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63] 척추장애인 뜸으로 치료

“처음에는 뜸 불이 따끔거리는 정도로 느껴져 참을 만했지만, 뜸장이 커지자 견디기 힘든 고통이 뒤따랐다. 살이 타는 누린내가 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심장이 오그라들 듯 아파오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지금 여기서 뜸을 뜬 자리에 한 장 타는 시간이 5분 이상 되도록 봄 가을마다 계속 쑥뜸을 떠야 하네. 내 말을 믿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5년 안에 성한 몸을 되찾게 될 것이네.”(본문 중에서)


기적일까 신의 조화(造化)일까

박인순(가명)은 어렸을 때 감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한동안 앓은 뒤에 등뼈가 구부러진 척추 장애인이었다. 그 뒤로 ‘꼽추ㆍ곱사등이ㆍ병신’ 따위의 놀림을 받으며 자랐고, 나이 30이 넘었지만 바깥세상에 나가기조차 두려워하는 심약한 여성이었다. 결혼은 물론 하지 못했고, 이따금 들어오는 중신 자리는 하나같이 장애인 신랑감들이었다.

‘병신들끼리 짝을 맞춰 살라.’는 빈정거림으로 느껴져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내왔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붙들어 세울 자존심거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지지 않았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수모와 고통을 면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계획하기도 했다. 삶이란 게 그저 지긋지긋하고 힘들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녀가 ‘묘향산에서 내려온 도사’ 얘기를 이웃집 아낙네에게 들은 때는 신축년의 이른 봄이었다. 처음에는 제 아무리 도사님이라 한들 자신의 굽은 등을 펴줄 재간이 있겠나 싶어서 귓등으로 흘려들었건만,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나도록 왠지 그 도사님을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큰마음을 먹고 집을 나서서 주교동 방산시장 부근의 사탕공장을 찾아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잔일을 보는 사람인 듯한 젊은이에게 이름과 찾아온 사유를 간단히 적어 내놓고, 진료 순서를 기다리느라 가마니를 깔아놓은 마당을 가득 메운 다른 환자들 사이에 쪼그리고 앉았다. 오래 된 버릇대로 남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그녀의 눈길은 아래쪽을 향하고 있었다.

인산의 거처인 2층 건물의 대지는 그 앞에 꽤 널찍한 마당을 두고 있었는데, 연일 경향 각처에서 모여든 환자와 그 가족들로 붐볐다. 대부분 오랜 병고에 지칠 대로 지친 모습이 역력하였고, 환자 치다꺼리에 역시 피가 마르고 넋이 나간 표정의 사람들로서 그동안 어디든 용하다는 의원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찾아다니기를 거듭했던 사람들이었다.

찾아가는 곳마다 왜 그리도 많은 돈을 요구하는지, 몇 년 병치레를 하다보면 가세(家勢)는 거덜 나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실낱같은 삶에의 희망을 저버릴 수 없어서, 또 새로운 소문을 들으면 찾아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게 그들의 심정이었다.

“여기 계신 어른은 비싼 돈을 받고 약을 파는 것이 아니라, 집에 가서 어떻게 하라고 치료 방법을 일러주신대요. 그분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무슨 병이든지 고칠 수 있다는구먼.”
“그 얘기는 나도 들었어요. 소문에는 묘향산에서 20년 동안 수도하여 도통(道通)한 도사님이시래요.”
“도사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부처님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디다. 몸 아픈 사람들을 위해 시주도 별로 받지 않으시고 그저 병만 낫게 해주면 그걸로 기뻐하신다는데, 부처님이 아니라면 그럴 수 있겠어요?”
“아무튼 우리 아들 병이나 고쳤으면 소원이 없겠소. 소문대로만 해주신다면야 도사님이라면 어떻고 부처님이라면 또 어떻겠소?”

인순은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들었다.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이미 현실로 드러난 여러 가지 기적 같은 ‘병 고침’의 사례를 통하여 모두 김인산이라는 사람을 단순히 의술만 베푸는 보통 의사가 아니라 하늘이 내린 의신(醫神)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만 그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 자리에 와 있는 것 같았다.

‘과연 그분은 어떤 분일까? 인간의 능력으로 어떻게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을까? 그분은 정말로 신선 세계에서 내려온 분일까? 나의 굽은 등을 펴주실 수 있을까? 혹 병도 고치지 못하면서 환자들로부터 돈이나 챙기려는 사이비 의사는 아닐까?’
인순의 머릿속으로는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소리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 어깨 사이로 산처럼 불쑥 솟아오른 척추 뼈 때문에 목이 아예 없는 듯 파묻혀 버린 자신의 추한 모습에 수많은 시선들이 쏠리고 있다는 생각에 땅속으로 숨고 싶은 심정으로 진료실까지 걸어갔다.

‘아……!’
인순은 진료실에 들어서면서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목 안으로 삼켜야 했다. 방 안에 들어서는 자신을 향한 눈빛이 내뿜는 섬광 같은 기운에 순간적으로 압도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압도’는 불쾌하거나 벗어나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니라 왠지 성스러운 절대자를 대했을 때처럼 그녀를 알 수 없는 경외심으로 떨게 하는 것이었고, 아련하게 까닭 모를 반가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정녕 보통 사람하고는 확연히 다른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방금 전에 남의 말을 듣고 긴 수염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을 상상했었는데, 그렇지는 않다 하더라도 사물을 꿰뚫을 듯한 안광과 옥(玉) 같은 안색(顔色), 자비로움을 느끼게 하는 두 눈과 입의 긴 횡선(橫線), 커다란 귀 등은 전체적으로 마주한 사람을 저절로 부복(俯伏)시키는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인순은 법당에서 예불할 때의 격식으로 오체투지(五體投地)하여 절을 한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뭐라고 먼저 입을 뗄 용기가 나지 않아 무릎 위에 두 손을 얹은 채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인순이 적어낸 접수증을 살펴보던 인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고생이 많았겠군. 언제부터 그리 되었던가?”
인순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곱 살 때부터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는 일을 당하여서…….”

인산은 진맥을 한다든가 몸의 어디를 눌러본다든가 하지도 않고 대뜸 인순의 등을 펴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두고 말을 하였다.
“그렇지. 하루를 살더라도 성한 몸으로 남들 앞이 떳떳이 살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지. 자네가 결심을 하고…… 아주 독한 마음을 먹고 치료를 하면 그런 날을 볼 수 있어. 오늘 이곳을 잘 찾아온 게야.”

인순은 인산이 흡사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듯 따뜻한 어조로 해주는 말을 들으며 그동안의 온갖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부디 그렇게만 해주세요. 부디…… 소원입니다.”
인순은 울면서 말했다.
“아마도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될 거야. 그러나 등을 펴기 위해서라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 감내해야겠지. 어떤가, 내가 해보라는 대로 해볼 텐가?”
인산은 다시 한 번 자비로운 어조로 인순에게 성한 몸이 되기 위한 각오가 되어 있는지를 물었다.

“선생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불구를 고쳐 대명천지를 활보할 수만 있다면 화염지옥의 고통인들 마다하겠습니까? 가르쳐주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부디 이 병신을 벗을 수 있게 해주세요.”

인순의 두 눈에서는 끝 모를 눈물이 샘처럼 솟아나왔다.
“그렇다면 되었네. 내 방법을 일러줄 터이니 추호도 물러서지 말고 실행해야 하네. 자, 여기에 잠시 누워보게.”
인산은 인순이 눕기 편하게 베개와 방석을 머리와 등허리 밑에 괴어주었다. 인순은 서럽게 울던 끝이라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눈을 감았다. 인산은 인순의 웃옷을 위로 치켜 올리고 아래옷은 밑으로 끌어내리게 하여 인순의 복부를 드러내도록 한 다음, 배꼽 위ㆍ아래에 각각 뜸쑥을 올려놓고 불을 붙였다. 처음에는 쌀알 크기의 뜸장이었는데, 다섯 장째부터는 토종 밤톨만한 크기로 뜸장의 크기가 달라졌다. 그렇게 모두 아홉 장의 뜸을 떴다. 인산은 붓으로 인순의 복부에 쌓인 재를 쓸어낸 뒤 인순을 일어나도록 했다.

인순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난생 처음 접해 보는 뜸 치료였다. 처음에는 뜸 불이 따끔거리는 정도로 느껴져 참을 만했지만, 뜸장이 커지자 견디기 힘든 고통이 뒤따랐다. 살이 타는 누린내가 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심장이 오그라들 듯 아파오고 전신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지금 여기서 뜸을 뜬 자리에 한 장 타는 시간이 5분 이상 되도록 봄 가을마다 계속 쑥뜸을 떠야 하네. 내 말을 믿고 열심히 하기만 하면 5년 안에 성한 몸을 되찾게 될 것이네.” 인산은 뜸장의 적당한 크기를 직접 뭉쳐 보여주며 뜸 치료를 하는 동안의 주의사항을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집으로 돌아온 인순은 죽기를 각오하고 인산이 일러준 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봄 가을마다 자가(自家) 뜸 치료를 하였다. 성한 몸이 되기를 갈망하는 여인의 그 한 맺힌 용맹 정진은 3년 만에 효과를 드러내기 시작하여 뜸 치료를 시작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완전한 정상인의 몸을 갖게 해주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인순이 행한 뜸 치료가 그녀의 굽었던 척추만을 펴준 것이 아니라 여타의 다른 장기의 건강 상태까지도 최상으로 만들어주는 부가 효과까지 나타내었으니, 그녀는 매우 건강한 여성으로서 활기찬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1966년 가을 무렵,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충무로에서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던 인산을 찾아온 여인은 바로 그 박인순이었다. “선생님 덕분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그녀는 인산을 처음 만났을 때 올렸던 오체투지의 절을 다시 한 번 올리며, 이번에는 환희로 넘쳐나는 눈물을 흘렸다. 옅은 화장을 한 그녀의 얼굴은 화장 빛이 아니었더라도 영락없는 복사꽃 빛이었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었다.

“미국에 사시는 이모님의 중매로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음 달에 미국으로 가게 되었어요. 앞으로 선생님을 다시 뵈올 날이 있게 될지는 모르지만, 평생토록 제 가슴속에 선생님을 제 아버님으로 모시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겠어요.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분이시니까요.”

인산이 척추 장애자 박인순에게 일러준 뜸자리는 중완혈(中腕穴)과 관원혈(關元穴, 도가에서는 ‘丹田’이라고 칭함)이다. 정중선(正中線) 상에서 배꼽의 위쪽으로 4횡지(橫指) 지점이 중완혈이고, 배꼽 아래 3횡지 지점이 관원혈이다.

인산은 난치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 약을 쓸 만한 경제적 여건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더러 약 처방을 알려주기도 하였지만, 대개는 중완과 관원에 쑥뜸을 뜨는 것을 치료의 제1 원칙으로 삼았다. 혹자는 병의 종류와 무관하게 그 두 혈에 치중하는 치료 방법에 대해 의아심을 가질는지도 모르지만, 인산은 그 두 혈이야말로 우주의 자연적 기운을 인체 내에 받아들여 건강 상태를 이루는 핵심 혈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 두 혈에 쑥뜸을 뜬 연후에 나머지 부수되는 치료를 추가하는 것이 치료의 효과를 극대화시킨다는 점은 인산을 통해 질병을 고치고 각종 신체장애를 벗어난 수많은 환자들이 있어 현실로 증명되고 있다. 또한 쑥뜸은 그 자체가 일반 약보다 신속하고도 확실한 효과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아주 약소한 비용만 소요되는 데다 환자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자기의 질병을 치료한다는 점에서도 최상의 치료 요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수많은 ‘명의(名醫)’가 명멸하였지만, 그들이 남긴 의료방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명무실해지거나 효용 가치가 떨어지는 예가 많다. 또 종교적으로 추앙받는 성인들이 불구자들을 고쳤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그것은 그 개인의 권능으로 행한 결과일 뿐 후세 사람들이 동일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전해지는 방법은 전혀 없다.

당사자가 세상을 떠나면 유명무실해지거나 시대의 변천에 따라 효용 가치가 없어지는 의료방이라면 ‘의학적 지혜’라고 부를 수가 없다.

그래서 인산은 기존의 의서들을 ‘쓰레기’라고 지칭하며 ‘깨끗이 쓸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불구(不具)에 의한 신체장애는 그렇다 하더라도, 여타의 질병의 경우에는 원리만 알면 쉽고도 간단하게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불구하고 ‘과학’이라는 미명 하에, ‘첨단’이라는 장식(裝飾)으로 치장된 의료술이라 하여 병든 신체 부위를 잘라내는 등 무지막지한 행위로 환자를 결국 죽음에 몰아넣는 일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다.

아무튼 인산이 척추 장애자 박인순에게 뜸자리를 잡아 일러주던 1961년 그 무렵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난치병 환자와 신체장애자들이 인산을 찾아와 뜸 치료로써 소원을 이루었으니, 그것을 단지 기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신(神)의 조화로 해석해야 할지 당사자들도 모를 지경이었다. 

운룡이 의주에 살던 때 알고 지내던 보통학교 교장(대구 김씨)의 며느리라는 사람이 남편에게 업힌 채로 인산을 찾아왔다. 딸 이름이 미리(가명)였기에 ‘미리 엄마’라고 불린 그 여인은 하반신 장애인으로서 앉아 있을 수는 있어도 설 수는 없는, 속칭 앉은뱅이였다. 사연을 들어본즉, 처녀 시절에서부터 척수염을 앓았는데 결혼하여 출산을 한 뒤로 병세가 악화되어 허리가 굽고 하반신마저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미리 엄마 역시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인산이 일러준 대로 관원과 양쪽 족삼리(足三里) 혈에 쑥뜸을 떴다. 그리하여 뜸 치료를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나면서부터 허리가 펴지기 시작하더니 넉 달이 채 안 되었을 무렵에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에 희망을 얻은 미리 엄마는 3년 동안 계속 뜸 치료를 실행해 언제 그녀가 불구자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상을 회복하였다.

그해(1961년)의 여름 더위가 물러갈 무렵, 인산은 월남하여 어느 교회 장로 직분을 맡고 있던 박 아무개라는 사람의 자본으로 종로 5가에 위치한 양옥집을 하나 빌려 ‘시중(施衆)한의원’을 개업하였다. 박 장로는 의주군 피현면 출신으로 주교동 김 아무개와도 절친한 사이였고, 또 인산과 연배도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기에 고향 떠난 사람끼리 협력한다는 차원에서 동업하기로 결정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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