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59] 함양의 독존자, 주변에선 ‘도인’이라 불러
아내 장영옥과 장남(윤우), 차남(윤세)을 데리고 함양에 도착한 인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도인’이라고 알려지는 바람에 그곳 유지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었다. 딴에는 그들 모두 신선사상이라든가 도의 세계에 대한 짙은 동경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이 먼저 ‘도인’인 인산과 교분을 나누며 지내고 싶어했던 것이다.
서부 경남에서 ‘정약국’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약국을 운영하는 정태진(鄭泰振)이라든가, 함양 양조장 주인 노영인, 함양군 교육감 정연섭, 유림면장 허사원, 휴천 양조장 주인 허문달, 함양 갑부 하한조를 비롯하여 정낙현, 윤일병, 정연창, 민영조 등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그들이 객지에서 흘러들어온 인산을 ‘도인’이라고 생각하게 된 데에는 윤일병이 개입된 연유가 있었다.
그는 한두 해 전까지 도를 닦는답시고 계룡산에서 산(山) 공부를 하며 지내다가 신선이 되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하산하여 함양에 와서 살고 있던 사람인데, 기회만 있으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도인은 인산이라는 분’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산을 만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서 누구한테 인산의 이름과 그 인물의 비범함에 대해 얻어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그가 하도 그러고 다니는 바람에 사람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막연한 상상을 키우며 어떻게 한 번이라도 김인산이라는 사람을 만나볼 기회가 없을까 생각해 왔다. 그들 중 몇몇은 어디에 용한 사주ㆍ관상쟁이가 있다거나 묏자리를 잘 잡아주는 지관이 있다는 소리만 들어도 행여나 그 사람이 진정한 도인이 아닌가 하여 찾아갈 정도였다. 그러던 차에 인산이 제 발로 함양 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딸린 가족들도 계시니, 우선 저희 집 사랑채에서라도 지내시면서 차츰 자리를 잡도록 하시지요.”
정약국의 정태진은 그렇게 말하며 인산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딱히 살 곳을 정해 놓고 온 것도 아니었기에 인산은 그의 말대로 따랐다. 그들과 어울리며 연일 술에 젖어 사는 나날들이 흘러갔다. 함양의 유지들은 인산이 정말로 ‘도인’이어서 자기들에게도 그 ‘도’라는 것의 끄트머리 정도는 알게 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인산은 그런 그들의 기대를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날더러 도인이냐고 물으셨소? 나는 도인이 아니오. 도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그러셨소? 그건 알아서 뭣에 쓰려고? 그럴 정성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각자의 생업에 충실하여 가족들과 오순도순 잘 살아가라고 권하고 싶소. 그게 도요. 도라는 게 별것인 줄 아시오?”
그런데도 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인산을 불렀다. 하지만 인산은 긴 세월 동안 독존자(獨尊者)로서 독존(獨存)하다시피 살아왔기에 타인과 쉽게 융합하거나 타협하지 못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성격을 ‘괴팍하다’고 표현한다. 거기에다 그의 빈틈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두뇌의 판단은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늘상 낙제점의 성적표를 내놓기 일쑤였다. 그 성적표란 ‘독설’의 형태를 띠기 마련이다. 상대방의 지위나 연령 여하를 막론하고, 상대방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기의 생각대로 말을 쏟아내었다.
“거, 허 사장은 이제 보니 아주 대단한 머리를 가졌구려. 그 머리가 그리도 단단하니 거기에다 대고 천하제일의 묘법(妙法)을 말해 준다 하더라도 어디 씨알이나 먹혀들겠소? 그러니 그 돌대가리로는 뭘 더 알려고 하지 말고, 그 속에 잔뜩 들어 있는 쓰레기를 어떻게 비워낼지 그 궁리나 하는 게 옳을 것이오.”
인산의 입에서 그런 정도의 말이 나오면 술자리 특유의 취기와 농담 분위기 덕택에 껄껄 웃고 넘어가는 축도 있기는 하지만, 대개는 무안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게 일반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인산을 자기들 동아리에서 내치지 못하는 것은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그의 내면세계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따금씩 던지는 그의 이야기 속에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희귀한 ‘진리’가 보석처럼 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틈틈이 함양군 내에서 행세깨나 한다는 사람에서부터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오래 묵은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간단한 처방을 일러주어 낫게 하기도 하였고, 간곡한 청에 따라 묏자리를 잡아주기도 했으며, 농월정(弄月亭) 같은 산수 좋은 정자에서 열리는 시회(詩會)에 나가 덧없는 음풍농월(吟風弄月)을 하기도 하면서 소일하는 동안에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워낙 돌출된 인물이다 보니 때로는 토박이들로부터 텃세를 받기도 했고, 근거 없는 중상모략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도 인산을 가리켜 ‘오랜 옛날부터 함양 고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속의 성자임에 틀림없다’고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어. ‘언젠가 이 세상에 위기가 닥치면 이 고을 백성들을 그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의로운 성자 한 분이 오실 것’이라고 말이야.”
“그런 얘기는 나도 들었네. 그분이 함양에 들어올 때에는 아주 가난한 모습으로, 보따리 하나만 달랑 들고 온다고 그랬지.”
“그게…… 저 대관림에 소나무가 생기고 곤충들이 서식하게 되면 그분이 오실 징조라지?”
“그러고 보면 김인산 선생이 우리 함양에 오신 시기하고 얼추 맞아떨어지지 않아? 해방 무렵부터 대관림에 소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니까…….”
“듣고 보니 보따리 얘기도 김인산 선생과 일치하는군 그래. 그 양반이 처자식을 데리고 집도 절도 없는 이곳에 올 때에는 조그만 보따리 하나만 가지고 왔다고 그러더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전해지는 얘기 속의 보따리라는 건 그 김인산 선생의 ‘지혜 보따리’를 일컫는 게 아닌가 싶어.”
“아따, 이 사람…… 막걸리 마시고 유식한 말씀도 잘하시네. 하하하.”
인산이 정태진네 사랑채에서 살다가 하한조 소유의 백연리 산정(山亭)으로 옮겨가 살 때였다. 하루는 정태진이 사람을 보내 곧바로 자기 집으로 와줄 것을 청하였다. 무심한 마음으로 정태진의 집으로 가보니, 안방에 교자상으로 한가득 음식을 차려놓고 인산을 맞아들이는 것이었다.
“오늘이 정 영감님 생신일이라도 됩니까?”
인산은 상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인사치레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올시다. 내 인산 선생께 긴히 의논드릴 말씀이 있어서 모신 것이올시다.”
정태진은 평소에 보이던 것보다 훨씬 더 삼가는 태도로 인산을 대했다. 인산의 코끝으로 정성들여 장만한 갖가지 음식 냄새와 더불어 입맛을 당기게 하는 전내기 냄새가 스며들었다. 인산은 ‘털어봐야 먼지밖에 나올 것 없는 내게 무엇을 가져가려고 이 영감이 이런 환대를 하누?’ 싶었지만, 먹고 마시라고 준비한 음식과 술이니 맛있게 먹어주는 것도 덕을 쌓는 일이라는 심산으로 배불리 먹고 거나하게 취하도록 마셨다.
이제인가 저제인가 하고 말할 기회를 엿보던 정태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인산 선생, 내 고민 한 가지 해결해 주셔야겠소.”
“원 별말씀을……. 아, 이 세상 복을 누구보다도 많이 누리시는 영감님께 고민은 무슨 고민이 있겠습니까? 그저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이 있겠지만……. 아무튼 말씀이나 해보시지요. 제 힘이 닿는다면 마다할 턱이 없을 테니까요.”
인산은 말한 대로 자신이 도와서 될 일이라면 돕겠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 꺼림칙해서……. 다른 게 아니라 재작년에 나의 선친을 이장(移葬)해 모신 일이 있는데, 그 묏자리가 아무래도……. 수고스럽겠지만 인산 선생이 그 묏자리를 한번 봐주시면 좋겠소.”
“하이고, 영감님도 참……. 그런 문제라면 뭘 망설이셨습니까? 진작 말씀을 해주셨어야지요. 뭐 시간을 따로 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지금 당장 가보십시다.”
인산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세를 졌다면 인산이 먼저 정태진에게 신세를 졌었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객지에서 몇 달 동안 처자식과 함께 누워 잘 수 있는 처소를 내주었던 사람이 정태진이다. 그런 사람을 위해서 지니고 있는 지혜의 한 끄트머리도 안 되는 것을 동원하여 묏자리를 잘 썼나 잘못 썼나 하는 것을 봐주는 정도야 열 번이라도 기꺼이 해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름난 지관을 모셔다가 잡은 자리인데, 인산 선생이 보기에는 어떨지……. 그저 본 대로, 있는 사실대로 얘기해 주시오.”
산소 앞에 이르자 정태진은 다시 한 번 인산에게 부탁하였다. 잠시 산소 주변의 지형을 살피고, 방향을 따져본 인산은 갑자기 혀를 차며 탄식을 했다.
“저런, 저런 몹쓸 놈이 있나. 대관절 무슨 억하심정에서 이런 못된 장난을 했는지…….”
인산의 얼굴은 몹시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본 정태진의 안색은 이미 새파랗게 시르죽어 가고 있었다.
“인산 선생, 뭐가 잘못되었소? 묏자리를 잘못 잡은 거요?”
“어허, 어째 이런 일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이 자리는 누가 보더라도 당대망지(當代亡地)이기 때문에 묘를 쓸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영감님 생존 시에 아들들이 모두 먼저 세상을 떠나 멸족(滅族)에 이르게 되는 살기 가득한 자리입니다. 아직 집안 내에 별 탈이 없다면 시급히 천묘(遷墓)를 해야 할 것이고, 이미 앙화(殃禍)를 겪으셨다 하더라도 조상을 이처럼 생기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곳에 모셔둘 수는 없는 터이니 서두르셔야 합니다.”
정태진은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 대에 이르러 이런 가혹한 시련이 닥치는지……. 조상님들을 무슨 면목으로 대할 것이며, 앞세운 자식들에게는 뭐라고 변명을 할 수가 있단 말이오? 아, 무섭고 무섭구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꼬? 물은 이미 엎질러졌으니…… 내 집안에 비운이 가득한 연유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애통 절통하구나.”
인산은 정태진을 부축하여 일으켰다. 정태진은 울음을 그치지 않은 채 인산에게 말했다.
“이 자리에 아버지를 모신 후 두 달 만에 둘째 아들이 지리산 쪽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공비들의 총에 맞아 죽었고, 지난해에는 셋째 아들마저 차에 치여 비명횡사 하였다오. 그런 모진 일을 겪으면서도 나는 조상을 원망하기만 했지 이 자리에 묘를 잘못 쓴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니, 이제 내가 죽어야 마땅하지 않겠소? 인산 선생, 이를 어쩌면 좋소, 응?”
죽은 영혼도 편안한 자리에 안치될 때 자손에게 음덕(蔭德)을 베풀며, 불편한 자리에 영원토록 버려졌다고 여겨질 경우에는 자손들에게 빨리 자기를 편안한 자리로 옮겨 달라고 신호(재앙)를 보내는 것인데, 보통 사람들은 그 신호를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정태진의 경우가 그랬으나, 뒤늦게라도 인산에 의해 그 신호의 의미를 알았으니 그에 대처를 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인산으로서는 어떻게 명지관이라는 사람이 그 자리를 지목하여 산소를 쓰게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태진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를 지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며 그 자리를 천거한 지관에 대해서 인산이 물었을 때, 정태진은 대략 다음과 같은 사실이 있음을 고백하였다.
그러니까 정태진은 선친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이름 높은 지관인 그 사람을 집으로 초빙하여 식사 대접을 했던 일이 있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조상을 모시는 중대사였으므로 정태진으로서는 그 지관 대하기를 나라님 대하듯이 했다. 그런데 성찬(盛饌)을 앞에 두고 식사를 시작하면서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본 지관은 몹시 불쾌한 낯빛을 지으며 숟가락을 소리 나게 상 위에 놓았다.
“이런 몰상식한 집안이 있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관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당장이라도 정태진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 씩씩거리더니 방문을 열어젖히고 대청으로 나섰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영문을 묻고 자시고 할 새도 없었다. 정태진은 황급히 쫓아 나가 지관의 옷소매를 부여잡았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용서를 빌겠습니다. 부디 진정하시고 말씀을 해주십시오.”
정태진은 사뭇 애원을 하다시피 하여 지관을 다시 상 앞에 앉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까지도 지관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정태진은 자기 앞에 놓인 국그릇에서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맛을 보았다. 감칠 맛 도는, 더도 덜도 아닌 소고기 국 맛이었다.
그때 이상한 예감이 든 정태진은 지관의 국그릇에 담긴 국물의 맛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국물의 맛은 쓰고 비린 데다 입안에 역한 냄새까지 남기는 것 아닌가! 비로소 지관이 불쾌해 하는 까닭을 알게 된 정태진은 음식 준비를 한 며느리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 며느리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으로서 딴에는 교리(敎理)에 추호도 어긋남이 없기를 힘쓰는 개신교 신자였다. 때문에 미신(迷信)이라면 질색을 하였고, 명당이니 발복(發福)이니 하는 말은 귀에 담기조차 싫어했다. 조상의 묏자리를 잘 잡으면 집안이 잘된다는 생각 자체를 미신으로 간주한 그녀는 시아버지가 지관을 불러다 추진하려는 일을 훼방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사명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지관이 먹을 국은 썩은 고기로 따로 끓여 내놓았던 것이다.
정태진은 지관 앞에 고두사죄(叩頭謝罪)를 하고, 다시 상을 차려오게 하는 등 갖은 정성을 들여 그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애썼다. 그런 곡절을 겪은 연후에 그 산소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었다.
“천하에 몹쓸 인간 같으니라고. 차라리 끝까지 못하겠다고 버틸 일이지, 남의 집안을 망쳐놓으려고 작정을 하다니…….”
인산은 정태진을 얘기를 모두 듣고는 새삼 인간의 악함이 한계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릇 사람이 이 사회에서 무슨 일에 종사하게 되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야겠지만, 그보다 앞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야 함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이었다.
인산은 서둘러 무해무득(無害無得)한 묘터를 잡아 정태진의 선친 묘를 이장토록 했다.
“인산 선생, 이번 일로 정말 애쓰셨소. 내 그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리다.”
정태진은 거듭 감사의 듯을 표했다.
“원 영감님도……. 그동안 제가 진 신세의 일부를 갚은 셈인데요, 뭘…….”
나중에 들은 얘기이지만 정태진은 자신의 셋째 아들이 차에 치여 죽었을 때, 경찰서를 찾아가 사고를 낸 운전자를 석방해 줄 것을 요청했었다고 한다. 정태진이라는 사람은 그만치 심성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이런저런 일로 인산에 대한 소문은 함양군 내에 자자하였다. 못 고치는 병이 없는 천하의 명의인 데다, 지관이 아니면서도 관산(觀山) 능력에 있어서는 귀신도 돌아서게 만들 정도이고, 그 밖에 인간사와 관련된 모든 일에 막히는 구석이 없이 좔좔 읊어대는 그 앞에서는 누구라도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김인산 그 사람은 타인과 적당히 어울리거나 남의 말을 적당히 들어 넘기는 법 없이 언제나 신랄한 비판을 가하거나 꼿꼿한 자기주장을 내세웠으며,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