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48] 해방정국 좌우익 싸움 통에 계룡산으로

해방정국에서 찬탁과 반탁을 둘러싼 좌우의 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해방 직후 서울로 내려와 송운 방주혁 선생 댁에 머물던 인산은 좌우익의 진흙탕 싸움을 목도하고는 ‘이 나라가 아직 치러야 할 고난의 세월이 남은 탓이다’라고 생각하여 충남 계룡산을 찾아 들어갔다. 당시에 접한 거물급 인사들과 나누던 ‘새 조국 건설의 청사진’에 대한 온갖 계획도 하나의 이상(理想)에 불과하다는 체념이 있은 뒤였다.

계룡산 천황봉(845m) 정상에 올라선 인산은 자신이 영안(靈眼)으로 보아 온 태극(太極)의 상형(象形)을 육안으로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인산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에 구한말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태극기를 처음 본 순간 계룡산을 생각한 적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고려의 왕도(王都)였던 개경(開京)의 송악산(松嶽山)은 승려가 송낙을 쓰고 있는 형국이었던 고로 불운(佛運)으로 5백년을 갔고, 조선의 왕도 한양의 삼각산은 선비가 관(冠)을 쓰고 앉아 있는 형국이라 유운(儒運)으로 또 5백년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고종황제 때부터 나라의 상징인 국기로 태극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선은 그로써 완전히 끝났으며, 앞으로 독립이 된다 하더라도 조선은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와 동시에 유(儒)·불(佛)을 초월한 자연, 곧 우주의 섭리에 따라 계룡산의 운이 도래하여 국운이 융성해지는 것이 마땅하건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압제 받는 백성들의 이를 가는 소리가 한반도 전체를 가득 채우게 된 연유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았다.

문제는 태극기의 도안(圖案)에 있었다. 인산이 그 당시 마음속에 떠올려 본 계룡산의 형국은 산태극수태극(山太極水太極)의 형국을 여실히 갖추고 있었고, 그것은 하늘의 은하계가 이루고 있는 태극에 감응하여 수정(水精)을 좌우하는 북극성과 화기(火氣)를 좌우하는 남극성으로부터 수화(水火)의 정기를 모두 받아 이루어졌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대길지(大吉地)임이 확실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이란 말인가? 건남곤북(乾南坤北)하고 이동감서(離東坎西)하니…….’

인산은 자신의 영안에 비친 계룡산의 주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태극기의 형상 도안은 누구인가가 계룡산 위에 앉아서 그린 것처럼 완전하였으나, 천려일실(千慮一失)로 그가 태극의 색깔을 잘못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계룡’이라는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최소한 금계포란(金鷄抱卵) 형국의 서대궐 무성(武城) 5백년에 비룡농주(飛龍弄珠) 형국의 동대궐 유성(儒城) 4백년, 도합 9백년의 대운인데 태극기의 색깔을 잘못 쓰는 바람에 긴 세월의 국난을 겪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오랜 세월 동안 민족적인 고초를 겪어야 할 것으로 예견되자 인산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 얘기할 수 있으며, 또 얘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어 그냥 마음속에 접어두었었다. 그렇게 입을 다무는 것은 인산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익혀온 습관이었다. 유풍(儒風)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우리 사회에서 웃어른에게 따지고 든다든가 말대꾸를 하다가는 ‘버릇없는 놈’이라는 소리를 듣기가 십상이었고, 그것은 곧 부모를 비롯한 조상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함구(緘口)를 해왔던 것이다.

‘말을 못하고 넘어가는 것은 내 평생에 이어질 일…… 나는 그렇게 불운에 살다가 죽을 사람 아니던가.’

인산은 천황봉 위에서 아직 나이 40이 되기 전인데도 불구하고 벌써 희끗희끗해지기 시작한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지난날의 생각을 떠올리며 그때 영안으로 보았던 계룡산의 지세를 계속 살펴보았다. 먼저 위왕산(衛王山)과 구봉산(九峯山) 등이 구궁(九宮)의 자리에 있고, 장군봉(將軍峯)ㆍ육인봉(六人峯)ㆍ연천봉(連天峯)ㆍ쌀개봉 등이 영락없는 팔괘(八卦) 형으로 나열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면 그렇지 이런 대길지에 결함이 있을 리 만무일 터…….’

인산은 그렇게 생각하며 동서남북의 네 방위를 재차 살펴보았다. 동쪽으로는 동문달의 역적봉이 자리한 뒤로 지맥이 뚝 끊어진 듯 평지가 되었다가 다시 이어지니 이허중(離虛中)이고, 서쪽은 서문달과 멘재가 있는 쪽으로 국사봉하고 천황봉이 한일자로 이어지므로 감중련(坎中連)이다. 북쪽은 이 땅의 머리산인 백두산 쪽으로 어느 곳이나 허리가 잘리듯 끊어져 있으므로 곤삼절(坤三絶)이요, 남쪽은 계룡산이 회룡고조(回龍顧祖, 지리산까지 뻗어 내려간 백두대간의 맥이 다시 북으로 3백 리를 거슬러 올라간 곳에 솟아오른 계룡산이 할아버지 되는 지리산을 되돌아 우러러보는 형국을 이름)하는 지리산(智異山)까지 대둔산(大芚山)ㆍ덕유산(德裕山)과 이어지므로 건삼련(乾三連)이다.

다시 말해서 이허중ㆍ감중련ㆍ곤삼절ㆍ건삼련이 완전무결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태극기의 모양과 그대로 일치하였다. 태극기의 도안 자체는 그 자리에 와서 확인해 보나마나 한 일이었지만, 태극의 색깔을 잘못 사용한 점에 대해서는 통탄을 금치 못할 일임을 재삼 느낀 인산은 언젠가 태극기를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하산을 하였다. 인산이 태극기의 색깔에 중대한 잘못이 있다고 여겨 온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서북(西北)은 금생수(金生水)로 흑색이라야 하고, 동남(東南)은 목생화(木生火)로서 홍색이라야 한다. 그런데 태극기에서는 서북과 동남을 구분해 놓지 않고 단순히 남과 북에만 치우친 구분을 해 놓았을 뿐이며, 흑색 대신에 홍색을, 홍색 대신에 청색을 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수화상극(水火相剋)을 불러일으켜 나라 전체가 큰 환란이 겪으며 잘못되어 왔던 것이다.

‘국운을 가로막는 국가의 상징이라니! 지나간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 혹은 눈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도 않게 이 강토와 이 백성을 덮치는 환란들을 어찌할 것인가?’

하지만 인산은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말해 보았자 조상만 욕되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여전하였기 때문이었다.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채 지도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 반목하고 데모하고 사람 죽이는 게 일인 사람들, 민족 분열을 일삼으며 어부지리(漁父之利)를 획책하는 사람들이 인산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리도 없었다.

‘지구의 태극산인 계룡산을 눈앞에 두고도 태극기 도안에 홍색을 서쪽에 쓰다니……. 내 죽기 전에 깨끗이 마무리해야 할 일이 또 한 가지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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