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화의 유머 풍속사] ③ 박정희 편

1965년 5월31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파월장병 위문공연을 마치고 돌아온 연예인들을 접견하는 모습. 오른쪽부터 위키리, 곽규석, 구봉서, 박재란, 이미자씨 등 <사진=정부기록사진집>


정권호위 ‘수훈갑’ 코미디언들

의도적이었든 아니었든, 박정희는 코미디와 코미디언을 정권 홍보수단으로 철저히 이용했다. 전 국민 일체화가 필요한 정권은 모든 사람들의 촉각을 정치가 아닌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산업화 과업에 바쁜 박정희정권에게도 딱 그것이 필요했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냐!”라며 “바보처럼 만족하며 사니 이 얼마나 행복하냐”고 내세운 사람이 바로 배삼룡이었다. 국민을 ‘행복한 바보’로 만들던 시절, 1등 공신은 단연 코미디였다. 좀 과하게 말하면 배삼룡은 ‘전 국민 우민화 작전의 총사령관’, 또 하나의 혁명 기수였다.

최정호 연세대 신방과 교수는 당시 시대상과 배삼룡의 관계를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다. “근대화 기차가 시동을 걸고 산업화 비행기가 이륙 엔진을 켤 때인 1970년대 배삼룡은 각광받았다. 한국 현대화의 전위적 ‘지진아’ 배삼룡은 그 얼간이짓으로 우리로 하여금 변화하는 시대를 충격 없이 받아들이게 해주었다. 그의 바보행위는 근대화 노동에서 오는 육체의 뻐근함을 잊게 해주었다. 그에게 위안을 받지 않은 근대화 전사들이 어디 있었을까?”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고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 상대적 우월감을 느낄 때다. 나보다 지능이 낮고, 나보다 못생기고, 나보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렇다. 배삼룡이 그랬다. 그는 정부가 만들어 국민들에게 나눠준 행복의 도구였다. 배삼룡은 도시화 시대에 촌뜨기로, 공업화 세상에 거름 지고 가는 농사꾼으로, 찬란하게 서구화되어 가는 시절에 짚신 신고 나타난 꼴불견으로 박정희 정권이 펴는 모든 정책을 ‘역설적으로’ 찬미했다.

배삼룡의 대표적 코미디 ‘양반 인사법’은 부를수록 좋은 명곡처럼 보면 볼수록 재미있는 명재담이었다. 한 번 보면 지겨운 코미디의 특성을 무너뜨린 특별한 것이었다. 내용인즉, 무식한 두 상민이 양반이라고 속여 혼담을 주고받는데, 등을 맞댄 채 양반 말투를 적은 쪽지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코미디다. 구봉서와 배삼룡이 각각 혼주고, 박시명이 인사법을 적어 주는데, 웃음이 터지는 대목은 모두 배삼룡에게서 나왔다.

구봉서 “별 밑에 인사법!”
배삼룡 “그건 제목이오!”
구 “처음 면상하겠습니다.”
배 “상면이오. 면상이 아니라.”
구 “아명은 일봉이라 하오.”
배 “아명은…(쪽지를 소개꾼에게 보여주며) 이거 무슨 글자요?”
구 “으이구~ 심하다, 심해!”
배 “아명은 심해라 합니다.”

두 상민이 양반인 체하면서 주고받는 인사가 짧고 경쾌한 박자로 리듬을 탄다. 사람들은 허리가 끊어질 듯 웃어대며 생활의 시름을 잊었다.
박정희를 도운 또 한 사람은 ‘합죽이’ 김희갑이다. 정권 홍보로 치자면 그도 배삼룡 못지않은 수훈갑이다. 1940~50년대 이산의 한과 모정, 애향을 그리는 대다수 대중가요를 멋들어지게 부르던 김희갑은 이미 30대부터 60세 이상의 노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김희갑은 유려한 말솜씨로 라디오 토크프로그램에 단골로 출연했다. 누군가가 현 사회행태를 따지거나 각종 규범에 나타난 독소조항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에이 모르는 소리!”하고 핀잔을 줬다. 당시 분위기에서 이 말은 중앙정보부 취조실에서나 들을 수 있는 추상같은 호령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누가 감히 소신대로 밀고 나가는 박정희에게 반기를 든단 말인가?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김희갑에게 먼저 제동이 걸리는 것이다. 김희갑은 ‘팔도강산 시리즈’로 지방 각 도시의 눈부신 발전을 소개하는 공보담당 역도 완벽하게 수행했다.

사회비판엔 “에이 모르는 소리!”

국민총화로 잘살아보자고 하던 때 다른 어떤 목소리도 반역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박정희 대통령이 삽교천 제방공사 완공식을 끝으로 저 세상에 가기 전까지는.

구봉서도 어떤 점에서는 본의 아니게 박정희 대대 2중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코미디언이다. 그는 1963년 6월부터 라디오에서 “이거 되겠습니까? 이거 안 됩니다!”라고 날마다 소리를 질렀다. 이것은 전근대화된 인물에게 가한 일침이요, 산업화로 가는 길에 ‘민주화…어쩌구 하면서 재를 뿌리는’ 반정부인사를 향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러나 정권홍보 선발대로 감히 거론한 배삼룡, 김희갑, 구봉서가 국민의 편에서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풀어준 때도 많았다. 좌충우돌하는 방식으로 서민들이 감히 저지르지 못하는 미필적 고의 사고를 내는 것이다. 파출소에서 경찰에게 대든다거나, 돈 많은 부자들을 골려 주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그때 서민들은 그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대리 만족을 느꼈다. 나중에 5공 정권도 박정희의 수법을 쏙 대물림 하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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