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와 애국심의 차이
[이주의 키워드] nationalism
‘아베노믹스’ 효과로 일본에 쏠렸던 세계 언론의 시선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일본의 노골적인 우경화 행보 때문이다. 일본정부 고위층이 대거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데 이어 아베 신조 총리는 침략을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다.
비판의 포문은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NYT)>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열었다. 두 신문은 각각 4월24일자 사설과 국제면 주요기사를 통해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조짐을 지적하고 국제사회의 우려를 전했다.
NYT는 “북한 핵위기로 주변국과 협력해야 할 시기에 일본이 중국과 한국의 적대감을 일으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며 “일본은 역사적 상처를 헤집을 것이 아니라 장기침체에 빠진 경제를 살리고 민주국가로서 역할을 높이는 데 힘써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WSJ는 일련의 움직임이 일본의 군 보유와 교전권을 막고 있는 이른바 평화헌법 개정에 맞춰져 있음을 강조했다. 이어 경제전문 <블룸버그 통신>은 “일본이 최대 무역국인 중국, 한국과의 관계를 망친다면 ‘아베노믹스’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따졌다.
이들 미국 언론이 일본의 이런 행태를 규정하는 키워드가 바로 ‘nationalism’이다. 요즘 일본 관련 언론보도에서 이 말을 흔히 볼 수 있다. NYT 사설은 제목부터 ‘일본의 불필요한 민족주의(Japan’s Unnecessary Nationalism)’였다.
‘nationalism’은 깊이 들어가면 한없는 논의가 필요한 용어다. 그러나 일단 서구언론에서 사용하는 의미에 한정해 생각해보자. ‘nationalism’의 한글 번역어는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수주의’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흔히 쓰이는 게 첫째인데, 문제는 한국어 ‘민족주의’와 영어 ‘nationalism’이 각 언어사용자가에게 주는 어감이 상당히 다르다는 데 있다.
한국인은 대체로 민족주의라는 말에 반감이 없다. 오히려 항일투쟁이나 남북화해와 같은 긍정적 문맥에서 사용한다. 반면에 미국인과 유럽인에게 ‘nationalism’이라 하면 성조기를 불태우며 시위하는 근본주의, 자기만 아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국수주의자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여기서 사회과학적 개념을 따지는 것은 무용하다. 그 형성과정이 어떻든 ‘nationalism’은 영어사용자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투사한다. 이번에 일본의 언행에 대해 쓴 용례가 바로 그것이다. 이것을 ‘민족주의’로 번역하면 정확한 어감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당사국이라 할 수 있는 한국과 중국 언론보도를 보면 쉽게 비교된다. 두 나라 언론에서 최근 일본이 보이고 있는 성향을 ‘민족주의’라 규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중국 언론은 영어보도에서도 ‘nationalism’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영문일간지 <China Daily>는 4월24일자 사설에서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를 준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nationalism’이란 말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군국주의(militarism)’와 ‘야만적 제국주의 (brutal imperialism)’라는 말이 여러 차례 사용됐다.
비슷한 뜻이면서 영어사용자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용어가 하나 있다. ‘patriotism’이 그것이다. 우리말로 ‘애국심’이라 번역되는데, 이것도 어감이 정확히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민족주의에 비하면 조응도가 훨씬 높다.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1945년 쓴 글에서 ‘patriotism’과 ‘nationalism’을 이렇게 구분한 바 있다.
“애국자는 자기 나라가 세상에서 자신에게 가장 좋은 곳이라고 믿지만 그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의사는 없다. 애국심은?군사적, 문화적으로?그 본질이 방어에 있다. 반면에 민족주의는 힘의 추구와 분리될 수 없다. 모든 민족주의자의 변함없는 목적은 더 큰 힘, 더 큰 권위를 확보하는 데 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또는 개인을 함몰시키기로 작정한 집단을 위해서이다.
(A patriot believes this country to be the best place in the world for himself but has no wish to force his ideas on other people. Patriotism is of its nature defensive, both militarily and culturally. Nationalism, on the other hand, is inseparable from the desire for power. The abiding purpose of every nationalist is to secure more power and more prestige, not for himself but for the nation or other unit in which he has chosen to sink his own individu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