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김영삼이 대권을 장악한 92년 말을 전후하여 여야 계파들은 크게 두 흐름으로 다시 이합 집산한다. 그 중 두드러진 변화는 14대 대선을 앞둔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김영삼이 대권을 장악한 92년 말을 전후하여 여야 계파들은 크게 두 흐름으로 다시 이합 집산한다. 그 중 두드러진 변화는 14대 대선을 앞둔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민자당 합당결과를 놓고 김대중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구 신민당 분당 이후 무소속으로 남길 원한 이기택계는 김대중 곁으로 다가선다. 이들의 접근 여부와 관계없이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신민당 3세대의 내분과 해체, 새로운 분당 조짐에 따른 일련의 정치파행사가 비극의 시발점이다. 12대 총선 후 정국의 파란은 대통령제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민정당 집권 2기의 파쟁과 내분은 2공 당시 민주당 신·구파의 그것과 유사한 꼴이었다. 민정당 신주류와 수구파 간 갈등은 결국 쟁점화된 현안 해결보다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5공 말 전두환과의 불협화음 청산과 전두환의 친인척 비리공개 및 사법부 재판에 따른 고충, 그리고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여론재판의 후유증 등을 앞에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박정희가 거세되고 김종필마저 위축·배제된 상태에서 제도 권력을 넘겨받은 최규하는 난국을 수습할 수 없었다. 그에겐 행정 관료의 이미지만 가득했다. 전두환은 정치적 과도기를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국가 명운(命運)에 관한 전두환의 거의 절대적인 자율과 그를 향해 접근한 수많은 인간들의 정치적 관계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그 역시 단순한 동기에서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신민당의 세력판도는 양김이 가르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철승·김재광·이기택·신도환’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왜 이들이 신민당이란 급조 야당에 일시적으로 대거 집결했는지는 전혀 의문대상이 되지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0·26에서 5·17까지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3김은 모두 대권을 놓고 자신들의 세를 규합하기 위해 애쓴다. 특히 김종필은 과거의 한을 달래며 못다 한 정치활동과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10월 유신 후, 9대국회에서 유신정우회가 등장하자 공화당은 원내 제2교섭단체로 전락한다. 박정희는 73년 3월8일, 정일권 국회의장, 백두진 유정회 대표, 이효상 공화당 의장과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표의 반란’으로 김용태 총무단이 사임하고 중도적인 김성진 총무아래 부총무에는 현오봉·김준태·구태회·김우경 등 비주류계가 들어간다. 또 비주류계인 이효상 국회의장이 사표를 내고(후에 반려) 쿠데타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파쟁의 불씨는 특히 사무국의 이원 조직에서부터 싹튼다. 출신배경을 달리하는 인적구성으로부터 파쟁을 향한 이질적 신호가 울려나온 것이다. 민정이양을 전후한 1963년 1월, 공화당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김영삼은 총재로 선출된 뒤, 박정희 대통령과의 정치요담 결과 공개여부를 둘러싸고 비주류계의 신랄한 공격에 부딪힌다. 비주류는 이철승·고흥문·정해영·신도환·김원만·정운갑 등이 연합세를 형성하는 판도로 발전해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온갖 계파들이 치열하게 충돌할 망정, 독자계보를 튼실히 지탱하려면 정치자금과 인간적 아량(혹은 매력)은 절대 필요한 변수들이다. 이를 반증해주는 대표사례가 신도환과 이기택이다. 신도환은
[아시아엔=박종성 서원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통합전당대회 당시 당 안에는 민정계·신한계·민주계·재야중도계·유진오 직계·구 자유당계·혁신계 등 잡다한 계파들이 어지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5·3 대선 후 윤보선이 참패하자 그는 2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