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고려인마을②] ‘고려인동포 주민증’의 효용과 위력을 아십니까?
[아시아엔=임영상 한국외대 명예교수, 아시아발전재단 자문위원]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연해주로 ‘자진’ 이주한 한인들이 처음 삶터를 이룬 곳이 지신허 마을이다. 바로 그곳에 지난 2004년 한인 러시아 이주 140주년을 맞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공연한 가수 서태지가 헌정한 ‘지신허 마을 옛터’ 비석이 있다.
비문에 ‘1863년 함경도 농민 13세대가 두만강을 건너와 정착한 극동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이란 설명이 붙어 있다. 지신허와 이웃한 연추(크라스키노)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의 페치카’ 최재형이 창립한 동의회가 세운 연추의병(참모중장 안중근)이 1908년 홍범도와 연합해 국내 진공을 시도했다.
최재형은 충북 제천에서 의병항전을 전개하다 연해주로 망명한 유인석과도 긴밀히 협력했다. 연해주가 해외 의병에 이어 독립운동 주축이 되었다. 또한, 1920~30년대 ‘연해주 고려인’은 당시 한반도보다 한글 교육을 잘 받았다. 그들은 한글신문 <선봉>의 창간(1923)에 이어 진천 출신 조명희가 망명해 고려인 한글문학을 일으켰고, 고려극장 창단(1933) 등 공연예술도 발전시켰다. 지금 대한민국으로 귀환하는 고려인은 바로 연해주 고려인의 후예이다.
2023년 10월 현재 10만명 이상의 고려인이 한국에 살고 있다. 앞으로도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근래 한국에 오는 고려인은 인천공항에서 곧바로 연고가 있는 지역의 고려인마을로 가서 비자 문제를 해결하고 휴대전화를 구매한 후 다시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기도 한다.
이번에 제천에 들어온 19가구 50명의 고려인가족 중에서도 벌써 1~2차례 이동한 예도 있다. 가족 전체가 삶터를 옮기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따라서 고려인 동포들도 새로운 정착지를 정할 때 아래와 같은 내용을 사전 체크한 후 이동한다.
첫째, 일자리가 있는가? 둘째, 어린이집 보육비를 지원하는가? 셋째,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가? 넷째, (최소한 일요일) 쉼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가? 다섯째, 평일 야간과 휴일에 부족한 한국어를 지속해서 배울 수 있는가? 등이다. 그래서 생활 인프라가 잘 형성된 기존의 고려인마을에 정착하기를 원한다.
그러면, 제천시 당국이 설립하고 대원대(세명대 참여)가 위탁 운영하는 재외동포(고려인)지원센터를 운영하는 제천시 상황은 어떤가? 제천 고려인마을이 성공적으로 형성되고, 나아가 ‘고려인의 메카’로 발전할 수 있을까?
제천시-고려인마을 상생으로 더 많은 동포 유입 되길
10월 24일 제천시 재외동포지원센터 개소식에 참석한 고려인 모두 제천시의 환대와 지원 정책에 감사했을 것이다. 시는 출입국 민원대행 서비스부터 일자리를 찾고 집을 구하는 일, 미취학 어린이에 월 30만원 지급, 의료비 할인 및 치료비 지원, 한국생활 정착에 필요한 한국어 및 다양한 교육 등을 서비스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 땅인 ‘제천시 시민’으로 가는 첫 단계인 ‘제천시 고려인동포 주민증’까지 발급했다. 고려인동포들은 이전에 살던 곳과 자연스럽게 비교했을 것이다. 특히 고려인동포 주민증은 관내 시설 이용과 병원 치료 등에서 할인 혜택을 주고 있다. 벌써 SNS를 통해 고려인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도 왜, 지난 9월 모집에서 19가정 50명만 신청했을까? 대한고려인협회가 각종 SNS를 통해 홍보했는데도 말이다. 이제 상시 모집할 예정이라 2023년 목표인 80명 달성은 어려움이 없어 보이지만, 2024년과 2025년까지 1000명의 국내외 고려인동포를 제천으로 이주·정착시킬 수 있을까?
필자는 지난 2년 넘게 전국의 고려인마을을 방문했다. 고려인동포가 모이는 것은 우선 일자리다. 대부분 산업단지 공장에서 일하는 단순노동이다. 한국어 소통능력이 부족해 직급이 올라가기도 어렵다. 앞으로 중고등학교 과정부터 진로·취업 교육이 필요하고 대원대학교와 세명대학교가 고려인 청소년의 대학진학도 도와야 하겠지만, 우선 고려인동포 가족의 일자리 연결이 필요하다.
2023년 제천시의 노력은 한국사회에서 처음이다. 고려인동포 이주·정착 지원에 들어가는 예산도 적지 않다. 그래서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다른 인구감소 중소도시들이 지금 제천시를 주목하고 있다. 고려인동포도 제천시의 환대에 감사하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직종을 가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중국동포가 주로 해온 식당 종업원과 숙박업소 일을 하는 고려인동포가 늘어나고 있다. 자주 사용하는 생활 한국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면 취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제천시는 사철 관광여행업도 발달해 있다. 또한 고령화 시대 간병인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데, 어느 정도 한국어 소통이 가능한 고려인동포도 취업하고 있다.
나아가 240시간 교육을 받고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하는 요양보호사 양성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 하지 않는 일을 고려인동포들이 기꺼이 한다면, 지역민도 고려인동포를 새롭게 볼 것이다.
이제 고려인 이주·정착 사업은 재외동포지원센터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려인동포의 한국어 실력 향상이다. 제천의 상공인들이 한국어 실력을 갖춘 고려인동포를 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따라서 센터는 고려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상담도 가능한 고려인 리더 ‘초청’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센터가 있는 대학로 일대 원룸촌이 한때 빈집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고려인마을로 조성되기 어렵다는 점이 아쉽다. 따라서 재외동포지원센터는 센터 이용이 편리하도록 시내버스 노선을 고려해 고려인동포의 주거지를 알선해야 한다.
‘의병의 도시’ 제천에서 ‘고려인의 도시’ 제천으로
이제 제천시 재외동포지원센터는 센터의 숙소와 교육장을 이용해 전국의 고려인 청소년과 고려인마을 리더가 모이는 행사 등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재외동포청 재외동포협력센터가 시행하는 각종 대규모 재외동포 연수행사도 대원대·세명대의 협력을 받아 유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제천시 재외동포지원센터(고려인마을)는 광주와 안산, 인천, 경주와 김해 등 이미 인프라가 잘 갖춰진 전국의 고려인마을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한다. 의병의 도시 제천은 해외 의병을 시작한 연해주 고려인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면 어떨까 싶다.
우선, 제천 의병전시관·의병도서관에 러시아 연해주 의병을 이끈 최재형, 안중근, 홍범도, 유인석 등의 스토리를 포함하고, 전국의고려인 청소년들의 순례코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웃 도시로 이미 1천명의 고려인이 사는 진천과 긴밀하게 협력해 충북을 ‘고려인의 메카’로 함께 만들어 가는 것도 제천 고려인마을의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진천의 조명희문학관은 연해주 고려인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조명희를 잘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