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덕혜옹주’ 사실 왜곡과 아관파천 길 복원을 보자니···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영화 <덕혜옹주>를 두고 말이 많다. 특히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런 오해의 위험성은 이미 있었다. 때문에 이런 종류의 영화를 만들 때는 제작자는 조심에 조심을 한다. 반드시 영화시작 전에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팩션(fact+fiction)이다”라는 것을 자막에 넣고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가 상영되다 보면 관중은 여기에 빠져들고 자칫 사실(史實)과 혼동할 수 있다. 실은 제작자들은 은근히 이를 노리면서 팩션이라는 치장을 덮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사실과 허구는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덕혜옹주가 독립운동에 가담치 않았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영친왕 이은(李垠)에 대한 오해는 이보다 크다. 종전 후 영친왕은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일본에 머무르려 했는데 오히려 일본에서 한국으로의 귀환을 종용했다고 한다. 조선의 왕손이니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냐는 명분이었지만 자기들 황족들 대우도 어려운 터에 조선 이왕가(李王家)를 뒤처리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영친왕은 비록 인질로 잡혀 갔지만 후에 아카사카호텔로 바뀐 일류 저택에서 생활하였다. 또 군에서 중장으로 육군항공사관학교 교장까지 지냈다. 이만큼이라도 대우받는 생활에 익숙했던 이은은 일본을 떠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영친왕 귀국은 이승만의 한국정부도 반대했다. 국가를 잃어버린 조선왕조의 후예가 한국에 무슨 낯으로 돌아오며 돌아와서 무슨 일을 할 것이냐는 것이었다. 일본 천황가 역시 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메이지유신이라고 하나 메이지(明治)가 한 일은 없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야마가타 오리토모(山縣有朋) 등이 했다. 메이지는 존재했을 따름이다. 다이쇼(大正)는 병치레가 잦아 그나마 역할도 하지 못했고, 히로히토(裕仁)에 이르러 일본은 패망했다. 일본의 천황가가 이럴진대 패망한 조선의 왕손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조선에서는 태조로부터 성종에 이르기까지는 국왕이 통치력을 행사하였으나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나고 다시 광해군이 신하들에 의해 축출된 이후에는 국왕은 거의 허수아비였다. 국권은 정권을 쥔 사대부에 흔들렸으며 순조 이후에는 척족세도에 흔들렸다. 권문세가는 될성부른 왕손은 찾아내어 씨를 말렸다. 세종 이후의 영주(英主)인 정조대왕의 독살설은 남인들 사이에 뿌리가 깊다. 흥선대원군이 이를 바로 잡아보려 하였지만 명성황후와의 대립으로 나라가 망했다. 지난 8월 29일은 1910년 나라가 망한 지 106년째 되는 날이었다.
조선 왕족 중에 이우공이 기골이 있었다 하나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 왕족은 유럽에서와 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가지도록 길러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왕족이 아닌 사대부 이회영(백사 이항복의 후예) 등에 의해 이어졌다.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는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 황제에 올랐다가 일본이 패전하자 소련군 포로가 되고 중국에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오래 동안 복역하였다. 일본이 패망한 후 미군이 진주한 일본에서의 대한제국 구황실의 운명은 이보다는 나았다.
고종이 아관파천했던 길을 복원한다고 한다. 그것이 그렇게 남길 만한가? 그런 논리라면 명성황후가 칼로 난자되어 불태워졌던 곳도 복원하면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올 것이다. 오호라! 이것이 현재 우리 정치인과 관료들의 역사의식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