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35년 한우물 한국일보 떠나는 ‘찐기자’ 이충재 주필

한국일보 이충재 주필

한국일보 이충재 주필이 만 35년 3개월의 기자생활을 끝으로 11월 30일부로 한국일보를 떠난다. 그는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의 최고 진짜 기자다. 나는 그와 세 번 출입처를 함께 하면서 경쟁을 했다. 기자 초년 사건기자(80년대 후반~90년대 초) 경찰서 출입기자로 ‘사쓰마와리’라고 부른다)와 국방부(1993년) 그리고 교육부(1998~99년) 출입기자를 통해서다. 나와 그는 1승1무1패라고 웃으며 말한다.

나는 이충재 주필을 통해서 ‘부지런함’과 ‘끈질김’ 그리고 무엇보다 ‘사사로움에서 벗어나야 함’을 보았고, 배우려고 애썼다. 물론 그에게 한참 미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내가 지난 30년간 지켜본 바를 이충재 주필의 한국일보 후배인 김지은 기자가 오늘 페이스북에 썼다.

김 기자, 이 주필과 통화하며 내가 보아온 이충재 기자考(그에겐 주필이란 직함보다 기자란 표현이 훨씬 더 적합하다는 게 내 오랜 생각이다)가 그다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이 기자에게 “광장에 나온 것 축하한다”고 했다. 지난 30년 한국 언론의 격동기에 진짜기자가 있었음을 <아시아엔> 독자들께 전하기 위해 나의 짧은 글과 한국일보 김지은 기자의 긴 글을 하나로 묶는다.


다음은 김 기자 페이스북 글이다.

이충재 주필이 어제, 뉴스레터 ‘이충재의 인사이트’ 종간을 고했다. 뉴스레터만 마침표를 찍는 게 아니라, “만 35년의 기자 생활을 마감”한다고도 알렸다. 갑작스런 소식에 마음에서 쿵, 하고 소리가 났다. 이충재 주필이 없는 한국일보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내가 아는 가장 지독한 신문쟁이는 이충재다. 누가 “너는 좌냐, 우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기자다”라고 답할 사람이 이충재 주필이다. ‘기자 이충재’의 마침표라니. 믿기지가 않는다.

11년 전 이충재 주필이 편집국장을 할 때다. 국장이 경찰팀 저녁을 사는 자리였다. 나는 그때 바이스(경찰팀 부팀장)였다. 사회부장까지 동석했으니 제대로 엄숙한 회식이었다. 국장이 갑자기 내게 말을 걸었다.

“네가 어제 올린 보고 재미있더라. ‘바이스 통신’? 그 메모도. 요즘 경찰청 분위기가 그렇구만.”

‘헉’. ‘바이스 통신’은 당시 경찰청 출입기자들끼리 웃자고 만든 ‘유머 반, 첩보 반’이 담긴 소식통 같은 메모였다. 내가 놀라서 되물었다. “국장께서 기자들 발제도 다 보세요?” 국장이 말했다. “그럼, 내 할 일이 그건데.” 정상원 당시 캡은 대수롭잖다는 표정으로 묵묵히 술을 들이켰던 것 같다. 부장도 아니고 국장이, 캡이 올리는 ‘종합 메모’도 아니고 팀원이 올린 보고까지 일일이 본다고? 게다가 내가 한국일보로 옮긴 지 1년이 안 된 때였다. 국장이 나를 알고 있는 것도 신기한데, 지적이 아니라 칭찬을 들었으니. 아직도 잊히지 않는 한마디다.

그로부터 9년 뒤, 논설위원실에서 주필을 다시 만났다. 당시 주필은 주필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상석 논설위원’. 나는 말석 위원이었다. 그때도 ‘삶도’ 인터뷰를 연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감하는 날이면, 나는 새벽에 출근했다. 오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당연히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논설실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외치는 소리가 났다.

“누구요?”

이충재 주필이었다. 서로 놀랐다. “일찍 출근하셨네요.” “나야 늘 이 시간이면 회사지. 근데 김지은씨는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그로부터 새벽에 출근하는 마감날이면, 내 자리로 오셔서 “이번엔 누구를 인터뷰 했냐” “보통 공이 들어가는 기사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병행하기가 힘들겠지만, 삶도는 계속해라” 조언을 해주셨다. 논설실이라는 ‘제2의 편집국’에, 막내로 합류해, 다시 수습이 된 것마냥 헤맬 때도 “별 거 없다, 그렇게 하면 된다”고 말해주는 주필이 계셔서 힘을 냈다. 백 마디의 지적보다 한마디의 ‘괜찮아’라는 말이 사람을 움직이는 더 강한 동력이라는 걸 몸소 알려준 분이다.

주필이 드디어 주필이 됐을 때, 가장 처음 하신 일은 두 액자를 주필실에 건 거였다. 하나는 한국일보 사설의 정신이 담긴 백상 선생의 “사설은 쉽게 써야 한다. 사설 제목은 시와 같아야 한다”는 글씨였고, 다른 하나는 우리 회사의 사시 ‘춘추필법의 정신, 정정당당한 보도, 불편부당의 자세’가 적힌 액자였다. 한국일보 기자의 본래 정신을 잊지 말자는 의미였다. 논설위원으로 있는 동안 아침 회의 때마다 두 글을 마주했다.

동시에 주필은 ‘논설실 개혁TFT’를 꾸렸다. 디지털 시대에 논설실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타사의 사례를 모으고, 아이디어를 내고, 계획을 잡았다.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준비하고 공부하며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 ‘아날로그 기자’가 주필이다.

주필은 휴가를 가지 않으신다. 휴가철이 되면 “어서 휴가들 잡으라”고 하시면서 정작 당신은 회사에 계신다. 심지어 토요일에도 회사에 나오신다. 배달된 조간들을 가지러. 아마도 1년 365일 회사에 나오는 유일한 한국일보 기자가 주필일 것이다.

그런 주필의 낙은 –내가 느끼기에- 점심 한 끼다. 특히 휴일 근무 때 출근한 논설위원들과 맛집에 가서 소주 서너 잔을 곁들여 맛있게 식사하는 것. 저녁에 약속이 있는 날을 빼면, 주필의 밥은 하루 한 끼다. 거기에다 하나를 더 하자면, 30판(지방판) 마감이 끝나고 홀로 주필실에 앉아 창문을 열고 고요히 피우는 담배 한 개피일까. 아마 담배도 하루 한 개피일 거다. 역시 ‘삶도’ 때문에 저녁 8시를 넘긴 시각, 주필실에 불이 켜져 있기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목격했다.

대개 선배 기자들은 사석에서 자신의 가장 빛났던 시절을 얘기한다. 나도 연차가 쌓이니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다. 의도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근데 이충재 주필은 자신이 힘들었던 시기를 어떻게 버텼는지 종종 얘기해줬던 드문 선배다. 그래서 나도 주저앉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충재의 ‘마지막’ 뉴스레터의 여는 문장이 마치 주필이 살아온 인생을 축약한 말 같아 오래 마음에 남았다.

“인생의 가치는 삶의 길이에 있지 않고, 그 삶을 무엇으로 채웠느냐에 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살아도 인생에서 그 가치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치를 발견하느냐 못하느냐는 몇 년을 살았다는데 있지 않고, 그것을 얻기 위해 얼마나 애썼느냐에 달려 있다. -몽테뉴 <수상록>”

내 가장 가까운 사람은, 당장 오늘부터 뉴스레터가 배달되지 않으니 서운하다고 했다. 이충재의 인사이트는 지독하게 애써온 ‘기자 이충재’가, 지독하게 애써서 채워온 뉴스레터다. 모르긴 해도 매일 신문 만드는 심정으로 쓰셨을 거다. 원래도 새벽 6시면 회사에 나오는 분인데 뉴스레터를 쓰느라 출근시간을 더 당기셨다고 했다. 그래도 아마 기꺼우셨을 거다. 기자일 때 가장 행복할 분이니. 마지막 뉴스레터에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이유가, 그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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