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화의 유머 풍속사] ⑥ 김대중-이경규 편, ‘개그 황제’ 웃긴 ‘정치 9단’ 위트

1996년 MBC <이경규가 간다> 김대중 편. 많은 코미디언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위트에 반해 그를 따랐다.

이경규 “왜 저를 가장 좋아하시죠?” DJ “안 그러면 편집될까봐”

세계 방송문화계가 우리나라 ‘아, 대한민국’을 향하여 조롱을 한 적 있었다. 숨소리마저 엄숙하게 내뱉어야 했던 유신시절에도 없었던 정부의 조치가 5공 때 있었던 것이다. ‘방송에서 코미디를 없애라!’는 포고령이 내려졌었던 것이다. “백성들이 함부로 웃으면 떼끼를 하겠습니다!”라 했으니 문명국들이 우릴 얼마나 우습게 봤을까. 그것이 나중에 ‘1사1프(로그램)’로 다소 완화되기는 했지만.

김대중은 달랐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코미디는 가히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 사실 김대중 후보는 선거전에서 부드러운 유머를 구사해 냉철하고 이지적으로 보이는 이회창 후보와 차별화 전략을 폈다. 그것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절대적 요소(필자 주장)였거나 최소 20만 표는 더 얻게 했다(정치평론가 분석)는 생각이 든다.

코미디언들과 인연을 가장 많이 가진 대통령이 김대중이었다.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기 직전 최양락-팽현숙 부부와 이봉원-박미선 부부를 따로 만나 식사를 한 일이 있다. 이는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이 요청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유머감각이 있는 정치인을 만나고 싶어 했던 개그맨 부부들이 원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우연일까? 대통령 선거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많은 코미디언이 자발적으로 유세장을 쫓아다니며 김대중에게 한 표를 달라고 호소했다.

코미디언 엄용수는 오래전에 이미 2,3차례나 파경을 하고 불행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때는 살 맛이 팍팍 난다고 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열광적인 김대중 지지자였다. 엄용수는 전·현직 대통령들의 음성모사를 아주 잘 내는데, 그중에 백미는 역시 김대중 흉내다.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모사가 더 쉽다고 했다.

유머 구사···냉철한 이미지 이회창과 차별화

초창기 김대중을 소재로 한 코미디는 다분히 인신공격적 성격이 짙었다. 코미디언들은 김대중이 지팡이를 짚고 절뚝거리며 걷는 장면을 연출했다. 하지만 이후 그가 청와대 행이 유력해 보이고 실제로 집권하자 급격히 달라졌다. 김대중을 풍자하는 코미디언들은 대부분 목소리와 분위기에 치중했다. 당시 개인기의 천재라 불렸던 개그맨 심현섭이 히트시킨 DJ 성대모사만 봐도 그랬다. 심현섭은 움직이지 않고 꼿꼿이 서서 다소 쉰 듯 하지만 결연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를 내어 김대중을 묘사해냈다.

DJ는 다변가에 달변가다. 치밀하고 과학적인 화술을 지녔다. 많은 독서에서 찾아낸 무궁무진한 정보량이 뒷받침해주는 후천적 기술이겠지만, 정치 상황에 맞는 방어적 논리어법이 그의 뛰어난 말솜씨를 만들었다. 김대중은 웃음을 알았다. 김대중은 영어(囹圄)의 몸일 때도 화초를 길렀을 만큼 꽃 가꾸기를 좋아했다. 꽃에 물을 주면서 인상을 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자주 핍박을 받았기에 늘 굳어있어야 할 그의 얼굴이 간혹 부드럽게 펴진 것은 유머의 효용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라 본다.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코미디언을 가장 많이 만난 사람인 김대중, 이경규와의 인연은 그중 각별하다. 그가 영국에서 돌아와 정계에 복귀한 뒤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총재로 있을 때였다. MBC-TV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 깜짝 출연해 코미디언 이경규와 장시간 이야기를 나눈 일화는 유명하다. 김대중은 이경규 일행의 예고 없는(그 프로그램은 유명인을 전격 방문하여 인터뷰를 따내는 파격적 방식을 썼다)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맞아주었다.

이경규 “총재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코미디언은 누굽니까?”
김대중 “(주저 않고) 바로 이경규씨죠. 허허!”

이경규는 궁금했다. 나중에 김대중에게 진짜 자기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김대중은 천연덕스럽게 “이경규라고 말하지 않으면 편집될 것이라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하더란다.

그 인연이었을까? 그 뒤로 두 사람은 서로 팬으로 가까워진다. 이경규는 김대중의 지지기반이 절대 아닌 영남권 출신이고 그 지역 사투리를 심하게 쓴다. 그런 그가 야당 총재 김대중과 ‘우호적인’ 대화를 길게 했고 우정을 이어간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큰 자리(특히 대통령 같은)를 차지하려면 영남권의 비토를 없애든가 최소한 줄여야 하는 정치공학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김대중을 ‘코미디를 아는 정치인’으로, 이경규를 ‘정치를 아는 코미디언’으로 느꼈다. 상호 대박이 났던 것이다.

김대중을 소재로 한 코미디 역시 코미디언의 뜻이나 내용과는 무관하게 홍보효과를 만들어내는 게 사실이다. 인기 연예인들이 이른바 ‘개인기’를 선보일 때 김대중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이것은 정치인 김대중이 대중 곁으로 다가서는 데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었다. 조용필을 키운 사람은 이 땅에 적어도 5백 명은 된다. 그렇다면 김대중도 코미디언의 힘 덕에, 특히 이경규가 ‘길렀는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