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칼럼] ①현대판 마약과의 전쟁은 英-美간 자업자득
1911년까지 오늘날의 마약과의 전쟁은 영국과 미국인의 자업자득(Self do, self have)인 측면이 다분하다. 영국은 산업혁명 이후 무역적자 해소책으로 아편밀수를 택했다. 인도 벵골 지방(지금의 방글라데시 및 인접 인도지역)의 아편을 중국으로 가져갔다. 동인도회사의 밀무역이었다.
영국은 마약남용에 원죄가 있다. 청나라는 1729년 첫 아편금지령을 내릴 정도로 아편 피우는 습관과 대치했다. 그런데, 영국이 몰래 그걸 팔다니. 1840~1842년 청과 영국의 아편전쟁에서 청이 패배했다. 아편을 막지 못했다. 결국 망국이 초래됐다.
아편은 널리 사용됐다. 18~19세기의 유럽 항구, 특히 런던에는 아편이 보통화물로 하역되고 선적됐다. 야적화물도 많았다. 19세기 초만 해도 맥주에 아편을 타서 마셨다. 말라리아 예방 특효약이라 알려져 그렇게 먹었다.
19세기 중반까지도 마약, 코카인, 심지어 비소까지 약방에서 팔았다. 시중에서는 감기약으로 아편을 먹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감기 들면 왕실 약국에서 처방한 아편을 애용했다. 젊은 윈스턴 처칠로부터 코카인 껌을 선물 받았다.
여황 폐하의 수상 윌리엄 글리드스톤은 중대한 연설을 하기 전에 꼭 챙기는 습관이 있었다. 차나 커피에 아편을 타서 마셨다. 진정제!
영국은 1868년에 규제 시작
이런저런 용도로 시중에 아편이 확산됐다. 중국인이 하듯 아편굴에 아편을 피우는 행위가 문제됐다. 1868년 ‘Pharmacy Act’를 제정했다. 팔고 살 때 사용자의 이름과 주소와 양을 기록하여 약사가 관리케 했다. 온 천지에 널린 게 아편이라 실효는 없었다. 지키지도 않았다. 법이론 상 규제였다.
아편 피우는 하층민(downer), 코카인 주사하는 상류층(upper). 중국 선원이 한둘 런던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소포와 라임하우스 거리에 중국인촌이 형성됐다. “smoked by Chinese recreation”식 기분전환용으로 아편을 피웠다. 죄악이나 타락으로는 보지 않았다. 하층민의 기호품 정도로 여겼다.
반면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만든 인물 셜록 홈즈(Sherlock Homes)는 코카인을 제 팔뚝에 주사했다. 기분을 고양시키는 방법이었다. 상류층의 취미였다. 역시 악행이 아니었다. 다만 인간으로서 지닌 단점으로는 간주했다. 사실 19세기 유럽당국의 관심사는 마구 마셔대는 음주습관에 있었다. 마약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영국과 러시아는 아직도 이 과음과 씨름하고 있다.
1912년 마약 관련 최초 헤이그 국제조약
Hague International Opium Convention이 체결됐다. 이때부터 마약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아편, 모르핀, 코카인의 판매와 수입이 금지됐다. 그 이전에는 국가 사이의 이동에 행정의 간섭이 없다시피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만 해도 영국에서 아편과 코카인은 합법이었다.
해이해진 전쟁의지를 고취시킨다는 관점에서 1915년 사용허가 요건을 강화했을 뿐이다. 1918년 코카인 복용 여자 연극배우 Billie Carleton이 급사했다. 부검 결과 코카인 과다사용이 밝혀졌다. 코카인을 주사한 애인은 징역 8개월. 이를 판 중국인은 벌금 10파운드. 중국인의 부인 영국여인은 배달한 혐의로 중노동 5개월에 처해졌다. 이 사건으로 아편과 코카인의 섹스와 매춘의 연관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마약에 대한 이미지가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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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Dangerous Drugs Actrkm 제정됐다. 마약관리가 일층 강화됐다. 황인종이 마약으로 백인여성 농락?! 또 코카인 과다투여로 연예계의 여자 댄서 Freda Kempton이 죽었다. 함께 있던 중국인 사업가 Brilliant Chang이 체포됐다. 괴담도 나돌았다. 중국인 즉 황인종의 마수에 순진한 백인여성이 마약에 빠지고 있다! 영국여인을 유혹해 농락한다! 끝내 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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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혐오증이 퍼졌다. 언론이 가세했다. 프랑스와의 앙숙관계에 독일인 경원 심리를 환기시키면서 동양인 음모론을 덧붙였다. 경찰의 중국인 밀집지역 단속이 이어졌다.
1960년대부터 미국인이 마약을 확산시켰다. 마약에 대한 태도가 2차 대전 후 크게 변했다. 하나는 미국인들이 유행처럼 마약에 손을 댔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로 인해 미국이 마약전쟁을 한다는 점이다. 미국 베이비 부머는 강국 미국의 살만한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 한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실질적인 글로벌 소비세대다. 여행에 나섰다. Morocco에 가서는 멋으로 마리화나를 피웠다. 졸음 쫓아내려고 amphetamine을 먹는 운전기사의 트럭을 빼앗아 탔다. 각성제도 함께 먹었다. 이렇게 자란 1960년대 청년세대. 그들의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은 어떠했는가.
히피와 마약도 한 모습이었다. 마약에 빠져 들었다. 치료용이 아니었다. 마약을 개인 환락용으로 사용했다.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 채널이 생겼다. 거래가 되니까 제조 및 유통망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마약확산 초기에는 루머가 나돌았다. 흑인 남성이 먹고 백인 여성을 겁탈한다는 식이다. 인종편견을 부추기고 인종분리를 선동하는 도구였다. 돈 많이 드는 미국의 외로운 전쟁초기 미국의 마약단속 대상은 소수 개인 사용자였다. 규모가 작은 하위문화 대책이었다.
지금은 거리의 갱단이 소매를 장악하고 있다. 거대조직 국제카르텔이 공급을 쥐고 있다. 시장을 좌지우지 한다. 여기에 수백만명의 마약 상용자가 있다. 수요가 있는데 공급이 주는가. 오히려 새로운 수요 창출에 나선다. 자본주의시장의 생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