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⑤] 이율곡·이항복 충언 외면한 선조와 광해군의 말로
선비가 공명을 세우는 길은 정언正言을 통해서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고 직언의 자세를 한결같이 유지했던 남명 조식은 일평생 의관에 방울과 검을 차고 살았다. 검의 이름은 ‘경의도敬義刀’였는데, 이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기록한 남명의 ‘신명사명神明舍銘’ 중에서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義內明者敬,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外斷者義’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남명은 마음이 흐트러질 때마다 칼을 어루만지며 심성을 바로 잡았다.
또한 칼과 함께 늘 방울을 차고 다녔는데, 그 방울의 이름은 ‘성성자惺惺子’로, 늘 스스로 경계하며 깨어 있겠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다. 걸을 때마다 들려오는 방울소리로 사사로운 마음이 들지 않도록 늘 깨어 경계하고자 했던 남명의 모습은 어찌 보면 너무 과한 행동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연함이 있었기에 직언을 할 수 있었다. 마음을 밝게 하고, 시비를 분명하게 결단하는 자세가 있어야 직언의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다.
임금이 어질면 신하는 곧다君仁則臣直
악의는 ‘보연왕서’에서 어질고 성스러운 군주가 공을 세우면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혜왕을 향한 직언으로, 선왕의 치적과 비교하여 지금 당신의 처지가 어떤 지를 두루 살펴보시라는 이야기다. 중국 북송北宋의 역사가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어진 임금과 충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위나라 문후文侯가 중산中山 땅을 차지하고 아들 격擊을 중산에 봉한 후 신하들에게 “나는 어떤 군주인가?”라고 묻자, 대다수의 신하들이 어진 임금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임좌任座만 어질지 못하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중산을 얻었으면 당연히 동생에게 봉했어야 할 것인데 그리하지 않으셨으니 어질지 못하다는 것이 임좌의 해명이었다.
당시에는 땅을 얻으면 동생에게 봉하는 것이 순리였다. 화가 난 문후가 다시 책황翟璜에게 물으니 “어진 임금이십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문후가 그 근거가 무엇이냐 묻자 책황은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바르다고 했습니다. 앞서 임좌가 한 말이 바르니 전하가 어진 까닭입니다”라고 차분히 답변했다. 그 말을 들은 문후가 기뻐하며 임좌를 상객上客으로 정중히 대접했다.
지도자가 어질다는 것은 성품이 완벽하여 흠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완벽하고 흠이 없는 것은 없다. 어질다는 것은 자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는 넉넉함과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아량과 자신의 잘못을 시정하여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음을 의미한다. 문후를 어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 시정할 수 있는 인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직언을 하는 자를 내치고 입에 맞는 말만 하는 자를 곁에 둔 지도자들은 대업을 성취할 수 없음은 물론 나라를 위태로운 지경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시절이 위태로우니 직언을 꺼리는구나!
선조先祖는 율곡 이이李珥의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자초해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이이는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상소를 올려 나라의 위태로운 지경을 낱낱이 지적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세세히 제시하였다. 당시 조선의 실정은 관리들의 기강 해이와 부패, 각종 제도와 법령의 타락으로 인해 나라의 폐단이 극에 달했으며 백성들의 삶은 궁핍에 허덕였다. 이이는 이러한 조선의 현실에 대해 “비유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젊었을 적에 술에 빠지고 여색을 즐기어 그 해독이 많았지만 혈기가 강하여 몸에 손상이 가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나이가 들어서야 그 해독이 나타나 비록 몸을 조심하고 보호한다 해도 기운이 이미 쇠락하여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라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이러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고자 상소를 올린 것이니 왕께서 꼭 받아들여 주시기를 간청하며 “신은 나라의 은총을 받아 백번 죽는다 해도 보답하기 어려운 정도입니다. 진실로 나라에 이익이 된다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고 도끼로 목을 잘리는 형벌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피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자신의 결기를 분명히 세워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선조는 그의 목숨을 건 직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선 중기의 충신이자 문장가인 이항복은 ‘불매不寐’라는 시에서 “세상이 어지러워 공자의 가르침이 멀어지고, 시절이 위태로우니 직언을 꺼리는구나.世亂疎儒術 時危忌太言”라고 한탄했다. 이항복은 인목대비 폐위에 맞서 그 부당함을 간언하다 광해군의 미움을 사서 62세의 나이에, 그것도 중풍이 들린 몸을 이끌고 북청으로 유배를 당한다. 북청은 이준 열사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며,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나이가 들어 편안함을 생각하며 지내도 될 터인데 그는 노구를 끌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산앙정山仰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살다 죽었다.
직언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때로는 목숨까지도 내어 놓아야 한다. 그렇기에 『주역周易』에서도 윗사람의 잘못을 지적하여 바로잡고자 하는 직언을 호랑이의 꼬리를 밟는 것履虎尾, 이호미에 비유하고 있다.
선비들의 기개를 나타내는 것 중에 ‘도끼상소’라는 것이 있다. 도끼상소란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나가 상소를 올린다는 것으로, 만약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도끼로 자신을 죽여 달라는 비장한 의지를 담고 있다. 도끼상소를 처음 행한 사람은 고려 충선왕 때 우탁禹倬이다. 충선왕이 자신의 아버지인 충렬왕의 후궁들과 간통을 저지르자 우탁은 그 일의 잘못됨과 함께 왕을 바르게 보필하지 못한 신하들을 호되게 꾸짖으며 도끼상소를 올렸다.
조선 선조 때 조헌趙憲은 시대의 적폐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며 도끼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했고, 구한말의 의병장 최익현崔益鉉은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며 고종에게 도끼상소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