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한국견문록⑪] 법제처장 퇴임때 인용한 시 “마을 하나 또 있네”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아시아기자협회 부이사장] 세상을 뒤흔든 권력도 십년을 넘기기 어렵고 아름다운 꽃의 붉음도 십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의 속뜻을 장량은 널리 헤아리고 있었다. 진시황에 의해서 멸망한 한韓나라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나 세 치의 혀로 천하를 도모했던 그는 세월이란 일장춘몽一場春夢과도 같은 것이기에 이쯤에서 만족하고 물러나 적송자처럼 살았던 것이다.
장량이 정치에서 물러나 도인처럼 유유자적하게 살던 곳이 바로 장가계로, 중국인들 사이에서는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백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人生不到張家界 白歲豈能稱老翁”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나아가고 물러서야 할 때를 잘 아는 사람의 말년은 지극히 아름답다는 것을 장량을 통해 다시금 확인한다.
너무 큰 명성을 누리면 오랫동안 머물기 어렵다
가시나무에 누워 자고 쓰디쓴 곰쓸개를 핥으며 패전의 굴욕을 되새겼다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성어는 월越나라 왕 구천句踐과 오吳나라 왕 부차夫差의 이야기에서 유래했다. 오나라 왕 합려가 월나라를 쳐들어갔다가 패하자 합려는 그의 아들 부차에게 아비의 원수를 꼭 갚아달라고 당부를 한다. 부차는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 자신의 방을 드나드는 사람에게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라고 외치게 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이 소식을 들은 구천은 범려范?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가 회계산會稽山에서 크게 패했다. 구천은 목숨을 구걸하며 오나라의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한 후 겨우 월나라로 돌아갔다. 이후 곰쓸개를 핥으며 “너는 회계산의 치욕을 잊었는가?”라는 말을 곱씹으며 두 가지 이상의 음식을 먹지 않는 검소한 생활로 백성들과 함께하며 복수를 다짐했다.
이 때 오나라는 제나라를 정벌하려고 했는데, 오자서가 극구 만류하며 먼저 월나라를 칠 것을 간언했지만 오나라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고소산姑蘇山에서 패해 대부 공손웅으로 하여금 맨살을 드러내고 무릎으로 기어나가 월나라 왕에게 강화를 청하였지만 거절을 당한다. 오나라 왕은 오자서의 충언을 듣지 않았지만 월나라 왕은 범려의 충언을 받아들였다. 범려는, 회계산의 일은 하늘이 오나라에게 준 기회인데 그것을 취하지 않아 지금에 이르렀으며, 지금은 하늘이 월나라에게 기회를 주었는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결국에는 벌을 받게 된다는 논지로 구천을 설득했다. 이로써 오나라왕은 “나는 면목이 없어 오자서를 대하지 못하겠다.” 말과 함께 자결했다.
범려는 구천을 도와 회계산의 치욕을 복수한 공로로 재상이 되었지만 구천의 인간성이 어질지 못하다는 것을 꺼림칙하게 생각하였다. 당시 범려의 심정에 대해 사마천은 “다시 월나라로 돌아온 범려는 너무 큰 명성을 누리므로 오랫동안 머물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구천의 사람됨이, 어려움은 함께할 수는 있어도 편안함을 함께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여, 구천에게 떠난다는 편지를 써서 말했다”고 설명했다. 속이 좁은 사람이 큰 일을 이루게 되면 사단이 나게 마련이다. 구천은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 그것을 이루었지만 그 이상은 해내지 못한 인물이다.
복수라는 목전의 한 수는 알아도 멀리 내다보고 두는 덕망의 수가 없기에 편안함을 같이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이 범려의 생각이자 사마천의 설명이다. 범려는 물러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이 듣건대, 군주가 걱정하면 신하는 수고롭고, 군주가 욕을 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옛날에 군왕께서 회계에서 모욕을 당하셨는데, 제가 죽지 않았던 까닭은 이 일(복수)을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설욕도 하셨으니, 신은 회계에서 당한 죄를 받고자 합니다._「월나라 왕 구천세가」
이 말을 들은 구천은 그대에게 월나라를 나누어 주려하니 만약 받지 않는다면 벌을 내리겠다고 호통쳤다. 범려는 그 말에 동요하지 않고 “군주는 자신의 명령을 내리고, 신하는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깁니다”라는 말과 함께 얼마 되지 않는 재물을 꾸려 식솔과 함께 바다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유랑을 하던 범려는 제나라에 정착해 이름을 ‘치이자피?夷子皮’라 개명하고 아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면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 범려가 재산을 증식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사기의 「화식열전」에 나온다. 범려는 인생의 다른 길을 마련해서 말년의 삶을 새롭게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치이자피란 말가죽으로 만든 술 부대라는 뜻으로 가죽주머니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세태를 비유하는 말이다. 그러나 범려가 치이자피란 이름을 사용한 것은 오나라 왕 부차가 오자서를 죽여 가죽주머니에 넣어 강물에 던진 것에 연유한 것이라 여겨진다. 오자서와 범려는 비록 다른 왕을 섬겼지만 성정이 곧다는 면에서 서로가 동일시되기에 충분하다. 둘의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치이자피로, 구천에게 회계에서 당한 죄를 받겠다고 한 범려의 심정이 투영된 것이 바로 치이자피다.
2010년 8월 나는 법제처장에서 물러나면서 퇴임사에서 중국 남송 때 시인인 육유陸游의 ‘유산서촌游山西村’이라는 시를 인용했다. 나의 퇴임이 조직의 발전에 새로운 계기가 되고, 나는 다시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마음에서 그리 했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꽃잎 화사한 곳에 또 마을 하나가 있네.’라는 구절이 요즘 유독 눈에 밟힌다. 길이 없을 것 같지만 가다보면 또 하나의 마을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처럼, 물러설 때를 알면 그 뒤에 더 화사한 마을이 새롭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내심 큰 위안이 된다.
산이 첩첩하고 물이 겹겹이라 길이 없을 듯싶지만,
버드나무 짙푸르고 꽃잎 화사한 곳에 또 마을 하나가 있네.
山重水複疑無路
柳?花明又一村
가야할 곳을 알고 돌아가는 자의 앞에 꽃잎 화사한 또 하나의 마을이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강직하고 아름다운 정치인과 지도자들의 뒷모습을 보고 싶다.
우리사회에는 존경할 만한, 젊은이들의 귀감이 될만한 원로元老가 거의 없다. 원로가 거의 없다는 것은 그만둘 때가 되었는데도 물러나지 않고 권력욕, 명예욕, 재물욕에 집착하는 노욕老慾 때문이다. 노욕에 사로잡혀 그동안 쌓았던 명성마저 와르르 무너뜨리고 비참하게 퇴장한 원로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