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안 이야기] (1) “샤마위스로 가는 길”을 시작하며

*쿠웨이트 <알아라비 매거진> 편집장이자 아시아기자협회 중동지부장, 아시아엔 아랍어판 편집장을 맡고 있는 아시라프 달리 기자가 이집트에서 쓴 소설 <샤마위스로 가는 길>을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이 소설은 아랍어로 나온 것을 지난 2008년 한국에서 번역해 출간한 것입니다. 2012년에는 이란어로도 번역돼 출간됐습니다. ‘샤마위스(Samawes)‘가 무슨 뜻일까요? 낯선 듯해도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곧 오랜 이집트를 여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이번 호를 다 읽으시면 ‘샤마위스’의 뜻도 곧 알게 되시겠죠. 자 그러면 [아라비안 이야기]로 떠나보실까요? -아시아엔(The AsiaN)

작가의 말

그곳에 가기로 결정하기 전 아마도 나는 ‘샤마위스’라는 이름을 두세 번 들은 것 같다. 나를 그곳으로 이끌게 했던 이야기의 기묘함만큼 거리는 멀지 않았다.
봄의 열기가 여름의 더위를 예고했다. 내 첫 번째 소설의 출간계약을 맺기 전까지 나는 책상의 컴퓨터 화면을 보며 지루한 날을 보냈다. 친구가 말했다.

“샤마위스 동네에서 자네는 천일야화를 보게 될 거야.”

나는 나일강을 끼고 마아디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떠났다. 이윽고 왼편으로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동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은 잔뜩 흐린 채 짙뿌연 색을 띠고 있었다. 그곳의 건물들은 대부분 사람이 안사는 죽은 자의 모습 같았다. 추측건대 한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샤마위스’로 가는 길을 찾아냈다. 나는 아스팔트 도로에서 비포장도로로 접어들었다. 신호등이 없는 광장처럼 생긴 넓은 입구를 넘어갈 때 나는 자동차 내부의 열기 때문에 가장 가까이 있는 나무 아래 자동차를 세워야만 했다. 물을 뿌리고 있던 이발사의 두 눈은 내가 그곳에 온 까닭을 찾고 있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켜야 했다. 아마도 나는 그에게서 첫 번째 이야기의 갈피를 잡게 될 것이다.

나는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를 이미 알고 있었던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우호적으로 내가 매주 글을 기고하는 잡지, 특히 정치에 관한 나의 기사를 읽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의아했다. 그 잡지는 월간이고, 내가 정치나 그와 관련된 글을 마지막으로 썼던 때가 대학 재학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정치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멀어졌다. 때로는 일 때문에, 때로는 과다한 업무로 인해,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려와 걱정 때문에 나는 정치와 거리가 멀었다.

나는 그에게 ‘샤마위스’라 불리게 된 까닭을 묻자 그는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질문에 준비라도 해온 듯 대답했다.

“선생님, 단연코 제가 그 이름에 관한 한 제일 믿을 만하지요. 사람들은 파라오시대 이름인 샴. 아우. 우스라고도 하고, 농장주 와실 파샤의 어머니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마리아 교회의 성직자와 교인들이 교회를 건립하기 전 살았던 곳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그 남자가 불만족스런 내 얼굴 표정을 읽은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덧붙였다.

“마으루프 준디 교수에게 물어보신다면 완전한 대답을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알라께서 그 분에게 건강을 주셨으니 그를 찾느라고 당신 자신을 지치게 하지 마세요. 커피를 드시면서 그 분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 분은 매일 농장의 가옥들을 지나가세요. 오랜 습관이죠. 저나 당신 때문에 그 오랜 습관이 바뀌진 않을 겁니다.”

정확히 30분이 안 돼 나는 무거운 걸음걸이와 흰색 턱수염으로 미루어 보아 60세가 넘은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검정색 상아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머리에는 손수가 놓인 모직 따끼야(테 없는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나 자신을 소개하자 이발사는 서둘러 가게 안에서 의자를 끌고 나와 큰 소리로 그 노인을 반겼다.

“우리를 밝혀 주시는 준디 선생님, 저희들과 함께 자리를 허락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이발사는 그가 했던 말의 속뜻을 설명했다.
“준디 선생님은 원래 인사만 하고 지나가세요. 당신 집 앞에만 앉으세요. 그 분은 건강을 타고 나시고 모두의 존경을 받고 계세요.”

준디가 나에게 말했다.
“1911년 그러니까 100년 전 아니 바로 그 전에, 이 지역에는 어떤 투르크인 소유의 큰 궁전이 있었어요. 약 15펫단(1펫단은 4200.833㎡)에 달하는 그 궁전은 여기서부터 나일강까지 펼쳐 있었죠. 그 가운데 농부들을 위한 일곱 내지 여덟 채의 진흙으로 지은 오두막이 있었고 그 해 와실 파샤란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상 이집트에서 그곳으로 왔어요.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어요. 그가 그 땅문서 기록실에 몰래 접근해 자신의 땅을 팔아 그 궁전을 산 것처럼 꾸몄단다. 그렇게 해서 그 모든 것이 와실 파샤의 소유가 됐단다. 수 펫단의 엄청난 땅, 그곳의 많은 일꾼들이 새로운 농장주의 일을 하기 위해 옮겨 왔단다. 몇 년 간이던가? 우리들은 그 땅을 배분받은 상당히 많은 와실 파샤의 집안사람들을 만났지. 그 후 약 30년이 지났을 때 남아 있던 마지막 집안사람들이 와서 농장 가장자리에 빌라 세 채를 지었단다.

물론 사람들은 목화, 감귤나무, 대추야자 대신 돌과 콘크리트 철근과 시멘트가 있던 땅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과거에 그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오늘 날에도 여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죠.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농장의 수 펫단의 땅 중 절반이 못쓰게 되어, 우리 자손들이 초록색의 땅을 보게 될지 아닐지 누가 알겠냐는 것입니다.”
마으루프 준디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모두가 농사꾼들이었습니다. 그 일은 10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두 번째 세대는 자식들에게 농사일을 물려주는 것을 원치 않았어요. 더욱이 홍수로 유실된 땅은 할아버지, 아버지, 자손의 여러 세대에게 충분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이 카이로 근교까지 이어진 철로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차를 사서 농장과 마아디 사이를 오가는 승용차로 임대를 주었고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했어요. 이집트 전역에 무상교육이 시행되던 시기인 50년대 그 지역에는 학교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이곳의 농장은 꽤 알려졌죠. 마아디 빌라들의 문지기들, 이집트 기차역에서 빈둥거리는 짐꾼들이 이곳 출신입니다. 그리고 농사를 짓지 않는 농부들도 이곳 출신입니다. 새로운 사실은 카이로의 옛 도시운하에 철로가 놓이자 타지로 나갔던 사람들이 자신의 땅을 확 바꾸러 돌아왔어요. 그들은 농사짓는 것을 빼고는 수천 번도 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양계 농장도 계획해보고, 토끼 사육장도 계획해 보았죠. 심지어 여전히 농사짓던 사람들은 감자와 감귤을 재배하려고 했어요. 그것은 감자 껍질을 봉지에 담아 팔고, 과일 찌꺼기를 병에 담아 파는 공장들로 생산물을 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으루프 준디는 이름의 비밀에 관한 나의 첫 질문이 생각나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이곳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당신이 수집한 바와 같이. 당신은 편안한 설명을 선택하겠죠. 내가 확신하는데 당신은 무크타르 선생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당신에게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마으루프 준디는 잔에 남아 있던 한 모금의 커피를 마셨고 그 커피는 혀를 타고 천천히 목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설명을 끝내려는 것 같았다.

“와실 파샤가 상 이집트에서 오기 전 그 땅 전체가 천국 같았어요. 당신도 나무 그늘 아래를, 대추야자나무 그늘 아래를 걸을 수 있었어요. 하늘이 보이지 않게 녹음 짙은 나무 그늘 말입니다. 해는 아주 잠깐만 볼 수 있었죠. 그래서 햇빛이 적어졌다는 의미의 ‘샤마위스(적은 햇볕들)’란 말이 불쑥 나온 것입니다. 한 할머니가 따가운 햇볕으로부터 손자를 지키기 위해 손자에게 소리치자, 손자가 ‘어떤 태양, 할머니. 정말 샤마위스일 뿐이에요!’ 라고 대답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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