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 거스른 IOC의 ‘레슬링 퇴출’ 결정

[이 주일의 키워드] core sports

올림픽위원회(IOC)의 레슬링 종목 퇴출 결정이 국제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러시아와 일본 등 경제강국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레슬링 구제를 위한 서명운동이 시작됐다. 한국의 대한레슬링협회도 서명운동을 벌이겠다고 나섰다.

IOC는 TV시청률 등 여러 항목을 객관적으로 평가했다고 하지만, 이 귀족적인 스포츠권력기구가 뭘 결정했다 하면 배후요인으로 돈과 이권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그동안의 학습효과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방송중계권료와 기업 후원금이 배후동기로 거론된다.

IOC가 집행위원회 결과 ‘살생부’ 종목을 발표하면서 나온 용어가 ‘core sports(핵심 종목)’다. 25개 종목을 지칭한 이 ‘core’라는 말에 레슬링 탈락에 반대하는 세계 언론, 체육인, 대중의 질시가 쏠리고 있다.

무슨 종목이 올림픽의 핵심가치를 담고 있느냐를 너무 자의적으로 판단한다는 불만이다. 그동안엔 애꿎은 ‘core’라는 말 대신 ‘official(공식)’이란 용어가 더 친숙하지 않았나 싶다. 앞으로 검토대상인 12개 종목은 ‘candidate sports’라고 발표됐다.

경기종목들을 의미하는 ‘sports’란 말도 생소하게 들린다. 지금까지는 ‘game’ 이나 ‘event’란 말을 주로 써왔기 때문이다. 여러 종목이 경합한다는 의미에서 올림픽을 ‘Olympic Games’ 또는 이를 줄여? ‘Olympics’로 표기해오지 않았던가.

올림픽 종목 선정을 둘러싸고 논란은 결코 낮선 일이 아니다. 매 회 종목을 결정하면서 회원국간 유불리에 따라 스포츠 외교전이 벌어져왔다. 음모와 배신, 부정부패가 횡행하기도 했다. 현재 공식종목의 큰 틀 자체가 국가·인종·문화권·지역간 힘겨루기의 결과물이다.

예컨대 사이클(금메달 18개), 카누(금메달 16개), 조정(금메달 14개), 요트(금메달 10개) 등 은 대대로 IOC에서 큰 힘을 써온 서유럽·북미 국가들이 메달을 독식해온 종목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이들 종목의 금메달 58개 가운데 유럽 국가가 아닌 나라는 요트에서 금메달을 하나 딴 중국과 사이클에서 각각 하나씩 금메달을 딴 콜롬비아와 카자흐스탄뿐이다.

34개 금메달이 걸린 수영 종목의 경우 47개 금메달이 배정된 육상보다 선수와 향유인구가 훨씬 적은데도 상대적으로 많은 세부종목이 배정됐다는 지적이 있다. 육상은 흑인이, 수영은 백인이 독식하는 구도이기 때문에 나오는 얘기다. 그 외 태권도·유도·권투 등 격투기와 야구·테니스 등 구기 종목을 둘러싼 각축전은 차라리 현실세계의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레슬링의 퇴출만큼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레슬링은 육상·전차경주·승마 등과 함께 고대올림픽 종목이었고, 근대올림픽 부활 이후 단 한차례 1900년 올림픽만 빼고 계속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온 터주대감 종목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레슬링은 단순한 격투기가 아니라 전인교육을 지향한 엘리트 육성 커리큘럼의 일부였다.

사실 초기 근대올림픽 종목을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어처구니 없는 것들이 많았다. 근대올림픽을 부활시킨 1896년 아테네올림픽은 육상·사이클·펜싱·체조·사격·수영·테니스·역도·레슬링 등 9개 종목으로 시작됐다. 이후 온갖 잡다한 종목이 올림픽 무대에서 명멸했다.

1900년 파리 세계박람회의 부대행사로 치러진 제2회 파리올림픽에서는 역도와 레슬링이 빠진 대신 양궁·크리켓·축구·골프·폴로·조정·럭비·줄다리기 등 13개 종목이 추가됐다. 수영 경기의 경우 파리 센강에서 열렸는데, 일반적인 빨리 헤엄치기 외에 보트로 장애물을 쌓아 잠수로 통과토록 하는 장애물경기도 있었다.

사격에서는 오늘날 ‘평화의 상징’으로 여기는 비둘기를 날려 쏘아 떨어트리기가 등장해 스포츠 종목으로서 부적절하다는 비난을 샀다. 승마에서는 말을 타고 높이뛰기와 멀리뛰기 경기가 열렸다. 이밖에 정식종목은 아니지만 낚시와 기구 띄우기, 대포 쏘기, 연 날리기, 화재 진압하기, 인명구조, 오토바이 경기 등 오락성 짙은 다채로운 경기들이 열려 관람객들의 눈길을 끌었다.

1924년 파리 올림픽까지 존속했던 줄다리기는 인기 만점의 종목이었다. 제한시간 5분 안에 상대 팀을 180㎝ 이상 끌어 당기면 이기는 방식이었는데, 위험 종목으로 분류돼 퇴출됐다.

파리 올림픽에 이어 다시 한번 세계박람회에 곁방살이를 한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서는 승마·럭비·조정 등이 빠지고 권투·아령·라크로스·10종경기 등이 새로 등장했다. 모터보트·싱글스틱·크리켓·폴로 등도 한때 올림픽 종목에 이름을 올렸다.

IOC가 정치·상업주의 논리에서 휘둘려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 레슬링 퇴출 사태만큼은 역풍을 막아내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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