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한국백혈병환우회, 들어보셨는지요?
지난 6월 15일은 백혈병환우회 21번째 생일이었다. 이날 안기종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래와 같이 썼다.
“지난 21년을 돌아보면 백혈병·혈액암 환자의 투병과 권익 증진을 위해 열심히 뛰어왔지만, 항상 겪는 어려움이 재정 부족입니다. 급여를 제때 받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괜찮은데, 환자를 위해 꼭 해야 할 공익활동도 재정이 부족해 못할 때의 그 안타까움은 활동의 의욕마저 꺾기도 합니다. 그래서 창립기념일에 백혈병환우회 나이에 천배, 만배, 십만배 만큼의 0을 붙여 기부하며 축하와 응원하는 ‘백혈병환우회 스페셜데이 기부 365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아래 짧은 영상을 꼭 한번 봐 주시고, 스페셀데이 기부에 참여해 주십시오. 힘들고 어려울 때 돕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죠. 백혈병환우회는 지금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입니다. 기부로 힘을 주십시오.”
기자는 안기종 대표와 2004년 보건복지부 혈액관리위원회에서 외부 위원으로 함께 참여했다. 매월 1~2차례 당시 과천 보건복지부 과천 보건복지부 청사 회의 때마다 4년 정도 만남을 이어갔다. 당시 위원장은 한규섭 서울대 의대 교수가 맡았으며, 필자는 민간위원 측 간사, 보건복지부 측 간사는 정은경 팀장(훗날 질병관리청장)이 맡았었다. 안 대표는 백혈병 환우들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이끌어내는데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당시는 환우회 설립 3~4년 뒤가 아니었나 싶다.
안 대표와 기자는 상당 기간 주로 SNS를 통해서 만남을 이어갔다. 그의 백혈병 환우들에 대한 지극한 열정은 나이가 들수록 더욱 샘솟듯 했다. 백혈병환우회 창립 21돌 되던 날 윗글 바로 앞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백혈병환우회가 태어났기 때문에 제 아내가 표적치료제 ‘글리벡’을 복용해 지금까지 살고 있고, 제가 환자단체 활동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대로 백혈병환우회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내는 하늘나라로 갔을 확률이 아주 높고, 저는 당시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이었으니까 법조인이 되었거나 아니면 영농후계자가 되어 부모님과 함께 경주에서 농장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후자의 인생보다는 아내가 현재 살아 있고, 제가 환자단체 활동가가 된 것이 몇 백배 좋고 감사합니다. 백혈병환우회 회원 중에는 저와 같은 고백을 하는 백혈병·혈액암 환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백혈병환우회의 존재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1년의 백혈병환우회 활동이 의미 있었다면 앞으로의 활동은 더 의미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한편 지난 6월 14일은 ‘세계 헌혈자의 날’이었다. 헌혈의 중요성을 전하고, 헌혈자에게 감사하기 위해 국제적십자사연맹, 세계보건기구, 국제헌혈자조직연맹, 국제수혈학회가 함께 2004년 지정했다.
지난 3년간 코로나로 비대면으로만 진행된 기념행사가 올해는 4년 만에 모처럼 광화문광장에서 대면으로 거행될 예정이었지만, 행사 시작 직전 호우성 강우로 취소됐다. 헌혈유공표창 수상자들과 헌혈자들의 많이들 아쉬워했을 것 같다.
안 대표 역시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이들을 위한 특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해야 할 거 같다”며 “혈액으로 수혈을 많이 받는 백혈병과 혈액암 환자들이 모인 한국백혈병환우회 대표로 헌혈자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고 했다.
기자는 최근 안 대표로부터 백혈병환우회는 정부나 공공기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백혈병·혈액암이나 혈액관리 등 정부의 의료정책을 감시하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만큼 백혈병환우회의 순수성과 투명성은 높은 반면 재정적 압박이 얼마나 심할지 짐작이 간다.
백혈병환우회의 역할 중 하나가 헌혈증서를 기부 받아 환우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기자는 그동안 헌혈 후 받아둔 증서 3~4장을 전달해, 무척 뿌듯했다. 격월로 할 수 있는 정기헌혈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아울러 이 글 모두에 나온 것처럼 내 나이의 1,000배 금액을 전했다. 공식 후원계좌를 통해서다. 나의 조그만 마음이 환우와 가족들에게 미소를 줄 수 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 아닌가?
아래 링크 유튜브도 한번 시청해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