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③] 세월호 선장과 산악인 박정헌·최강식의 ‘초월적 이타주의’
‘악의 평범성’의 한국판 세월호 선장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나’라는 실존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 사회적 존재형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정의定義는 내가 곧 타자이고, 타자가 곧 자신이라는 동질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타자를 자신처럼 여기는 배려가 없다면 사회의 질서는 유지되기 힘들다. 동서양의 사상가들이 누차 강조해왔던 인도人道와 윤리의 본령은 바로 타자에 대한 ‘배려’에 있다. 맹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라고 했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 맹자의 전언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부끄러운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윤리의 근본이다.
2014년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집약해서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다. 재난이라는 것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지표다. 재난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것이 국가의 우선적인 역할이며, 재난이 발생했을 시에는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신속히 작동시키는 것이 차후의 역할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두 가지 모두를 재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2015년 5월 발생한 국가적 재난사태라 할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대응에 있어서 정부는 또다시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을 불안에 빠트리고 국가의 대외적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국가가 국민을 배려하지 못할 때 재난은 걷잡을 수 없는 재앙으로 번지기 마련이다. 침몰해가는 배 안에서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을 한 명도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구조장비와 기술의 문제였을까? 국민들은 이준석 선장의 비인간적인 행동과 국가의 무능력이 재난을 재앙으로 만든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침몰해가는 배를 버리고 혼자만 살겠다고 허겁지겁 구명보트에 오르는 이준석 선장의 추악한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분노했다. 배를 지켜야할 선장의 임무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자신만 살겠다고 구조원의 손을 잡고 보트에 오르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도구적 인간이 저지른 ‘악의 평범성’에 전율했다. 세월호 선장은 대한민국의 아이히만이다. 그에게는 자신이 배려해야 할 타자란 없었다.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을 듣고 선실에서 침착하게 구조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단원고 학생들의 공포에 대해 그는 일말의 배려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생각했다.
산악인 박정헌과 최강식이 추구한 초월적 가치
인간에게 있어 생존의 욕망은 근원적인 것이다. 산악인 박정헌은 『끈: 우리는 끝내 서로를 놓지 않았다』라는 책에서 후배 최강식과 에베레스트의 촐라체를 등반하고 하산하는 도중에 겪었던 절체절명의 순간을 회고하였다. 후배 최강식이 크레바스에 빠지면서 둘은 끈 하나로 연결되었다. 그 끈은 바로 생명의 줄이었다. 끈을 자르면 자신은 살 수 있었지만 박정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 다 죽거나 둘 다 사는 길을 택한 것이다. 어렵게 크레바스를 탈출한 두 사람은 천신만고 끝에 구조되었다. 이 사고로 박정헌은 산악인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손가락을 동상으로 인해 여덟 개나 잃었고, 최강식은 손가락 아홉 개와 발가락 대부분을 잃었다. 그들의 감동적인 생존투쟁을 소설가 박범신은 『촐라체』라는 소설로 그려냈고, SBS스페셜에서는 ‘하얀 블랙홀’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다루어 화제가 되었다.
박정헌은 끈을 자르고 싶은 유혹을 견뎌냈다. 자신이 살겠다고 후배를 죽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러나 세월호 선장은 혼자 살겠다고 배와 함께 탑승자들을 버렸다. 생존의 욕망은 상황에 따라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악할 수도 있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윤리적 결단이 없는 생존욕망은 추하다. 박범신은 두 사람의 생존투쟁에 대해 “이것은 안락한 자본주의가 폐기처분했던 인간의 초월적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내 아들, 딸, 또 젊은 세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라고 했다.
우리 내면의 ‘악의 평범성’을 경계해야
자본주의가 폐기했던 인간의 초월적 가치란 무엇일까? 영국의 생물학자 콘라드 웨딩턴은 “진화를 통해 인간은 윤리적 동물로 변해갔다”고 했다. 인간이 인간다워진다는 것은 윤리를 염두에 두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히만과 왕온서 그리고 세월호 선장은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고 타인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악을 범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참으로 불행히도 생각하도록 하는 힘은 인간의 다른 능력에 비해 가장 약하다. 폭정 아래에서는, 생각하는 일보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훨씬 쉽다”고 했다.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이다.
사유하지 않고, 타자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영달만을 생각한 아이히만과 왕온서 그리고 세월호 선장은 과거의 인물들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현재의 인물들이며, 무사유가 만든 ‘상징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이 거대한 관료주의적 조직문화와 보신적 이기주의와 결합할 때 나타나는 ‘악의 평범성’을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하고 감시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의 희망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유와 성찰을 통해 타자를 배려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