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미 카터 ‘방북의사’ 오보의 전말
[이주의 키워드] anonymity 익명의 위험성
북한 핵위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가운데 지미 카터가 등장했다. 카터 전 미 대통령이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 북한방문 의사를 밝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는 몇 차례 방북특사로 활약한 바 있어 이런 국면에서 한번쯤 떠올릴 만한 인물이긴 하다. 그런데 그 보도가 아무래도 미심쩍다.
우선 이 소식은 한국 언론에서만 크게 다뤄졌다. 정확히 말하면 5월2일 <연합뉴스>에서 ‘특종’ 보도한 뒤 각 매체에 거의 그대로 실렸다. 제목도 ‘카터, “북한 방문하고 싶다”’ 등이었다. 그런데 한반도 긴장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세계 언론들은 왜 이 뉴스를 다루지 않았을까. 특히 북한문제를 놓고 한국·미국·중국이 고도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판에 미국 유력언론들이 왜 이런 민감한 사안을 무시했을까.
한마디로 새로운 소식이 아닌 ‘구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자의 ‘위험한’ 작문 솜씨가 빚어낸 오보였다. 보도가 나온 과정을 되짚어보자.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은 지난 4월22일 펜실배니아주 이스튼에 있는 라파예트 대학 강연에서였다. 그는 미국의 외교정책 전반에 대해 논평하면서 북한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미국과의 평화협정이다. 그리고 60년간 계속된 경제제재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와 동등한 무역기회를 갖기를 원한다. 북한은 편집망상증의 나라다. 그들은 미국이 자신들을 공격해 공산주의 체제를 말살시키려 한다고 진짜로 믿고 있다. 평화를 얻으려면 미국은 북한의 김정은 정권과 대화해야 한다. 나는 지난 주 존 케리 국무장관에게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그의 북한 관련 언급의 전부다. 즉 편지를 보낸 것은 그가 스스로 얘기했다. 보낸 시기는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북한의 태양절(4월15일) 전후다. 그러나 그 편지에 직접이든 간접이든 자신이 중재자로 방북하겠다는 얘기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이, 그 얘기를 한 열흘 뒤 뒤늦게 ‘방북 의사’로 해석된 것이다. 그 과정에 기자의 ‘추측’이 작용했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확인된 사항이 있다면 당연히 더 구체적으로 적시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추측이 여기서 그쳤으면 그래도 다행이다. 이 기사는 한발 더 나가 “카터 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나선 것은 과거 사례를 감안할 때 북한의 초청을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추측을 전제로 한 2차 추측이다.
여기에 지난해 11월부터 북한에 억류중인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 구출이란 그럴싸한 방북목적이 덧붙었다. 그러나 이 또한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민감한 시점에 북한의 언행까지 작문의 대상이 된다는 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은 마침 이 보도가 나온 5월2일 반공화국 적대행위 죄로 그에게 15년의 노동교화형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기자가 내세운 근거가 바로 ‘익명을 요구한 소식통(a source requesting anonymity)’이다. ‘anonymity’는 희랍어 어원에서 유래한 ‘이름 없음’이란 뜻이다. 요즘 유명해진 국제 해커조직이 차용한 ‘anonymous’의 명사형이다.
언론보도에서 취재원이 이렇게 익명으로 숨을 때 진실게임이 벌어지곤 한다. 미국에서는 최근 총기난사 사건 관련 보도에서 기사내용의 진위가 문제되면서 취재원 공개를 거부한 폭스뉴스 여기자가 구속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번 카터 ‘방북의사’ 보도에서 과연 익명으로 가려진 소식통은 누구일까. 워싱턴 주재원일 수도 있고, 냉정하게 말하면 기자 자신일 수도 있다.
미국정부 관계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문제의 기사는 “카터가 북한에 여행하는 데 정부의 승인을 받을 필요가 없고, 그런 여행 문제는 카터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라는 미 정부관리의 ‘희극적인’ 코멘트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코멘트도 영어기사에만 미 정부관리 말로 인용됐고, 한글기사에는 익명의 소식통이 한 얘기로 돼 있다.
사실 최근 미국 조야의 동향, 중국과의 협의 등을 정밀하게 관측해 보면 카터 방북은 그 자체로 성사 가능성이 없는 뜬금없는 일이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해 북한 비핵화와 개방에 관한 협력을 끌어 내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혼선을 자초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한편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측은?2일(현지시간)?”카터 대통령이 방북 초청을 받은 적도, 북한을 방문할 계획도 없다”고 밝히면서?방북의사가 없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