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①] 세월호 선장, 왕온서 그리고 아이히만

‘사유하지 않음’ 속에서 ‘도구적 인간’이 저지르는 ‘악의 평범성

이성理性의 실종과 무사유無思惟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다.” 스포츠 중계 해설자들이 흔히 인용하는 베켄바우어의 말이다. 그 말의 의미는 축구에서 절대 강팀이란 있을 수 없으며, 비록 상대팀보다 약체일지라도 단점을 보완한다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뜻이 축구가 아닌 인생사 전반에 적용되면서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되고 있다.

무조건 이기고 보자는 식의 욕망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성찰보다는 편법이나 속임수를 부추기는 요소가 된다. 사실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기는 힘이 든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과도 같다. 사람들 사이의 실력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이겨야겠다는 마음만 앞세우다보면 정도正道를 벗어나게 된다. 내가 왜 졌는가에 대한 성찰과 분석의 사유를 통해 새롭게 자신을 정초定礎해 나가는 것이 인생사의 근본이다. 강자라 해도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패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인생에서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다는 말들을 한다. 실력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차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유는, 생각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가 강한 것이 아니라 ‘사유하는 자’가 강한 법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사유를 한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사유하지 않는다. 인간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본능이 아닌 사유의 결과다. 사유란 무수히 떠오르는 생각 일반과는 양태가 다르다. 생각 중에서도 개념과 추론에 의해 걸러진 이성적 판단을 사유라 지칭할 수 있다. 이성적 판단은 현실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살인은 악이다”라는 이성적 판단이 없다면 현실은 극도의 혼란에 빠질 것이다. 현실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성적 사유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헤겔이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며,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고 한 것도 바로 이성이 현실을 유지하는 핵심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성은 개인의 감정과 욕망을 억제하여 인간 행동의 보편적 준칙을 마련하는 법과 도덕과 윤리의 틀이다. 그러므로 이성적인 사유를 하지 않는 사람의 행동은 현실을 파괴하는 것이라 규정할 수 있다. 사유란 말 속에는 이미 이성이라는 말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비이성적’이라는 표현은 곧 ‘무사유無思惟’를 뜻한다. 사회의 혼란이란 바로 이성의 실종, 즉 ‘무사유’의 횡행을 의미한다.

도구적 인간과 ‘악의 평범성’의 전형_아이히만

개인의 욕망을 이성적 판단보다 앞세우는 사람은 자신의 안위와 영달을 위해 사회의 보편적 준칙을 수단화시킨다. 권력자의 비리, 관료의 타락, 범법자의 사기와 술수란 바로 이성적인 사유의 포기를 의미한다. 이들은 이기기 위해서 반칙을 범하는 운동선수에 비유될 수 있다. 무엇이 옳은지를 알면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바로 악惡이다. 악이란 개인의 성정이나 기질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사유하지 않는 ‘무사유’의 상태다. 나의 이익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는 보신적保身的 이기주의가 현실에서 접하게 되는 악의 실체라 할 수 있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기했다. 아이히만은 2차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집단수용소로 이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1945년 독일이 패전한 후 그는 리카르도 클레멘트라는 가명으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자동차 공장에서 기계공으로 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60년 5월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인 모사드의 끈질긴 추적 끝에 체포되고, 이스라엘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는 재판과정을 지켜보면서 유대인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아이히만의 모습이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보는 50대 아저씨의 평범한 모습이었다는 것에 자못 놀랐다고 한다. 아이히만은 재판과정 내내 자신은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한나 아렌트는 그가 저지른 일은 의도로써 자행된 ‘본질적인 악’이 아니라 ‘사유하지 않음’ 속에서 도구적 인간이 저지른 ‘평범한 악’이라고 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누구나 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악의 평범성’의 요지다.

그녀의 견해는 아이히만을 옹호하는 것으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옹호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가 주장하는 것은 아이히만이라는 한 개인의 특수한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악의 가능성을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예루살렘의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이듬해 5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2012년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에 의해서 ‘한나 아렌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됨으로써 그녀의 주장이 다시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악의 일차적 원천은 ‘무사유’다. 그러나 사유를 한다고 해서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춘원 이광수는 일제 말기 독립운동을 포기하고 일제의 통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요지의 ‘민족개조론’을 발표해 지금까지도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홍명희, 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그가 ‘무사유’의 인물이었을 리는 만무하다. 그런 그가 친일이라는 행적을 남긴 것은 ‘사유에 대한 자기성찰’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장이 타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에 대한 성찰능력이 부족했기에 친일이라는 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 자기만 알고 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보신적 이기주의’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자기 사유에 반하여 악을 저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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