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한국견문록⑩] 대기업 골목상권 진출 ‘탐욕’과 손학규 정계은퇴

그만둘 때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

젊은이의 귀감이 될 만한 원로가 없다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아시아기자협회 부이사장] 들고 날 때가 확실해야 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얻고 싶어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는 속담도 그런 보편의 심정을 대변한다. 문제는 정도正道를 벗어난 탐욕이다. 사실 욕심과 탐욕의 사전적인 뜻은 별반 큰 차이가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실생활이라는 측면에서 두 단어의 활용방식을 가름해보면 탐욕은 욕심보다 상당히 부정적인 용도로 구사되고 있다.

대기업이 골목상권에 진출해 자신들의 이윤을 추구하는 일은 탐욕스러운 일이다. 먹고 살기 위해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노력하는 서민들의 욕심은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다. 욕심을 도덕적 기준에서 판단할 것인가, 아니면 실존의 차원에서 판단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상당히 어렵다. 하지만 나는 욕심은 ‘실존’의 문제라 분명하게 생각하고 싶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먹고 사는 일, 즉 실존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는 관중管仲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 말은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우리 옛말과도 일맥상통한다. 관중의 언급에 기대어 본다면 탐욕이란 ‘예절과 영예를 벗어나는 욕심’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다.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얻기 위해 갖게 되는 건강한 욕망과 욕심은 인간의 보편적인 의지다. 문제는 욕심이 탐욕이 되는 것이다.

멈춰야 할 때 멈추지 못하는 것이 바로 탐욕의 속성이다. ‘추醜’하다는 것은 바로 멈추지 못함에서 오는 욕망의 과잉이다. 시인 이형기는 「낙화」라는 시에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자의 뒷모습은/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했다. 아름다움은 바로 가야할 때를 아는 ‘자족自足’에서 출발한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패한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이 정계은퇴를 하면서 “정치인은 들고 날 때가 확실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라며 “지금은 제가 물러나는 것이 순리”라고 밝혀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샀다. 온갖 구구한 변명으로 자신의 패배를 미화하며 재기를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추한 모습인데, 손학규 고문은 그러한 탐욕으로부터 과감하게 물러났다. 앞으로 그의 행보가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당시 시점에서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곧바로 정계를 은퇴하는 그의 뒷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늘에서 내려 준 목숨을 다 누릴 수 없는 행동_상앙商?의 비극

『사기』의 「상군열전」은 공이 있는 자에게는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사람에게는 벌을 주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으로 진나라를 부국강병하게 만든 상앙(공손앙, 위왕)의 치적을 다루고 있다. 상앙은 법가法家의 대표 사상가로, 인간은 욕망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이기에 두루뭉술한 ‘예禮’보다는 칼날 같은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인물이다. 진秦 효공孝公은 상앙을 등용하여 법을 바꾸도록 지시하였으나 감룡甘龍과 두지杜摯 등의 신하와 주변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두지가 말한 반대의 요지는, “100배의 이로움이 없으면 법을 고쳐서는 안 되며, 10배의 효과가 없으면 그릇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옛것을 본받으면 허물이 없고 예법을 따르면 사악함이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상앙은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나라에 편하면 옛날 법을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그러므로 옛날 법을 반대한다고 해서 비난할 것도 아니며, 옛날 예법을 따른다고 하여 칭찬할 것도 못됩니다”라고 하자 효공이 결심을 하고 상앙에게 새로운 법을 제정하도록 명령한다. 상앙의 법령은 살 떨릴 정도로 매우 엄했습니다. 상앙의 법령으로 진나라는 부강해졌지만 내심 사람들의 원망은 높아져 갔다. 그러자 진나라에 은거하고 있던 선비 조량趙良이 상앙을 찾아와 당신의 교화는 민심을 얻지 못해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으며, 만약 효공이 죽기라도 한다면 당신의 파멸은 한 발을 들고 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잠깐 사이에 다가올 것이니 지금이라도 전원으로 물러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상앙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뒤 효공이 죽고, 상앙에 의해 자신의 사부가 코를 베는 일을 지켜봤던 태자가 즉위를 하였고, 이에 그동안 그에게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 그가 모반을 꾸민다고 밀고를 하였다. 도망을 가던 상앙은 함곡관 부근의 여관에 묵으려 했으나 주인이 여행증이 없는 자를 묵게 하면 상앙의 법에 의해 처벌을 받는다며 거부를 하자 “아! 법을 만든 폐해가 결국 이 지경까지 이르렀구나”라며 탄식했다.

상앙은 진나라를 떠나 위나라로 갔으나 과거에 위나라를 속여 침략을 한 일로 인해 진나라로 돌려보내져 결국에는 다섯 필의 말에 머리와 사지가 묶여 찢어지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상앙의 법령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운명이 비극적이 된 것은 조량의 말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량이 『시경』을 인용하면서 그에게 물러나기를 권고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시경』에서는 ‘쥐한테도 예의가 있는데,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구나. 사람으로서 예의가 없으면, 어찌 빨리 죽지 않을까?’라고 하였다. 이 시로 보더라도, 당신은 하늘에서 내려준 목숨을 다 누릴 수 없는 행동을 했습니다.…『시경』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얻은 자는 흥하고, 마음을 잃는 자는 망한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몇 가지 일들은 인심을 얻을 만한 행위가 못됩니다.…『시경』에서는 ‘덕을 믿는 자는 일어나고, 힘을 믿는 자는 멸망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신의 처지는 아침 이슬처럼 위태로운 데도 아직 목숨을 연장하여 더 오래 살기를 바라십니까?_「상군열전」

뒤를 돌아보지 않는 욕망의 종착역은 파멸이다. 상앙이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이룬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법령은 당시의 도리와 이치에서 너무 앞선 파격이었다. 조량은 “당신은 왕의 명령보다 깊게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백성들은 왕이 명령하는 것보다 빠르게 당신이 하는 일을 본받습니다”라는 이유로 설명을 한다. 신하된 자가 왕 위에 군림하는 형국은 도리에 어긋난다. 상앙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그의 공적을 잃은 것은 물론 가문이 멸족하는 화를 입었다. 사마천은 상앙에 대해 성품이 본래 잔인하고 덕이 없는 인물이며, 그가 효공에게 행한 유세는 내용이 없는 미사려구의 언변으로 벼슬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혹평했다.

세속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다!

장량은 뛰어난 계책으로 유방을 도와 한漢나라를 건설한 개국공신으로 인품이 넉넉하고 겸손한 인물이다. 유방이 한나라를 건설한 후 공신들에게 상을 봉할 때 장량에게 “준영의 장막 안에서 계책을 운용하여 천리 밖에서 승부를 결정한 것은 자방의 공이다. 스스로 제나라 삼만 호戶를 선택하라”고 하자 자신의 공은 전적으로 폐하께서 거두어 주었기에 때때로 적중한 것이지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며 제나라 삼만 호는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유현에 봉해달라고 청했다. 장량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른 사람이 장량과 같은 공적을 세웠다면 어떠했을까? 소동파는 「유후론」에서 ‘천하에 크게 용기 있는 자는 갑자기 큰일을 당해도 놀라지 않으며 이유 없이 당해도 놀라지 않는다. 이는 그 품은 바가 심히 크고 그 뜻이 심히 원대하기 때문이다.天下有大勇者,卒然臨之而不驚,無故加之而不怒. 此其所挾持者甚大, 而其志甚遠也.’라고 장량의 성품과 기개를 설명했다.

「유후론」의 이 글귀는 2010년 천안함 사건이 일어났을 때 중국 외교부 추이톈카이 부부장이 천영우 외교통상부 2차관에게 액자에 담아 선물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정부에게 인내와 절제를 당부하는 메시지라는 의견과 중국이 천안함 사건에 대해 은근슬쩍 덮으려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어 해석이 분분했었다.

소동파가 장량의 뛰어난 성품으로 꼽은 것은 바로 ‘인내’다. 젊었을 때 그는 진시황을 시해하려다 실패했는데, 이는 젊은 시절 그의 성정이 굉장히 다혈질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진시황 시해가 실패로 돌아가자 장량은 성과 이름을 바꾸고 도망을 가다가 하비下?의 다리에서 노인을 만나 굴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노인이 이유 없이 신발을 다리 아래로 벗어던지며 주어다가 신기라고 했다. 장량은 화를 참고 노인에게 신을 신겨 드리자 그 노인은 첫 새벽 세 번째로 불러낸 만남에서 이쯤 되면 되었다 싶어 『태공병법太公兵法』이라는 책을 전하며 이 책을 잘 익히면 왕의 스승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해 소동파는 노인이 장량의 욱하는 기질을 꺾어서 큰 계획을 성취할 수 있게 하려 했다고 설명하면서, 장량의 인내심은 가장 장량다운 것이라고 평했다.

한 고조 유방은 유후 장량의 도움으로 천하를 통일한 후에도 천하의 경영을 그와 함께 논의했다. 한 고조는 한나라를 세운 후 한신을 비롯해 많은 공신들을 토사구팽兎死狗烹하였지만 장량은 그리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의 뛰어난 계책과 타인을 너그러이 품을 수 있는 인품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는 유방 스스로도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짓는 데에 나는 장자방만 못하다”라고 하였다는 것만 봐도 그의 쓰임새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음에도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즉, 물러날 때가 언제인지를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스스로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토사구팽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에서 자연스러운 속성이다. 그렇기에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으려면 물러날 시기를 잘 알아야 한다. 장량은 권력과 토사구팽의 관계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기에 말년에 다음처럼 말하고 정계에서 물러났다.

“집안 대대로 한韓나라 승상을 지냈는데,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의 재물을 아끼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서 강한 진나라에 복수를 하니 천하가 진동했다. 지금은 세 치의 혀로 황제를 위해 스승이 되어 식읍이 만 호이고 작위는 열후이니, 이는 평민이 최고에 오른 것이니 나로서는 만족스러운 것이다. 세속의 일을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자 바랄 뿐이다.”_「유후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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