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연의 사마천 한국견문록 20] 조지훈 ‘지조론’과 유승민 의원의 경우
변절이란 무엇인가?
[아시아엔=이석연 전 법제처장, (사)아시아기자협회 부이사장] 사람들은 수시로 변한다. 오늘 결심한 것을 내일 바꾸기도 한다. 조석변개하는 행동을 보고 왜 그리 줏대가 없냐며 탓을 하기도 한다. 마음을 바꾸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조지훈 시인은 ‘지조론’에서 변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렸다.
변절이란 무엇인가? 절개를 바꾸는 것, 곧 자기가 심신으로 이미 신념하고 표방했던 자리에서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철이 들어서 세워 놓은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은 모두 다 넓은 의미의 변절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욕하는 변절은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변절이 아니고 좋고 바른 데에서 나쁜 방향으로 바꾸는 변절을 변절이라 한다. (지조론)
술은 막걸리가 최고라며 오로지 막걸리만 마시던 사람이 어느 날 막걸리보다는 소주가 더 좋다며 소주만 먹는다면 그것을 변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지훈의 지조론에 근거해 본다면 변절이라 할 수도 있다. ‘주체의 자세를 뒤집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넓은 의미의 변절이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문제 삼아야할 변절은 좋은 데에서 나쁜 데로 바꾸는 행동이다. 변절과 대별되는 말이 지조다. 그러므로 변절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지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조지훈은 지조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며, 냉철한 확집이요, 고귀한 투쟁’이라고 했다. 순일이란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 순수함을 뜻한다.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 다는 것은 일심一心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변절이란 두 마음을 품고 행동하는 것이다.
두 마음 갖지 않는 게 신하의 본분
<사기>의 ‘정세가’에는 두 마음을 품은 자의 말로가 어떤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정나라 장공莊公에게는 등나라 여자에게서 낳은 태자 홀忽과 송나라 옹씨雍氏의 딸에게서 얻은 여공 돌突이 있었다. 송나라에서는 정나라의 제공이 태자 홀을 왕위에 세우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계략을 꾸며 그를 사로잡은 후 돌을 왕으로 세우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제공은 돌을 왕의 자리에 앉혔다. 이 소식을 들은 홀은 위衛나라로 달아났다. 여공 돌은 왕위에 올랐지만 제중이 국정을 손에 쥐고 있어 이래저래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여공은 제중의 사위인 옹규雍糾와 모의하여 제중을 죽이려고 했으나 옹규가 자신의 처에게 이 일을 말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여공은 쫓겨나 변경의 역읍?邑에 머물게 되었다.
여공이 역읍에 머무는 동안 정나라는 소공이 고거미에 의해 살해되고, 그 뒤를 이은 자미가 제나라 양공에 의해 죽게 되고, 자미의 동생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정자鄭子다. 이 때 여공은 정나라의 대부 보가甫假를 유인하여 협박하면서 자신이 조정에 돌아가 다시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보가는 “나를 봐주면 당신을 위해 정나라 왕 정자를 죽이고 당신을 왕위에 올려놓겠습니다”라고 했다. 여공이 약속을 하고 그를 놔주자, 그해 6월 갑자일에 보가는 정자와 그 두 아들을 죽이고 여공을 왕의 자리에 앉혔다.
궁궐에 돌아오자 여공은 그의 백부에게 “내가 나라를 떠나 나라 밖에서 머물렀는데 백부께서는 나를 궁궐로 돌아오게 할 뜻도 없었으니 그 또한 너무 심하지 아니하오”라고 질책했다. 그러자 백부는 “군주를 섬김에 있어 두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은 신하된 자의 본분입니다. 저는 제 도리를 압니다”라고 말한 후 자결을 한다. 여공은 이에 보가에게 “너는 군주를 섬기는데 두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서 그를 죽였다. 여공은 보가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도 여공은 그를 죽였다. 보가가 정자와 그의 두 아들을 죽인 것처럼 언젠가는 또 마음을 바꿔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두 마음 품은 자들에게 신의를 바라는 것은 해가 서쪽에서 뜨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월왕구천세가>에 나오는 백비伯?도 보가와 같은 말로를 맞이했다. 월나라 왕 구천은 회계산에서 부차에게 포로로 잡혀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 백비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백비는 원래 초나라 사람인데 그의 조부 백주리가 주살되자 초나라에서 도망쳐 태재가 된 자로서 영합에 뛰어난 인물이다. 백비는 충신 오자서를 모함하여 죽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백비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한 구천은 미인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고 그의 대변을 맛보는 치욕을 감내하면서까지 충성심을 보여준 끝에 2년 후 월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구천은 복수의 칼날을 간 끝에 4년 후 오나라를 정벌하여 그 군사를 패퇴시키고 고소산에 부차를 가두었다. 부차는 대부 공손웅을 구천에게 사자로 보내 “바라건대 회계산에서 제가 당신에게 그렇게 용서해 준 것처럼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구천이 이를 허락하려 하자 재상 범려가 가로막고 나서 “하늘이 기회로 주시는 데도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벌을 받는 법이다. <시경>에서도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들려면 도끼자루 모양과 멀리 있는 것을 찾지말라고 했다. 주군께서는 회계산에서의 화를 잊으셨습니까?”라고 간언을 했다. 구천은 범려의 뜻을 받아들여 부차에게 작은 지방의 왕 노릇이라도 하라고 했으나, 부차는 이를 치욕이라 여겨 끝내 자결했다. 구천은 부차를 후하게 장사지낸 후 백비를 군주를 섬김에 있어 두 마음을 품은 자라면서 죽였다.
칭기즈 칸과 알렉산드로스의 신의와 의리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을 처단하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통치의 원리다. 13세기 초 칭기즈 칸(테무친)의 몽골 통일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다. 칭기즈 칸과 죽마고우로서 형제보다 진한 동지였던 자무카였다. 1201년 몽골부족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쿠릴타이는 자무카를 우주적인 왕이라는 뜻의 ‘구르칸’으로 선출했다. 이로써 몽골의 천하통일을 꿈꾸던 칭기즈 칸과 자무카의 숙명적인 대결은 불가피하게 됐다. 이 대결에서 자무카가 패하여 그는 소수의 패잔병만을 이끌고 초원을 유랑하게 되었다. 자무카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가장 신임하던 부하 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것을 잃은 자무카를 따라가 봐야 어느 사막에서 굶어죽지 않으면 이리떼의 밥이 되기 십상이라고 여겨 잠든 자무카를 결박해서 칭기즈 칸 진영으로 말을 달렸다.
그들은 칭기즈 칸이 크게 포상이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군중들 앞에서 그들의 목을 쳤다. 그런 후 칭기즈 칸은 자무카에게 다시 형제의 의를 제안하였으나 자무카는 “믿었던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생각하니 통분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네가 이렇게 처리해주니 여한이 없다. 너의 천하통일을 축하한다. 그러나 하늘에 해가 둘일 수 없듯이 몽골의 왕도 한 명뿐이다. 나를 죽여주려무나”라는 말로 거절했다. 이에 칭기즈 칸은 할 수 없이 자무카를 몽골의 귀인을 처형하는 법도에 따라 피를 보지 않는 방식, 즉 가죽자루에 넣어 목을 조르는 방식으로 처형했다. 칭기즈 칸이 10만 내외의 몽골군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데에는 신의와 의리가 저변에 있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원정대에게 이수스 전투에서 참패한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3세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가우가멜라 평원에서 다시 알렉산드로스 군대와 일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마저 대패하여 다리우스 3세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페르시아제국의 일원인 박트리아나 총독 베수스가 주동이 되어 다른 지역의 총독들과 함께 반역을 꾀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황제인 다리우스를 쇠사슬로 묶어 마차에 가둔 채 황야에 내버리고 도주했다. 추격하던 알렉산드로스 일행이 황제의 마차를 발견했을 때 다리우스는 거의 숨을 거두기 직전이었다. 황제는 “복수……”라는 희미한 말을 채 마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왕좌에 앉아 수많은 신하들의 추앙을 받았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신하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살해되어 먼지투성이의 길바닥에 내버려져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깊은 동정심을 느끼며, 호머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일리아스의 몰락’ 중의 한 구절을 읊조렸다.
“아시아의 왕, 군대의 가장 강력한 주인이었던
그가 번개에 맞아 쓰러진 나무처럼 쓰러져 있네.
쓰러진 나무 몸통, 이름 없는 몸.”
알렉산드로스는 반역을 꾀했던 황제의 배신자들을 추적하여 죽임으로써 다리우스의 복수와 한을 풀어주었다.
소인천하의 춘추전국시대
조지훈은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 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임을 아는 까닭에 우리는 지조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고 그 곤고困苦를 이해할 뿐 아니라 안심하고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조와 절개를 지키는 일은 정말 힘이 듭니다. 때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회사의 비리를 고발했던 청년이 자살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먹고 사는 게 중요하지 지조가 뭔 필요가 있냐는 속물적인 풍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약자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먹고 사는 일이 우선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런 풍조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바로 내부고발자의 탈을 쓰고 마치 자기가 양심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특히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면서 이에 앙심을 품고 조직의 약점을 고발하는 경우를 나는 많이 보아왔다. 이들은 보가와 백비처럼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다.
사마천은 <악의열전>에서 폐부를 찌르는 말을 한다. “군자는 교제를 끊더라도 상대방의 험담을 하지 않고, 충신은 그 나라를 떠나더라도 군주의 허물을 들추지 않는다.”요즘 우리사회에서 말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은 말을 지껄이는 것을 보며 매스꺼움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결벽증일까? 거인들의 참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인배들이 득실대고, 양심을 가장해 허언을 떠들어대는 소인천하의 춘추전국시대가 우리시대에 도래한 듯한 착각이 들어 씁쓸하다. 이럴 때일수록 역사의 엄연한 실상을 직시하면서 교훈을 찾을 필요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