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키워드] gang rape, ‘성범죄’ 고질병 도진 인도사회

인도사회는 유난히 우울한 분위기 속에 새해를 맞았다. 집권 국민회의당과 사회단체들은 연례 신년 축하행사를 취소하고 ‘자숙 모드’에 들어갔다. 지난해 말 뉴델리 버스 안에서 발생한 여대생 집단 성폭행(gang rape) 사건 여파 때문이다.

추모?항의집회가 이어지는 가운데 새해 들어 시작된 강간범 6명에 대한 재판에서 변호사들은 변론을 거부했다. 대중의 질책이 그만큼 따갑다는 뜻이다. 정치권에선 화학적 거세니, 처벌 강화 같은 판에 박은 대책을 들고 나왔다.

언론은 이번 집단강간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묻혀왔던 각종 성범죄를 집중 보도하고 있다. 미성년자 납치 성폭행부터 성폭행 신고 뒤 사법당국의 불신에 부닥쳐 자살한 학생의 사연, 아들에게 성폭행 당한?뒤 살해당한 어머니 사건 고발 등 갖가지 행태가 터져 나왔다.

온 나라에 성범죄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한 분위기다. 문제는 이것이 일과성에 그치지 않고 제도와 사회적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느냐다.

인도가 ‘성범죄 천국’임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이 총으로 망할 지경이라면, 인도는 성범죄가 망국병이다. 실제로 성범죄는 인도의 사회기강을 무너뜨리고 국가경쟁력을 저하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2011년 경찰에 신고된 강간사건만 2만4000여건, 성추행?성희롱, 납치 사건은 22만8600여건에 이른다. 그러나 이런 숫자는 인도사회의 여성 비하, 성범죄 의식 수준을 감안하면 별 의미가 없다. 신고되지 않고 묻혀버리는 사건이 수십~수백배 더 많기 때문이다.

인도의 성범죄는 여성의 낮은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된다. 성적 불평등은 흔히 태아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태아감별로 여아들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스러진다. 인도는 주요국 중 여성인구 비율이 가장 낮다.

양육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음식과 교육, 의료에서 훨씬 낮은 처우를 받는다. 결혼할 때 지참금을 가져가야 하므로 가난한 집안에선 딸을 덜어내야 할 짐으로 여긴다. 그래서 18세 이전에 내쫓기듯 결혼하는 인도 여성이 44.5%에 이른다.

만연한 가정폭력 또한 성범죄에 관대한 문화에 한 몫 해왔다. 2012년 유니세프 보고서에 따르면 15∼19세 소년의 57%, 소녀의 53%가 부인은 맞아도 된다고 응답했다. 실제로 상당수 여성이 남편에게 맞는 것은 자신 탓이라고 여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법당국과 대중이 성범죄에 대해 무감각하고 웬만하면 피해자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인도의 한 여성 언론인은 이런 풍토를 아예 ‘강간 문화(rape culture)’라고 지칭했다.

뉴델리의 여기자 암릿 딜론은 “성차별 의식이 워낙 뿌리 깊은 탓에 이번 사건이 촉발시킨 분노도 결국 슬프게 사그러들 것”이란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다.

영국의 톰슨 로이터 재단은 지난해 G20 국가의 여성 지위에 관한 조사에서 인도를 최하위 국가로 평가하며 여성 노예시장, 인신매매, 감금, 폭력, 학대 등을 사회악으로 꼽았다. 참고로 이 조사에서 한국은 중간인 10위를 차지했다. (1~9위: 캐나다, 독일,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일본,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인도는 세계 제2의 인구대국으로 중국에 이은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는 나라다. 질 높은 인력과 함께 풍부한 자원, 영어 공용, 실용정신 등이 인도의 강점이다.

그러나 다수의 국제관계 전문가들이 계급, 종교, 빈부, 지역, 언어 등으로 갈라진 인도사회의 분열상을 도약의 걸림돌로 보고 있다. 그 핵심에 성차별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여성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한 사회통합도 경제개발도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