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16)] 되돌아 보는 박근혜의 세종시 수정안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사)아시아기자협회 부이사장] 사마천은 「소진열전」 말미에 “천하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으며 그의 술수를 배우기 꺼려했다”라고 서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열전을 서술한 것은 “보통 사람의 집에서 일어나 여섯 나라를 연합시켜 합종을 맺게 한 것은 그의 지혜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대의 순서에 따라 그의 경력과 사적을 서술하여 유독 그만이 나쁜 평가를 듣지 않도록 하였다”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소진의 지혜에 대한 인정보다도 당대 사람들이 그를 ‘술수’를 부리는 사람으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소피스트의 궤변과 소진의 논변

논리적이라는 말이 꼭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논리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교묘히 빠져나갈 수도 있고, 궤변으로 진리를 왜곡할 수도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수사학, 변론, 웅변을 가르치던 사람들을 소피스트라고 했다. 소피스트의 어원은 그리스어 ‘sophistes’인데, 그 뜻은 ‘영리한’ 또는 ‘능숙한 사람’을 의미한다.

영리하고 능숙한 사람이라는 것이 나쁜 의미는 아니다. 그런데 소피스트란 말이 논리로써 거짓된 것을 참인 것처럼 꾸미는 자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각인이 된 것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소피스트들을 공허한 말장난으로 진리를 왜곡시키고 사유의 진정성보다는 언어의 기술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궤변론자라고 비난했다.

소피스트들의 궤변 중에 유명한 것이 수업료를 둘러싼 스승과 제자의 다툼에 관한 것이다. 그리스의 한 청년이 유명한 소피스트에게 찾아가 자신을 제자로 삼아달라고 간청을 했다. 이에 스승은 수업료로 100파운드를 요구했다. 그러자 청년은 우선 선금으로 50파운드를 드리고 나머지는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 되면 주기로 약속을 했다. 후에 청년이 성공한 정치인이 되자 스승이 그를 찾아가 나머지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청년은 아직 내가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했으니 돈을 줄 수 없다고 했다. 둘은 합의를 보지 못해 결국에는 법정에 서게 되었다. 스승이 “나는 이 재판에 이겨도 금 50파운드를 받고, 져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청년도 “나는 이 재판에 이겨도 금 50파운드를 드릴 수 없고, 져도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재판장이 두 사람에게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스승은 “돈을 받기 위한 소송이니 이기면 당연히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져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나의 제자가 소피스트인 나와 재판하여 이길 정도면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니 약속에 따라 돈을 받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제자도 지지 않고 “돈을 지불하지 않기 위한 소송이니 이기면 당연히 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패한다면 내가 아직도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돈을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재판관이 참으로 당황했다.

수업을 받았으면 당연히 수업료를 내야 한다. 그런데 제자의 말은 논리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인다. 궤변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소진의 논리도 바로 그러했다. ‘신실하다’라는 의미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신실한 사람은 모두 자기를 위해서 행동하고, 나아가 이루는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성급한 일반화를 통해 증삼과 백이와 미생의 행동을 자기만 아는 사람들로 격하시켰다. 연나라 왕은 소진의 논변에 넘어간 것이다. 실제로 증삼과 백이와 미생이 연나라 왕을 보필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진이 말한 것처럼 연나라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없다. 성급한 일반화를 통해 얻은 전제를 자신의 삶의 원칙처럼 사용하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이제 국민이 답할 차례

정몽준 대표가 박근혜 전 대표를 미생에 비유한 것은 융통성 없이 원칙만 고수하는 태도를 비판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비판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문제는 미생이라는 비유가 아니라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바탕으로 서로의 입장을 조율해야 하는 것이지 감정상으로 서로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미생은 진정성이 있고, 그 애인은 진정성이 없다는 이분법적인 전제를 통해 자신은 신의가 있고, 미생의 애인은 신의가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논지의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아울러 정몽준 대표도 구체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설득하기 보다는 당내 계파의 입장에서 막연하게 미생처럼 미련하다는 식으로 접근한 것도 문제다. 이 문제는 결국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는 것으로 귀결됐고, 박근혜 전 대표는 원칙과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다. 과연 세종시가 그 취지대로 수도권 분산과 국가 균형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행정의 상대방인 국민과 국가의 진로에 비능률,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불편과 부담을 안겨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국민에게 묻고 국민이 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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