으며 6개월간 북방의 혹한 속에서 견뎌야 했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운룡이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최씨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남은 부인과 다섯 어린 아이들은 밥 벌어주는 가장이 사라져 그대로 죽은 목숨이 될 운명이었다. 7인 가정을 온전하게 구해 준 댓가로 운룡이 오히려 죽음보다 더한 추위와 굶주림의 고통스런 산속 생활을 견뎌나가야 했으니 운명은 운룡에게 너무 가혹하고 너무 혹독했다. 박복한 친구를 구해준 댓가 치고는 너무 지독했다. 생각할수록 기가 막히고 ‘하늘 아래 나보다 더 비참한 사람이 있을까! 선을 쌓으면 필경 재앙을 맞이해야 하는가!’ 오백년 선조들의 악덕으로 나라 잃은 설움이 뼈에 사무쳤다.

‘다시는 후손들에게 이런 고통을 맛보게 하지는 않으리라! 아니 지구촌 어느 나라 어느 백성에게도 이런 고통을 맛보게 해서는 안된다! 지구촌 전 인류가 무병건강 장수하여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한다!’

고통속에서 운룡의 결심은 더욱 확고해 갔다.

6개월간 혹한 속에서 생나무를 태우며 지내다가 춘분절이 되어 나무하러 굴 밖으로 나와 보니 눈의 시력이 완전히 물러가 겨우 나무나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백일이 지난 뒤부터 차차 시력이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나 정상은 되지 않고 대낮에 뚜렷이 보이던 뭇별이 잘 보이지 않게 되고 결국 다시는 완전히 원상 회복되지 못했다.

6개월을 꼬박 낭림산에서 은신했던 운룡은 다시 모화산 독립부대원들과 합류하여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등지를 떠돌며 일본군대를 쳐죽이거나 막노동을 하거나 산촌의 불쌍한 목숨을 구해주기도 하며 불운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