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산한 운룡은 산도적떼처럼 제멋대로 자란 머리털과 수염을 깎으러 이발소에 들렀다. 이발사가 운룡의 이발을 하다가 주저주저하더니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공손히 청했다. “선생님, 눈 좀 감아주시지요.” 운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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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한 운룡은 산도적떼처럼 제멋대로 자란 머리털과 수염을 깎으러 이발소에 들렀다. 이발사가 운룡의 이발을 하다가 주저주저하더니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공손히 청했다. “선생님, 눈 좀 감아주시지요.” 운룡이
운룡은 소년시절에서부터 자주 찾아가곤 하였던 의주 천마산 영덕사를 새로운 은신처로 삼기로 하고 길을 떠났다. 그곳은 깊음에 있어서 묘향산만 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떠돌이 생활을 하기 전에
그 후 계미(癸未, 1943)년 여름의 어느 날, 운룡은 산에서 내려와 충재 김두운 선생 댁에 며칠 묵으면서 지내다가 떠나게 되었다. 이때 선생이 언제 돌아오냐며 속히 들러주기를
1942년 무렵 운룡은 충재 김두운, 강재 문창수(康齋 文昌洙) 등의 주도하에 추진되던 총독부 습격사건 계획에 참여, 활동해오던 터였다. 그 즈음 운룡은 우연한 기회에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에
금선대 역시 언제 누가 조성해 놓은 것인지 모르는 일종의 기도막이었다. 첩첩한 능선과 골짜기를 넘고 또 넘은 연후에도 산길을 벗어나 아슬아슬한 바위 사이로 몇 굽이를 돌아가며
수영·유근피·벌나무·노나무·개똥참외·밤·찰밥·메밀국수·민물고둥·집오리·도마뱀 운룡은 어느 날 웅담을 구하기 위해 평안남도 개천(价川)의 백운산 밑에 사는 포수를 만나러 산에서 내려간 일이 있었다. 서두를 것 없이 천천한 걸음으로 왕복 한
세상이 주지하는 대로 금강산은 천하에 다시없는 명승지로서 계절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봄에는 온갖 꽃들로 화려하고 산수가 청명하여 금강산(金剛山), 여름에는 온 산에 짙은 녹음이 우거져 봉래산(蓬萊山), 가을에는
설령암에서 90리 가량 떨어진 강선암을 오가는 도중 곳곳이나 그 밖의 산중에 산재한 암자나 동굴에는 참선 수행하는 승려나 신선이 되겠다고 도를 닦는 도가(道家)의 도인 등이 많이
운룡이 설령암에 도착한 그 이튿날, 중년의 부부가 불공을 올리기 위해 설령암을 찾아들었다. 대를 이을 아들을 얻지 못한 그 부부는 ‘설령암의 부처님께 빌면 득남할 수 있을
운룡은 투옥을 당하면서도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신분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을 했었기에 탈옥 이후 자기 한 몸의 종적만 감추면 그만이었다. 경찰은 운룡의 본적지이며 가족 관계,
다음 날 형무소장 내외는 관사에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차려놓고 부하를 시켜 운룡을 데리고 오게 했다. “지내기에 고생이 많으실텐데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송구스럽소.” 나이 50줄의 지긋한
1934년 봄 변창호 대장이 이끄는 운룡의 모화산 독립군부대가 철원경찰서를 습격하여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조선이 완전히 일본에 합병된지 어언 25년이 흘러 이제는
탄광 속 깊은 곳에는 송진이 몰려 있어 언제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으므로 소방화 작업은 필수적이다. 탄광 가장 깊숙한 막장에서 조기통을 깔고 빅구로 채탄을 할 때는
운룡은 묘향산 산판에서 나무를 베어 철도목을 깎아내는 일이나 백두산 계곡에서 사금(砂金)을 채취하는 일, 금광이나 무연탄 광산에서 채광하는 일 등 그때 그때 형편과 사정에 따라 닥치는
당시 묘향산에서 제자를 기르며 독립투쟁을 벌이던 최승호 장군이라는 기인이 있었다. 운룡보다 20여세가 많았는데 전우치(田禹治)의 무술과 도술의 계보를 잇는 기인(奇人)으로서 천하장사라 할 만한 괴력과 신출귀몰하는 도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