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위협 덮은 미국의 ‘치안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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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위에 서리 오고, 엎친 데 덮친다더니 미국이 지금 그 꼴이다. 보스턴 마라톤 테러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텍사스 비료공장 폭발사고가 터졌다. 독극물 편지까지 나돌아 뒤숭숭하다. 이번 사건들은 세계 최고를 자랑해온 미국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막강한 공권력을 행사하는 온갖 법집행기관이 두 눈 치켜 뜨고 있지만 총기난사, 치안사범은 끊이지 않고 테러사건마저 속수무책이다. 9·11 이후 치른 ‘테러와의 전쟁’과 대테러 전담부서로 신설된 국토안전부가 머쓱할 따름이다. 미국이 상습적 치안불안 상태인 ‘중동화’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이처럼 많은 인명 피해를 낳는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늘 쓰는 말이 ‘casualty’다. 사망자와 부상자를 합친 사상자를 뜻한다. 보통 사상자가 1명 이상일 경우가 많으므로 ‘casualties’라는 복수형으로 쓰게 된다. 보스턴 테러의 경우 그 수가 180여명, 공교롭게 텍사스 폭발사고도 비슷한 피해규모다.
‘casualty’는 ‘무심한, 격식을 차리지 않은, 가벼운’이란 뜻의 형용사 ‘casual’의 파생어다. 그런데 두 단어의 의미가 서로 통하지 않아 의아스럽다. ‘casualty’가 의미 굴절을 겪었기 때문인데, 그 과정을 밝히려면 약간의 조사가 필요하다.
‘영어의 기준’ 옥스포드영어사전(OED)에 따르면 ‘casual’은 15세기부터 사용됐다. 어원을 따지고 올라가면 ‘우연’을 뜻하는 라틴어 ‘casus’에 닿는다. 그래서 ‘우연히’라는 뜻으로 주로 쓰였고, 그 명사형은 원래 ‘casuality’였다. 지금은 쓰이지 않은 이 단어에서 발음상 부담스러운 모음 ‘i’가 탈락해 ‘casualty’가 됐다. 뜻은 ‘우연 또는 우연히 발생한 일’로 그 용례가 현대영어에까지 남아 있다.
‘casualty’는 15세기 말 군대로 흘러 들어가면서 뜻이 전이된다. 전투에서 죽거나 다친 병력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전들은 그 과정을 정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으나, 일종의 완곡어법(euphemism)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완곡어법이란 죽음이나 질병, 범죄 등 어두운 현실을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이다. ‘죽었다(die 또는 be dead)’ 대신 ‘돌아가셨다(pass away)’고 하는 게 대표적 용례다. 공무원들이 국민을 호도할 때 활용하기도 한다. ‘세금 인상(tax increase)’ 같이 알기 쉬운 말 대신 ‘세입 개선(revenue enhancement)’이란 ‘고상한’ 말을 쓰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casualty’는 직설적 표현인 전투시 사상자를 그 인명 살상이 발생한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사태 또는 예기치 않은 상황이란 말로 슬쩍 바꾼 것이다. 인명을 다루는 군에서 비슷한 용법이 많다. 군사행동으로 인한 민간인 사상자를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하는 게 그 중 하나다.
또 작전중 인명손실은 주로 불쾌한 어구가 드러나지 않는 약어(abbreviation)로 처리한다. 작전중 사망자는 KIA(Killed in action), 실종자는 MIA(Missing in action), 주검으로 돌아온 병력은 DOA(Dead on arrival)다. 이 중 KIA는 한국산 기아자동차와 철자가 같아 자동차회사명으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꿋꿋이 쓰다 보니 이제 그런 연상 자체가 힘을 잃었다.
‘casualty’는 보통 사망·부상자를 함께 칭하지만 군에서는 사망자만 뜻하는 경우도 있다. 비슷한 말로 ‘fatal(치명적인)’에서 나온 ‘fatality’는 재난·질병 등으로 인한 사망자나 치사율을 의미한다.
보스턴 테러와 텍사스 폭발사고로 엄청난 인명 살상을 목도한 미국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다. 미국의 이처럼 극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는 엉뚱한 방향에서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몇 주간 끝간 데 없이 치솟던 북한의 위협과 전쟁 위기감이 한풀 꺾인 것이다. 서로 연관이 없을 듯 하지만 세계 언론의 관심이 미국 사태에 쏠리면서 어차피 ‘호전적 언사’로만 일관해온 북한은 상대적으로 관심권에서 벗어났다.
북한 입장에서도 긴장도가 잔뜩 높아진 미국에 ‘도발’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9·11 이후 미국이 어떤 명분으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 조야에서 더 늦기 전에 지금 북한을 폭격해야 한다는 주장(4월12일자 <뉴욕타임스> 칼럼)이 나오기 시작한 참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