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순의 커피인문학] 구한말부터 IMF까지 ‘한국 커피 굴곡사’···”커피는 불화 속에서 발전한다”
[아시아엔=박영순 <아시아엔> 커피전문기자] 국민 1명이 하루에 커피를 2잔씩 마시는 나라, 한해동안 성인 1인당 마시는 커피가 430잔을 넘는 나라, 커피전문점이 전봇대만큼 흔한 나라…
한국의 커피열풍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된다 싶으면 빠르게 쫓아가는 우리 겨레의 근성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최근 5년간 국내 커피시장은 매년 20% 성장가도를 달려 지난해에는 4조원을 넘어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커피가 단일품목으로서는 전세계에서 석유 다음으로 많은 물동량을 과시한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커피로 꿈을 키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커피에 인생을 걸겠노라’ 기차에 올라탔긴 했는데, 안에서 보는 풍경은 결코 낙관적이진 않다. 한없이 영역을 늘려갈 것만 같았던 커피시장이 알고 보니 살벌한 제로섬게임(zero-sum game)의 전쟁터 아닌가. 질주하는 ‘설국열차(Snowpiercer)’ 안에서 먹을거리는 한정돼 있어 임계점을 넘은 입들은 가차 없이 창밖으로 내던져질 판이다.
기차 안은 인스턴트커피와 원두커피 양진영의 공방이 치열하다. 기차 뒷켠에서 기죽어 지내던 원두커피가 어느새 공간의 40%를 넘어서 절반을 차지하겠노라 으르렁대고 있다. 어떻게 해야 냉혹한 커피생태계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 커피에 뛰어들려고 하니 “상투 잡는 거야”라는 비아냥거림이 나올 것만 같다. 어디를 비집고 들어가야 살 수 있을까?
한국의 커피역사를 자세히 뜯어보면 굴곡(屈曲)이 있었고, 부침(浮沈)도 많았다. 커피는 불화(不和) 속에서 발전해왔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합의를 추구하기보다는 불화를 용인하는 것이 차라리 민주주의의 핵심이다’는 명언에서 빌린 이 명제는 ‘커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멋진 프레임(frame)이 될 만하다.
한국 커피의 시작은 구한말 아관파천(1896년) 때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나라님부터 즐긴 커피는 최고급 공간인 인천 대불호텔(최초의 서양식 호텔, 1989년), 손탁호텔(서울 최초의 호텔, 1902년), 조선호텔(1914년) 등을 중심으로 고관대작들의 문화생활로 금세 둥지를 틀었다. 커피가 국민들의 일상에서 목격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일본 사람들이 명동에 다방을 열면서부터다. 한국인이 차린 다방은 1927년 영화 ‘춘희’를 만든 이경손 감독의 ‘카카듀’다. 이를 시작으로 배우 김용규의 ‘멕시코다방’, 건축가 이순석의 ‘낙랑파라’, 천재 시인 이상의 ‘제비’ 등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문화적-비생산적 활동을 추구하는 유한계급(leisured classes)에게, 커피는 명품가방을 소비하는 심리처럼 자신을 과시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이처럼 커피가 지식인들의 문화적 취향을 표출하던 트렌드는 한국전쟁 직후까지 이어지다가 1960년대 들어서 전환점을 맞는다. 미군 PX을 통해 유통량이 넉넉해진 커피는 ‘유한계급들의 문화소비’를 동경하던 대중 사이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당시 비즈니스를 고민하던 사람들에게는 커피는 지금처럼 노다지로 보였을 법하다.
어여쁜 아가씨가 건내는 커피 한잔의 매력 ‘마담커피’ 전성시대
만약 당신이 그 시대에 살았다면, 지식인들이 운영하던 ‘고품격 다방’을 꺾기 위해 어떤 전략을 썼겠는가? 여러가지 시도가 있었지만, 공룡에게 갑작스레 다가온 빙하기처럼 ‘지식인다방’을 멸종시킨 것은 예쁜 레지와 눈웃음치는 마담을 내세운 다방의 등장이었다. 이른바 ‘마담다방’은 1990년대 스타벅스로 대변되는 원두커피전문점이 부흥하기 이전인 30년간 전성기를 구가한다.
지식인다방과 마담다방이 내던 ‘불협화음’?속에서 커피는 ‘대중화’라는 소중한 자산을 얻게 된다. ‘전국의 사장님들은 모두 마담다방에 몰려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가 극에 달할 즈음, 수상한 기운이 감돈다. 1976년 동서식품이 커피믹스를 개발한 데 이어 2년 뒤인 1978년에는 커피자판기가 깔리기 시작한 것이다. 뜨거운 물에 믹스봉투를 툭 털어 넣는 것만으로 다방커피 못지않은 커피를 사무실에서 즐길 수 있게 되고, 커피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 역시 자판기 주변 벤치나 휴게실 등지에서 심심찮게 목격됐다. 기세등등하던 마담다방도 이내 풀이 죽게 됐다.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도 워크맨(Walk Man, 1979년)을 필두로 한 휴대용 카세트플레이어가 보급되면서 인기가 사그라들긴 했지만 말이다.
지금 당신이 1979년도에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같이 여러 주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커피업에 뛰어들겠는가?
물론 마담다방이 바로 꼬리를 내린 것은 아니다. 마담다방에 한줄기 희망은 1982년 1월5일 급작스레 터져 나왔다. 37년간 밤을 묶어 두던 야간통행금지가 풀리면서 마담다방은 심야다방이라는 옵션을 장착하며 ‘빅뱅시대’로 접어든다. 1996년 다방의 수는 전국적으로 4만1008개소를 기록하고 이후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마담다방에 치명타를 날린 것은, ‘커피 본연의 맛을 추구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1988년 ‘자뎅’을 신호로 문을 열기 시작한 원두커피전문점들이었다.
1988서울올림픽이 불러온 ‘원두커피 르네상스’
당시 커피비즈니스를 노리던 사람들이라면 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나온 ‘커피수입 자유화'(1987년)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했어야 했다. 커피수입 자유화로 ‘원두커피’를 수입하고 유통하는 업체들이 급증하면서, 커피업의 대세를 쥐고 흔들 핵심 코드가?지금의 ‘스페셜티 커피’로 바뀐 것이다. 이는 곧 1920~1930년대 지식들이 손수 추출해주던 원두커피로의 귀환이요, ‘원두커피의 르네상스’였다. 이 코드는 지금까지 유효하다. ‘특별한 원두커피’는 1970년대 초, 전세계적으로 스페셜티 커피가 불러일으킨 ‘제3의 물결’을 관통하는 코어메시지다.
커피 본연의 맛, 스페셜티 커피가 주는 차별화된 맛을 스타벅스나 커피빈, 파스쿠치와 같은 대형 커피전문점에서 찾는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그러다보니 스페셜티 커피의 가치와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커피를 직접 볶아 서비스하는 로스터리 카페가 커피업계의 화두로 등극하고 있는 시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로스터리 카페를 불러온 것은 1997년 12월3일 ‘IMF 구제금융 요청(국가부도위기)’이라는 ‘국가적 불화’였다.
고환율이 원두커피 수입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자 생두수입업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생두를 일단 볶아야 한 잔의 커피가 되는 것이 아닌가. 이 때 커피로스터리사업이나 로스터리 카페의 싹을 볼 줄 알았던 사람이라면 지금 확고한 자리를 잡고 있을 게 분명하다. 지금 우리는 그런 분들을 손으로 쉽게 꼽을 수 있다.
커피 사업의 성공여부를 두고 ‘된다’?’안 된다’ 시대를 원망하지 마라. 시대의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접점, 그 ‘불화의 현장’에서 커피가 나갈 미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치열한 커피?시장에서 찾을 수 있는 코드는 ‘스페셜티 커피(Specialty coffee)’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