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김일훈 72] 세상을 구하기 위해 왔던 ‘큰 빛’

“인산은 평생토록 세상의 명리(名利)를 좇지 않았다…그는 천금(千金)을 내걸고 찾아온 환자라 하여도 특별히 대하지 않고, 오로지 한 사람의 환자로서만 대했다…그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온 큰 빛이었다”

1988년, 어느덧 인산의 나이 팔십 하나였다. 술을 통해서나마 무지한 현실을 망각하고 싶어했고 고통뿐인 지구를 한번 떠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인산의 육신도 어느 덧 기운이 다하여 쓰러지게 되었다. 인산이 드러눕자 그 해 정월에 결혼하고 서울에서 살던 3남 윤수의 처 최은아는 병수발을 위해 함양 인산의 오두막으로 내려와 살았다.

이듬해 3남 윤수는 직장인 민족문화추진회를 사직하고 아예 함양 용평리에 집을 구해 이사했고 3남의 집(神藥堂)으로 거처를 옮긴 인산은, 여전히 구름 떼처럼 밀려오는 환자들과 씨름하느라 영일(寧日)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자식들은 기력이 쇠잔해 가는 아버지를 염려하여 잠시만이라도 환자들을 상대하지 말고 편안하게 지낼 것을 건의하곤 했으나, 그때마다 인산은 한결같은 대답으로 일관했다.

“내 몸 편하자고 병고(病苦)를 안고 답답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거나 외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서 인산은 앉아 있을 기력조차 소진할 때까지 환자와의 상담을 중단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의 경우 건강을 과신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음으로써 병을 자초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성현(聖賢)들의 경우에는 세상 사람들의 고액(苦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편치 않았었다. ‘모든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는다’고 천명한 유마거사(維摩居士)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도 음미해 볼 만하다고 하겠다.

이즈음 머나먼 이국땅 해외 환자들까지 문의해 왔다. 미국에 있는 골수암 환자가 교포를 통해 처방을 부탁했다. Eastside Medical Center에 입원해 있는 38세 O형 흑인여성으로 말기 전신골수암인데 목, 등, 허벅지에 주먹 크기의 혹이 5~6개 있었고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환자는 온몸에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의사도 치료를 포기하고 병원에 입원해서 관리만 해주는 상황이었다. 인산은 늘 하듯이 유황오리 골수암처방에 죽염, 난담반캡슐과 사리장을 복용하도록 했다. 흑인환자로부터 돈을 받은 교포는 함양에 찾아와 직접 약을 달여서 미국 병원으로 가지고 갔다. 백인 주치의는 동양인이 가지고 온 허브액을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간단한 독성검사를 한 후 별다른 독이 검출되지 않아 입원해 있는 환자에게 먹도록 허락해 주었다. 어차피 자기들로서는 별다른 치료약이 없어 환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또한 동양의 약초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었기 때문에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 병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전통의학이라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반대하고 한국약초라면 독약 취급하는 한국 의사들은 이유 불문 무조건 차단했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사대사상이 심하여 자기 것은 멸시하는 경향이 컸다.

인산의 탕약을 먹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인여자의 몸에 멍든 것처럼 푸른 반점이 군데군데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급히 전화가 걸려왔다.

“선생님, 환자 몸에서 퍼렇게 멍이 나타납니다.”
“걱정할 거 없어. 그건 속에서 암균을 밀어내니까 모공이 터져 그러니 좋은 일이야. 골수에 있던 독이 피부바깥으로 빠져나가려니까 요것이 반응을 하는 게야. 피부란 것은 거죽에 있으니까 속에 있는 독이 나가려면 거죽을 거쳐야 하잖아. 아무 걱정하지 말고 퍼먹으라고 해.”

흑인여성은 교포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열심히 인산약을 복용하였다. 곧 사망할 것으로 예상했던 환자가 점점 기력을 회복하더니 1개월쯤 지나자 혹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몸에 있던 혹이 사라지고 엉덩이 부근만 조금 남아 있다가 얼마 후에는 그것도 없어졌다. 의사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3개월 시한부 전신골수암 환자가 깨끗이 완치돼 퇴원했다.

당시는 의료보험이 불완전하던 시절이라 백혈병 환자가 골수 이식을 하려면 너무나 큰 돈이 필요했다. 가난한 사람은 치료할 엄두도 못내었다. 청천벽력같은 백혈병 진단을 받고 사색이 다된 환자나 보호자가 찾아오면 인산은 지나가는 말처럼 “백혈병이야 감기보다 쉽지.” 하며 처방을 술술 불러주었다. 그리고는 누구한테나 똑같이 죽염, 난담반캡슐과 사리장을 먹게 했다. 모든 종류의 암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일반 병에도 동일했다.

인산은 80여년 전 처음 죽염을 발명하고 죽염의 약성을 높이기 위해 개발한 죽염약간장을 당시 할머니에게 만들게 했던 것을 마침내 ‘사리장’이라는 명칭으로 다시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세상에 공개하는 인산에게 가족을 위해 남겨둔 비법이란 있을 수 없으나 노쇠한 육신 곁에 늘 시중 드는 이는 함께 살고 있는 셋째아들 윤수와 셋째며느리 최은아였으므로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잊고 있다 미처 말하지 못한 생각나는 사항이 있으면 필기도구를 가지고 오게 하여 기록하여 전하게 하였다.

1991년 11월 30일은 토요일이었다. 인산은 그날 오후 3시부터 경남 창원시에 있는 경남운수연수원에서 공개 강연회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횟수로 치자면 스물세 번째의 공개 강연회였다. 그러나 강연회의 시작 시간이 되었을 때, 사회자는 부득이한 사정을 알리며 청중들의 양해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오늘 강연을 해주시기로 한 인산 선생님께서는 심신(心身)의 미령(未寧)으로 인하여 이 자리에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대신 강연하시려 했던 내용을 유인물로 대체하오니, 청중 여러분께서는 이 점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곧이어 청중들에게 ‘서목태(鼠目太) 죽염간장에 깃든 감로수(甘露水)의 비밀’이라는 제목이 붙은 유인물이 배포되었다. 청중들은 인산으로부터 직접 강연을 듣지 못하게 된 것을 못내 아쉬워하며, 받아든 유인물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간동(艮東) 분야에 속하므로 예로부터 최상의 영약(靈藥)이라 일컬어지는 감로수가 나온다. 이 땅의 초목ㆍ짐승ㆍ벌레는 그 감로수의 힘으로 화(化)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지구상 다른 지역의 것들과는 달리 맛이나 약성(藥性)이 특별나다.

그중 서목태(鼠目太, 쥐눈이콩)는 특히 감로수를 많이 함유한 산물로서 색깔이 물의 빛깔(水色, 즉 玄)을 따라 검지만, 애초에 그 싹이 틀 때나 자랄 때에는 동방(東方) 청색(靑色)이라, 사리(舍利)가 이뤄지는 사리콩이다. 새카맣고 반들반들 영채(玲彩)가 나는 것이 최상품이다. 감로수의 힘으로 생기고 그 힘으로 자라 결실했기 때문에 많이 먹으면 뼈에 사리가 생기는 것이다.

이 서목태로 메주를 만들고 죽염으로 간장을 담그면 이 간장은 사리간장이 된다. 서 목태를 날콩 그대로 먹어도 불치병이라고 하는 당뇨병은 쉽게 완치되고, 서목태 간장은 모든 난치ㆍ불치병을 쉽게 고친다.

이 서목태와 죽염으로 담근 약간장은 피 속의 불순물을 깨끗이 제거하고 피를 새로 만들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게 조화가 무궁한 감로정(甘露精)의 신비이다. 그래서 피는 청혈(淸血)이 되고, 사혈(死血)ㆍ어혈(瘀血)은 없어진다.

피가 청혈이 되고 향혈(香血)이 되면 체내에 사리가 이뤄진다. 모든 질병이 물러가고 건강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내가 이전에 ‘마을마다 부처 나고, 집집마다 종합병원이 된다’는 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사리콩, 사리장은 사람마다 사리가 생기게 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

서목태는 수성(水星), 태백성(太白星, 즉 金星), 토성(土星), 목성(木星)의 정을 비롯하여 오행성정(五行星精)을 응(應)해 화생(化生)한 데다, 우리 간방의 감로정을 지녀서 그런 힘을 가지게 되어 있다.

이런 소식이 세계에 확산되어 집집이 약간장을 만들어 먹고 그 신비한 효력이 다 밝혀지는 데는 수백 년의 세월이 가야 되겠지만, 지금 내 말을 따라 이걸 당장 이용하는 집에는 그만큼 행복이 온다는 것은 내가 자신한다.

첫째 건강, 다음에는 장수하고 행복하여 도를 닦아 모든 동포가 부처 되고 훌륭한 사람 되는 게 내 바라는 바요, 나아가 모든 인류가 이로 인하여 행복과 평화를 얻는다면 내 한 생애는 거기에서 보람을 느낄 것이다. 생중생(生衆生)의 노병사(老病死)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내 일생의 바람이다.

그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청중들은 인산이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왠지 허전한 마음을 안고 돌아가야 했다. 그것은 비단 초겨울의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만은 결코 아니었다.

인산은 시봉하고 있는 셋째 며느리 최은아(崔恩兒)에게 죽염간장에서 진일보한 바이오 합성 신약 사리장(舍利醬)에 대한 것을 틈틈이 기록하게 하였다. 사리장이란 검정약콩(鼠目太)을 발효시켜 유황오리와 유근피(느릅나무 뿌리의 껍질)ㆍ밭마늘을 달인 물에 죽염을 넣어 간장처럼 숙성시킨 것을 말한다. 재료는 이처럼 간단하지만 사리장은 피를 맑게 하는 청혈제로서 탁월한 효능을 가진다. 그것을 외부의 상처나 염증에 발라도 좋을 뿐더러, 먹거나 주사하면 몸속의 염증이나 암세포를 치료하며, 그 밖의 부패균ㆍ독소 등을 분해ㆍ해독한다. 일반 불순물에서부터 암세포의 독소까지도 제거해 주는 천연 항생제이며 천연 항암제라고 할 수 있다.

사리장은 인산이 세상에 남기는 또 하나의 영약이었다. 인산의 셋째 며느리 최은아는 시아버지(라기보다는 ‘큰 스승’이라고 생각했다)로부터 사리장을 비롯한 각종 천연물 항암제나 암치료처방을 받아 적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천연약용 물질을 찾아내고 개발하고 합성하여 완전히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천재성 속에서 천연식물과 동물과 광물은 상상할 수 없는 가치로 다시 창조되는 것을 보았다. 인간의 합성방법에 따라 천연물질은 엄청난 효능의 차이가 생기고, 약성이 수십 배에서 수만 배까지 강화된다는 사실에서 자연 이치에 무궁한 조화(造化)가 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각자(覺者)의 눈에 보이는 약재들의 특성은 서로 더해지되 단순히 수학적으로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약성을 무한대까지 끌어올려 어마어마한 효능을 지닌 새로운 신약(神藥)으로 합성되는 것이었다.

순천향의대에 합격하고 우연히 인산의 의서를 읽고 깊이 감명받아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인산의 제자로 들어와서 셋째며느리까지 된 최은아는 인산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무한한 영광이고 생의 빛이었다. 시아버지 인산을 모시면서 학문에만 천재적이지 돈벌이는 모르는 남편 옆에서 쌀이나 반찬거리 살 돈조차 없을 때가 많아 경제적으로, 가사노동으로 힘들고 지친 시절이었지만 인산의 의학을 후세에 전달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에 대해 혼자 감격해하며 인산의 단 한마디, 단 한조각의 가르침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최은아는 인산이 일러준 방법을 토대로 여러 번 실험을 거듭하며 최상의 사리장 만드는 방법을 찾아 나갔다. 탕약을 만들 때 옻을 첨가하면 살균 효과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판단으로 옻 껍질을 더해 달인 탕약에 죽염을 넣고 발효시킨 콩을 숙성시켜 사리장을 만들었고 검정콩의 해독력과 죽염의 항염증력, 옻의 살균력이 합쳐져 더욱 광범위한 응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리장은 천연항암 주사제로 개발된 것이기에 직접 자신의 혈관에 사리장을 주사하는 실험까지 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또 하나의 합성 신약인 사리장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사리장으로 당뇨병이나 암을 고친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는 이 글에서 거론하지 않기로 하겠다. 하지만 인산이 이 세상에 남긴 빛의 산물로서, 사리장은 두고두고 인류의 건강을 지켜내는 최상의 자연합성 신약의 위치에 놓일 것이란 점만은 반드시 강조해 두고 싶다.

그때에 이 세상에는 ‘인산’이라는 빛이 있었으나 세상은 그 빛을 보지 못하였다. 딴에는 세상 사람들의 눈이 어둡고 지혜가 부족한 탓이었다. 세상은 그때까지도 인류의 영원한 건강과 행복을 위해 인산이 전해 주는 고귀한 지혜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줄곧 부정하거나 비난만 할 뿐이었다. 그런 세상에 대고 인산이 쏟아놓은 핏빛 ‘참회록’이 있었으니, 인산의 일평생을 통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이 욕먹을 일을 했다고 스스로 고백한 사실이었다.

……내가 지리산에 와서 함배기(함지박) 깎을 때에 이승만이도 어려운 시기였으니 까…… 나하고 잘 아는 사람들…… 장경근이를 비롯해 이재학이나 김범부 같은 사람들 앞세워 이기붕이를 좀 도와주라는 거야. 그런데 내가 그 세상에 나가면 이기붕이가 어느 날 몇 시에 죽을 거라는 걸 다 알면서 어떻게 행세를 하겠어? 그래서 어린 것들을 데리고 도망치다시피 해서 지리산 속에 들어가 함배기를 파먹은 거야. ……거기서 한 5 년 지내다 보니 이기붕이가 죽었다는 방송이 나와. 그래서 애들 데리고 또 서울로 올라 간 거야. 그러니까 내 생전에 보따리 들고 이사한 걸…… 마누라를 얻은 후의 이사가 일흔여덟 번이야. 한 달도 못 되어 쫓겨 나간 데가 많아. 돈이 한 푼도 없으니까…… 사글세를 안 내는데 하루인들 그대로 있게 두나? 그 사람들이 하루 방세가 얼마인지, 이자가 얼마인 걸 다 아는데, 인정사정 봐주나? 쫓겨 다니는 거라.

그런 세상을 살다가…… 내 이제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그게 참 불행한 일인 데…… 그게 무엇이냐? 내 자신의 행복을 좇은 일은 없지만, 자식들에 대해서도 곁방살이를 면하게 해주려고 마음을 썼다는 것은…… 내게는 불행한 일이야. 그게 왜 불행한 일이냐? 대중을 위해서 왔다가 가는 인간이라면 그런 일조차 없었어야 돼. 그런데 내가 그렇지를 못했으니…… 그게 욕먹을 일이지. 나는 죽을 때에도 이렇게 써놓을 거야. ‘나는 결국 세상의 욕을 지고 간다’고 말이야.

그러면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더냐 하면, 내가 조상의 피를 받아 가지고…… 그 조상 의 은혜를 갚으려면 자식들이 향화(香火)를 받들 수 있는 정도…… 오막살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거야. 조상의 피를 받아 가지고 조상의 피값을 하고 가는 게 크게 나쁜 짓은 아니라고 생각한 거지. 그렇지만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내게는 그게 죄이라.

전생의 불(佛)이었다는 자가 금생에 와서 그런 짓을 했다…… 그건 말이 안 되겠지. 모든 영화(榮華)를 중생에게 영원히 전하는 게 내 할 일이지, 내 몸으로 그걸 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거니와…… 내가 그런 영화를 꿈꾼다는 것은…… 꿈에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래서 내가 고백하는 거야. 나라고 해도 욕먹을 짓을 했으면 먹어야 돼. ……세상에서 내 것이 아닌 게 영화야. 영화는 내 것이 아니야.(《神藥本草》 502~503쪽)

인산의 위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평생 동안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해보겠다는 노력은커녕 생각조차 갖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가난한 환경 속에서 어렵게 성장한 자식들이 집칸이나 갖고 살 수 있도록 말년에 잠시 거들어주었던 일에 대한 죄책감은 그의 마음을 줄곧 괴롭혔던 것이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1989년 10월 15일에 부산일보사 강당에서 열린 공개 강연회에서도 솔직하게 피력되었다.

……나는 지금 집(가정 또는 가족)에다 정신을 쓰는 게 아니라, 지구촌에다 온 정신을 다 쏟고 있다. 1백 프로……. 그런데 거기에 하자(瑕疵)가 하나 있다. 그게 뭐냐? 자식들을 위해서 약간이라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건 분명한 하자이다. 옛날에 석가모니가 자기 처자(妻子)를 위해서 뭘 어떻게 했다는 얘기는 전해지지 않았어. 노자(老子)가 그렇고, 공자(孔子)도 그래. 이름난 이들은 자기 처자를 위해서 일한 것 없어. 그런데 나만 후세에 욕될 일을…… 약간이라도…… 늘그막에 했어. 조금이라도 말이야. 사람이…… 세상에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 것인데…… 비밀을 감추고 죽는다는 게 말이 돼?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잘못을…… 비밀을 하늘에다가 고하는 게 아니라 여러분 앞에 고백하고 가려는 거라.

인산은 평생토록 세상의 명리(名利)를 좇지 않았다. 그것은 생이지지(生而知之)의 대지혜는 모든 인류를 위한 공동의 보물인 만큼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욕되게 하고 부인(否認)하는 행위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천금(千金)을 내걸고 찾아온 환자라 하여도 특별히 대하지 않고, 오로지 한 사람의 환자로서만 대했다. 어느 곳에서도 낫게 해주지 못하는 병을 낫게 해준 그 무수한 경우에도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가난하였다. 하지만 삶의 그 어느 구석에서도 곤궁함을 느끼지 않았던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모든 것을 다 가진 존재’였다. 그의 삶을 일관되게 관철한 생각은 오로지 이 세상의 모든 질병을 극복하여 만인이 건강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온 세상을 자신의 두 팔로 감싸 안으려 한 그였기에, 자신이 이 세상에 와서 발명한 여러 가지 놀라운 합성 신약들에 대해 특허 등록 따위를 해두고자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사람이 쉽고 편하게 그것들을 사용하게 되는 날이 속히 도래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그는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왔던 ‘큰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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