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53] 민족 최대 비극의 날을 앞두고

한국전쟁 당시 사진. 

민족 비극의 시작을 잉태한 경인년의 첫 태양이 여느 해와 다름없이 밝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충남 논산군 은진면으로 내려와 살던 최영호 선생이 백암동에 걸음을 하였다. 인산은 환자를 보다 말고 반갑게 최영호 선생을 맞아들였다.

“어쩐 일로 선생님께서 이 외진 곳까지 친히 왕림을 하셨습니까? 다시 뵈오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만…….”

“인산, 어찌 지내셨소? 그래, 흙속에 묻혀 지내니 신간은 편할지 모르겠으나 그 지혜와 재주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소? 세상이 인산을 알아주지 않음을 기정사실로 삼을 것이 아니라, 세상 밖에 나가 큰소리로 외쳐 인산의 지혜가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계기를 찾았으면 좋으련만…….”

이승만 박사와 의형제 간이기도 한 최영호 선생은 진즉부터 이명룡 선생과 함께 인산의 신통한 의술과 지혜를 국민 보건사업에 활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애를 썼던 분이다. 인산과 이승만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한 것도 그 두 선생이었으며, 인산이 국가질병관리위원회에 참석했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때에도 누구보다 안타깝게 생각한 사람들도 그 두 분의 선생이었다. 최영호 선생은 품속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인산에게 건넸다. 서울에 있는 백성욱 박사가 보낸 서신이었다.

“제번(除煩)하고, 인산 선생의 소식을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이제야 서신을 띄우게 되었소. 연전에 의논하였던 경인(庚寅) 5월(음력)의 위난과 관련하여 긴히 상의하고, 인산의 지혜를 구하고 싶소. 시간은 걷잡을 수 없고, 나라 살림을 맡은 이들의 눈은 아직 뜨이지 않았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지 당황스럽소이다. 가능하다면 만사 젖혀두시고 상경하여 한 지혜 주시기를 부탁하오. 학수고대하겠소.여불비례(餘不備禮). 내무장관 백성욱(白性郁) 배(拜)”

백성욱 박사는 송운 방주혁 선생에게 문의하여 은진에 사는 백기준(白基俊) 선생에게 연락하면 그 인근에 사는 최영호 선생을 통하여 인산과 닿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 경로를 통해 인산에게 서신을 보낸 것이었다.

백기준 선생은 1920년 민국독립단 총무부장으로 활동한 이래 광복군 참리부 참사(參事)와 상해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면서 조국 광복의 주춧돌 역할을 하였던 애국지사였다. 특히 문장과 필치가 뛰어나 이광수(李光洙)ㆍ주요한(朱耀翰)ㆍ김승학(金承學) 선생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 발간에도 깊이 참여한 바 있다.

아무튼 백성욱 박사는 방송운 선생의 형인 방 도인이 자기 사후의 세계에 남을 지혜의 인물로서 인산과 더불어 손꼽은 인물이었음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인편에 인산에게 서신을 보낸 그 당시에는 어느덧 내무장관으로 봉직할 때였다.

인산은 그런 그와 이전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의 앞날에 대한 논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미군정 시절이었고, 그 다음에는 정부수립 직후였다. 그 두 번째의 요담(要談) 시에 백 박사는 ‘경인년에 닥쳐올 민족의 비극’에 대해서 운을 떼었었다.

백 박사는 그 스스로가 추수(推數)에 밝아서 앞으로 닥쳐올 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에 손 보살이라고 귀신 들린 무당이 있는데 그녀 역시 백 백사의 예견을 뒷받침하여 “틀림없이 경인년 5월에 난리가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인산은 그 손 보살이라는 무당을 ‘미치광이’쯤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녀의 앞날에 대한 예지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고, 인산 자신이 짚어보아도 경인년의 그 일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때 그 대처 방법에 대해 백 박사와 함께 논의했었다. 이북의 김일성이 군사적 도발을 감행할 것인데, 그것을 기화로 삼아 도리어 남측에서 치고 올라가 남북통일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그날의 논의 주제였었다.

그때 백 박사는 미군의 전투 장비들을 충분히 이양 받아 대비하고 있다가 이북의 남침 시에 반격을 가하는 쪽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었다. 인산은 미군의 전투 장비를 이양 받겠다는 생각은 현명한 판단이라는 전제 아래, 그들의 남침을 되받아 침으로써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묘책에 대해서는 백 박사가 입각(入閣) 한 이후에 다시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정도에서 얘기를 마쳤었다. 그 무렵 세간에는 백 백사의 내무장관 입각 하마평(下馬評)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년여 흐른 지금, 백 박사는 내무장관에 취임한 뒤 곧바로 인산의 소재를 수소문하여 만나자는 서신을 보내온 것이다. 아마도 백 박사로서는 코앞으로 다가온 민족사 최대의 비극에 어떻게든 대처할 방법을 미리 강구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산은 상경하여 을지로 1가에 위치한 내무부 청사 내의 장관실에서 백성욱 박사와 대좌하였다.

“인산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 대하니 이제 비로소 힘이 생기는 것 같소. 내 그동안 누구와 의논할 수도 없고 해서 가슴앓이가 자심(滋甚)했었다오.”

백 박사는 백년지기라도 만난 듯 반갑게 인산을 맞아주었다. 나이로는 인산보다 12살 위인 그였지만, 기대고 의지하는 듯한 마음 자세에서는 오히려 인산이 그를 감싸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입각하셨다는 소식은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만, 축하 인사도 변변히 드리지 못했습니다. 너그러이 보아주십시오.”

인산의 인사에 백 박사는 손사래를 치며 펄쩍 뛰었다.

“지금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서 있는 중대 시점인데 축하고 뭐고가 다 무슨 소용이겠소? 그나저나 인산이 이렇게 불원천리하고 와주셨으니 그게 고마울 뿐이고…… 우리 지난번에 하던 얘기를 마저 하도록 합시다.”

백 박사는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는 방 안을 한번 휘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금년 5월…… 앞으로 넉 달 뒤에는 우리의 힘만으로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민족적 재난이 닥칠 것이오. 지난달에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우리 한반도를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시킨다는 선언을 하지 않았소? 아마도 김일성은 그것을 남침의 호기(好機)로 삼으려 할 것이오.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남침해 올 것이 분명한 사실인 만큼, 그것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고난만을 겪어온 우리 민족이 새롭게 웅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야 된다고 보고 있소.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재난의 기회를 타고 넘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나갈 수 있을는지 인산의 고견을 들려주시오.”

“일개 나무꾼에 지나지 않는 저에게 국가의 중대사를 물어주시니……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전략 수립의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제 생각을 받아들여 줄지 의문입니다. 아무튼…… 연전에 말씀하신 대로 미군의 전투 장비를 이양 받는 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저도 만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만, 적과 거리를 두고 싸우게 되어 있는 요즘의 전쟁에서는 무엇보다도 무기의 성능이 승패를 가름하는 척도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나마나 현재 우리 국군이 보유한 무기라야 2차대전 때 미군이 사용하던 재래식 무기가 태반일 것이니……. 하지만 육상 전투 장비만 가지고는 역공(逆攻)의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화력이 우수한 전투기나 폭격기 등의 공군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적의 주력 화기를 깨부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의 뒤에는 소련이 있습니다. 북한이 자체적으로 개발하거나 보유한 무기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들이 남침을 감행한다면 필경 소련으로부터 막강한 화기를 지원 받아 가지고 내려올 것입니다. 소련에는 2차대전 시 독일의 탱크부대를 궤멸시킨 우수한 탱크들이 있습니다. 저들이 그걸 앞세우고 내려온다면 우리로서는 초전(初戰)부터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될 터이니, 그때 미 공군이 현재 보유한 비행기들을 사전에 들여놓았다가 그것들을 깨부숴야만 합니다. 그 시기를 놓치면 우리는 역공은커녕 고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인산의 의견은 북한의 남침 시에 미 공군의 주력기를 활용하여 초전에 저들이 앞세우고 내려올 탱크를 격파해야 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는 우리가 역공세를 취하여 북진할 수 있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라는 것도 덧붙여 피력하였다.

“옳으신 말씀이오, 인산. 하지만 미 공군의 주력기는 2차대전 당시에 쓰던 P-38ㆍ P-51 같은 전투ㆍ전폭기에다 B-29 같은 폭격기 정도일 텐데 그런 것 가지고 소련제 탱크를 이겨낼 수 있을지 의문이오. 2차대전이 끝난 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미 공군력이 얼마나 증강되었을지…….”

백 박사는 전쟁 전문가가 아니었기에 아무래도 인산이 제시한 의견에 현실성 있는 대안을 생각해 낼 수는 없었다. 인산은 다소 답답하다는 느낌을 가지며 말했다.

“2차대전 때에는 그런 비행기들의 활약이 컸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런 것만 가지고는 곤란합니다. 하지만 이미 세계의 패권국으로 우뚝 선 미국이 2차대전에서 승리한 후 팔짱만 끼고 있었을 리 없습니다. 분명히 가볍고 빠르며 성능 좋은 비행기들이 벌써 개발되어 있을 것입니다. 혹 알아보실 데가 있으시면 알아보십시오.”

백 박사는 인산의 말에 따라 전화의 수화기를 들더니 국방부 정훈국 장교로 있는 친구의 아들에게 현재 미 공군의 주력 전투기와 전폭기에 대해서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잠시 후 그 장교로부터 답신 전화가 걸려왔다. 인산의 말대로 미 공군은 이미 머스탱(F-51) 같은 프로펠러 전투기 외에도 세이버(F-86, 일명 쌕쌕이) 같은 제트 전폭기도 새로 개발해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태평양 상에 떠 있는 미 제7함대 항공모함에서는 새로 개발한 전폭기의 성능 테스트를 겸한 훈련이 행해지고 있다고 알려왔다. 폭격기로는 무려 4천 파운드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는 것까지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인산의 세상 내다보는 안목은 틀림이 없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미 공군의 그런 비행기들을 들여올 수가 있겠소? 내가 국방장관은 아니지만 국무위원으로서 대통령 각하께 건의 드려 추진한다면 안 될 것도 없지 않을 테니까, 한 지혜를 가르쳐주시오.”

운룡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듯 막힘없이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아마도 스탈린이나 김일성은 우리가 새로 개발된 미국의 전투기들을 들여놓을 것이라는 건 계산에 넣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그 비행기들만 들여올 수 있다면 우리는 저들이 기습적으로 남침해 온다고 하더라도 저들의 허를 찔러 능히 대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선을 제압하여 북진이 가능할 것입니다. 대통령께 건의를 하시려면 우선 미군이 훈련에 사용한 비행기 중의 몇 대를 창설한 지 얼마 안 되는 우리 공군의 훈련용으로 제공 받을 것을 말씀하셔야 합니다. 미국이 극동 방위선에서 우리 한반도를 제외시켰다고는 하지만, 한반도가 차지하는 지정학적 위치로 볼 때 미국이 결코 순순히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을 내세운다면, 미국 측에서도 우리의 요구를 무작정 거부하지는 못하리라고 봅니다. 그렇게 해서 처음에 몇 대를 들여놓으면, 다시 몇 대를 추가로 들여오는 것은 훨씬 용이해질 것입니다. 최소한 2개 편대 구성이 가능할 정도의 비행기를 보유하게 되면 충분히 초전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며, 미 공군이 직접 참전할 때까지는 우리 힘으로 적들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생각 같아서는 처음에는 전방의 우리 국군들로 하여금 의도적인 후퇴를 하도록 하여 적들을 3ㆍ8선 이남으로 유인한 뒤에 전폭기들을 출격시켜 타격함으로써 적들의 남침을 세계만방에 알리고, 북진의 명분도 얻는 전략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 되면 자연적으로 국제연합군의 지원이 뒤따르게 될 것이고, 우리 아군은 손쉽게 승기를 잡아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변수도 있습니다. 아군이 북진을 거듭하여 적들이 수세에 몰리면 필경 중국 공산군이 개입하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따라서 북진을 거듭한다 하더라도 평양 탈환 시점에서 일단 진격을 멈추고 기다렸다가 중공군이 압록강을 완전히 건너 내려올 때 폭격으로 궤멸시키면, 후속 부대의 지원 의지를 꺾어 마침내 통일을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 박사는 입을 벌린 채 인산이 개진하는 전략을 듣고 있었다. 일찍이 방 도인이 임종할 적에 인산을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 같은 인물’이라고 표현하였다는 얘기를 그 아우인 송운 방주혁 선생에게 들은 바 있지만, 장차 일어날 전쟁에 대해 그 시종(始終)을 그처럼 일목요연하게 들여다보며 전략을 피력하는 모습 앞에서는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인산은 백 박사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더 덧붙여 말했다.

“아마도 시간이 빠듯할 겁니다. 지금부터 서두른다 해도 초여름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워낙 얼마 남지 않은 탓에……. 하지만 손을 놓고 있다가는 수많은 인명이 희생될 것이며, 국토는 갈가리 찢길 것입니다. 대통령께 건의를 하신다고 하였지만, 과연 그 건의가 받아들여질지는 아무래도 의문입니다. 물으셨기에 소신껏 말씀드리기는 했으나, 우매한 인간들이 좌지우지하는 세상이라 걱정이 됩니다. 자칫 쓸데없는 소리를 한다고 핀잔이나 듣지 않으셨으면…… 특히 프란체스카(이승만 대통령의 부인)에게 변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인산은 백 박사에게 작별을 고하고 백암동으로 돌아왔다. 일어나게 되어 있는 전쟁, 그것도 동족끼리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그 전쟁을 눈앞에 두고 이왕에 일어날 전쟁이라면 보다 피를 덜 흘리고 이기는 전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소신껏 전략을 개진했지만, 그것에 대한 결정권자의 지혜가 어디까지 닿아 있을지는 인산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백 박사는 김일성의 공산군이 남침해 올 것이라는 사실과 그에 대한 대비책으로 인산이 말한 전략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진언하여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했지만, 그의 뜻대로 이루어질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인산은 백 박사가 보낸 지프차를 타고 다시 상경하여 백 박사와 재회하였다. 우려했던 대로 백 박사의 얼굴에는 짙은 먹구름이 깔려 있었다.

“인산의 지혜 속에 담긴 신비한 비밀은 한이 없소이다. 먼젓번에 프란체스카한테 변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까지 한 말씀…… 그 근거가 무엇이오?”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 프란체스카

백 박사는 인산에게 다짐한 대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미구(未久)에 있을 북한의 남침에 대한 진언을 했으나, “일고의 가치도 없는 흰소리를 한다”고 면박을 당하고 말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알았는데, 인산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것까지 내다볼 수 있었는지, 그것을 묻는 것이었다.

“학설에는 밝아 박사이신 분이 어찌 세상일에는 그리도 어두우신지 모르겠군요. 프란체스카가 볼 때에 핵무기로 세계대전을 종식시킨 미국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나라일 것이고, 핵보유국인 미국의 후원을 받는 한국을 어느 누가 감히 침략할 수 있느냐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프란체스카의 눈에 우리 한국인은 그저 미개한 족속으로 보일 터이니, 국무위원의 말이라 하더라도 어리석은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치부하고 내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 대통령으로서는 프란체스카의 말을 옳다고 받아들일지언정 백 박사님의 말을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요. 우리가 함께 논의했던 일은 이제 물거품이 된 것이고, 수십만의 우리 민족이 희생당할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3년 동안은 하늘도 우리를 돕지 않을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면, 신도 우리를 돕지 않습니다.”

인산은 말을 이어가는 동안 몹시 허탈한 심정이 되었고, 마침내 스스로에게라도 하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시기가 지나고 다음에 더 큰 환란이 이 땅을 뒤덮을지라도…… 나는 비록 죽지 않고 그때까지 살고 있을지라도…… 나는 말을 못하고 속으로만 가슴 아픈 세상을 살다가 죽을 사람이므로…… 그걸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나는 이제 할 말이 없습니다. 언제까지고 조용히 살다가 갈 뿐입니다. 이 민족이 죽어가면서도 내 도움을 못 받으니, 내가 온 게 허사로군요.”

그 순간 인산의 뇌리에는 잘못된 태극기의 도안이 아프게 스쳐갔다.

백암동 거처로 다시 내려온 인산은 내심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귓전을 울리는 포성과 수많은 사람들이 아비규환을 이루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질병에 걸려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이 세상에 온 자신이, 멀쩡한 사람들이 살상되는 전쟁을 목도(目睹)해야 한다는 역설적(逆說的) 현실을 어떻게 감내할지 가슴이 답답했다.

산촌의 해는 짧기만 하다. 어느새 하루해가 저물며 오른편 산등성이 너머에서 시작된 붉은 노을빛이 하늘 한가운데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손수 닦아 조성해 놓은 작은 마당에서 서성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인산의 눈에 그 노을빛을 가르며 줄지어 날아가는 철새의 무리가 들어왔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문구가 있었다.

백호주남팔금산(白虎走南八金山)-백호(白虎)에 남쪽 팔금산으로 갈지어다.

백양목무아지시(白楊木無芽之時)-백양나무 움트기 전에 때를 찾으라.

청괴엽만정지월(靑槐葉滿庭之月)-홰나무 푸른 잎이 뜰 안에 가득한 달이면

청구삼년비명고(靑丘三年悲鳴高)-이 땅에 3년간 사람들 슬픈 울음소리 높으리 라.

백호는 60간지(干支)로 따져 경인년(庚寅年)을 뜻하고, 팔금산이란 부산(釜山)의 파자(破字)에 해당된다. 백양나무 움트기 전이라면 음력 정이월을 가리키고, 홰나무 푸른 잎이 뜰 안에 가득한 달은 음력 5월경의 초여름을 말한다. 그리고 청구(靑丘)는 옛날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부르던 이름이니, 이를 한마디로 풀이하면 “경인년 5월부터 3년간 이 땅에 큰 환란이 일어나니, 그 이전에 부산으로 피신하라”는 뜻이었다.

그 며칠 후에 인산은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恩津面)에 있는 반야산(般若山) 관촉사(灌燭寺)의 미륵보살입상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더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홀로 부산으로 떠났다. 그때가 음력으로 3월경이었다. 아내는 백암동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아버지 경삼 옹을 봉양하기 위해서 동행할 수가 없었다. “세상이 시끄러워지고 이곳에 계시기 어려울 때에는 공주에 가 계시라”는 당부를 아버지에게 남긴 뒤, 부산으로 내려간 인산은 동광동에 ‘세춘(世春) 한의원’을 개설하였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