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겸 칼럼] 100년 전 비엔나···스탈린, 트로츠키, 프로이트
빈(Wien). 영어로는 비엔나 Vienna. 체코 사람은 비덴이라 부른다. 헝가리인은 베치라 한다. 유럽의 중부. 다뉴브 강 상류 오른쪽에 자리 잡은 지리의 이점이 있었다. 사람과 문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요충지였다. 융성했다. 게다가 100 년 전인 1913년이라면 번영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제국 Austro-Hungarian의 수도였다. 제국의 수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Franz Joseph 황제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15개 국가 5000만 인구를 지배했다. 그는 대학을 중심으로 문호개방정책을 취했다. 비엔나 인구구성은 가히 ‘국제적’이었다. 거주자의 반은 본토박이였다. 1/4은 Bohemia인과 Moravia인이었다. 상주인구다. 나머지 1/4은 세계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야망을 품고 기회를 찾아 온 자, 여행가와 모험가, 스파이들이었다.
다문화 다언어 국제도시였다. 애국가는 독일어를 비롯한 12개국 언어로 공식 번역됐다. 군대도 12개국 언어로 지휘하고 명령했다. 비엔나는 이처럼 하나로 용해되는 melting pot이 아니었다. 각기 고유의 맛을 내면서 어우러지는 soup 같은 사회였다. 그래서 출신배경과 언어와 문화가 다른 이방인이 들어와 살기에 좋았다.
파파도플로스(Papadopoulos)가 나타나다
이런 시절에 한 사람이 잠입했다. 1913년 1월 폴란드 크라쿠프(Krakow)에서 온 열차를 타고 북 비엔나 역에 도착했다. 농부들이나 하는 큰 턱수염에 어두운 얼굴. 나무로 만든 여행 가방을 든 차림이었다. 주위를 조심스레 곁눈질로 살피며 역을 서둘러 빠져 나갔다. 상의 윗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냈다. 그의 폴란드 여권에는 이름이 스타브로스 파파도플로스(Stavros Papadopoulos)라 되어 있었다. 쪽지를 꺼내 찾아 갈 곳을 확인했다.
Koba를 Leon이 맞이하다
그가 그곳에 도착할 무렵 레온(Leon)은 현관이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노크 소리가 나자마자 모르는 이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 왔다. 검붉은 얼굴에 마마자국이 있었다. 작은 키의 야윈 사람이었다. 두 혁명가가 이렇게 만났다. 생면부지였다. 파파도플러스는 공산주의자 동지들 사이에서 코바(Koba)라는 익명으로 불리는 스탈린(Stalin)의 위조여권용 이름이었다. 스탈린이 찾아 간 집의 주인은 트로츠키(Trotsky)였다. 반체제 러시아 지식인이었다. 프라우다(Pravda, ‘진리’라는 뜻)라는 급진 공산혁명 신문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조셉 스탈린과 레온 트로츠기는 도망자 신세였다. 나이 서른넷 동갑내기였다. 러시아를 무너뜨리고 노동자와 농민의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여의치 않자 일단 비엔나에 거처를 정했다.
장래의 마샬(Marshal)도 있었다. 비엔나의 남쪽 동네 비에너 노이스타트(Wiener Neustadt). 자동차 회사 다임러(Daimler)의 공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조집 브로츠(Josip Broz)가 일하고 있었다. 노동자의 일상은 고달팠다. 그 속에서도 계속 인생을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다들 잘 사는가? 평등하게 사는 방법은 무엇인가? 장래의 나는 무엇인가? 스물한 살 청년으로서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좋은 시절은 언제 오는가 하다가 제국군대에 징집됐다. 그에게는 찬스였다. 군대경험이 그를 인물로 만들었다. 나중에 유고슬라브(Yugoslavia)의 지도자가 됐다. 티토 원수 마샬 티토(Marshal Tito)다.
제3제국의 그도 있었다
다뉴브 강가 싸구려 간이 숙박소. 그곳에 1908년에 와서 1913년까지 청소년기를 보냈다. 목적은 미술학교 입학이었다. 그런데 친구들을 만나면 영 딴판이었다. 독일민족의 순수성에 대하여 열변을 토했다. 유대인의 죄악과 불결을 논했다. 슬라브인은 배신을 밥 먹듯이 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엔나미술학교(the Vienna Academy of Fine Arts)에 두 번 응시. 두 번 다 낙방했다. 스물네 살 때인 1913년 미술가 되려는 꿈을 접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좌절 끝에 정치로 방향을 틀었다.
정신분석학자는 부평초였다. 네 살 때 가족이 비엔나로 이주했다. 인간의 마음의 비밀을 여는 데 성공했다. 정신분석학자(psychoanalyst)로서 승승장구했다. 1913년 그때 그는 쉰일곱. 명예와 부를 다 쥐었다. 유대인이었다. 영원한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결국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했다. 그 이듬해 세상을 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다.
비엔나 문화
비엔나를 상징하는 문화현상은 적지 않다. 왈츠(waltz)가 있다. 소시지와 커피도 빼놓지 못한다. 커피문화는 독특하다. 카페에서는 커피 마시며 신문을 읽었다. 케이크 먹으며 책을 봤다. 체스 두며 세상을 얘기했다. 지식인의 논쟁(debate)와 토론(discussion)의 장소였다. 새 사상이 전파되고 공유되는 프론티어(frontier) 지식인 사회였다. 규모는 작았다. 서로 다 알고 지냈다. 관용과 수용의 분위기였다. 유대인을 받아들였다. 반체제 인사도 숨겨 주었다. 신흥 상공업자가 인정받았다. 이들을 포함해서 걱정 없이 먹고 산 사람은 1500명 정도였다. 왕족과 귀족과 상공업자가 부유한 생활을 했다. 사는 지역은 반듯했다. 가로등도 밝았다.
그 이외의 시민 200만명은 슬럼에서 살았다. 적막했다. 1683년 비엔나를 침공하려다 실패한 오스만 터키 군의 배낭에서 발견했다는 커피. 이를 마실 여유가 없었다. 곤궁했다. 그 시대 백성들은 어디나 다 그랬다. 오늘날 카페와 커피는 비엔나 시민생활의 불가결한 일부다. 사람들을 만나고 소식을 듣는다. 유행을 선도한다. 첨단의 예술과 사상에 접한다. 프로이트가 비엔나에 살 때 애용했던 카페 란트만(Cafe Landtmann). 같은 해 히틀러와 트로츠키가 커피를 마시러 다녔던 카페 센트럴(Cafe Central)은 지금 이 시각에도 영업 중이다.
스탈린과 트로츠키
트로츠키는 1907년부터 1914년까지 비엔나에서 살았다. 도망 다니던 스탈린과 1913년 1월을 함께 지냈다. 나중에는 뜻이 맞지 않아 적이 됐다. 트로츠키는 지성파였고 이론가였다. 논리에 집착했다. 집요하게 설득하는 그에게 주위 사람들은 질리곤 했다. 존경하고 인정은 했다. 그러나 당원들은 따르지는 않았다. 주위에 사람이 적었다.
스탈린은 감정을 중시했다. 공포감과 회유의 효과를 잘 알았다. 타깃을 정하면 내 쪽으로 넘어오게 음모를 꾸몄다. 불안감을 조성했다. 한편으로는 적당한 자리를 제시했다. 동지들이 몰려들었다. 트로츠키는 제명-복권-유형을 반복했다. 추방당해 남미에서 숨어 지냈다. 오래 동안 곁에 있던 심복이 피켈을 휘둘렀다. 뒤통수를 맞아 죽고 말았다. 그 자는 스탈린이 심어 놓은 암살자였다.
트로츠키와 스탈린을 제외하고는 트로츠키-스탈린-프로이드-히틀러-티토가 비엔나에서 각기 만난 사실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단골 카페가 같았던 트로츠키와 히틀러. 혹시 “어, 어, 저 사람 같은 단골이잖아!”하며 서로 아는 체 했을 지도 모른다. 히틀러는 공산주의자를 혐오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