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깜깜이 인사’ 문창극, ‘꼭꼭 숨은’ 유병언
안대희 국무총리 내정자의 낙마를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했다. 그런데 이번 문창극 총리 후보자에 이르러서는 허탈하다 못해 경악(驚愕)을 금치 못하고 있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극성지패(極盛之敗)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 지나칠 정도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얼마 못 가서 패망한다는 뜻이다. 극성떨면 망하는 것이 우주의 진리다. 세상에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는 것인지? 기독교 구원파 유병언에 이어 이번엔 장로인 문창극 국무총리 지명자의 기독교 편향 발언과 역사관 때문에 온 나라가 시끄럽다.
개신교 장로인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교회 강연에서 일제 식민지배와 남북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 보도돼 박근혜 대통령의 ‘깜깜이’ 인사가 또 위기를 맞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것은 다 하나님의 뜻이라니.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다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이조 5백년 허송세월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라고 망언(妄言)을 서슴지 않았다.
문 후보자는 “하나님은 남북분단을 만들어 주셨어. 저는 지금 와서 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 우리 체질로 봤을 때 한국한테 온전한 독립을 주셨으면 우리는 공산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KBS는 “문 후보자는 ‘조선민족의 상징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게으른 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고 이게 우리 민족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 ‘어느날 갑자기 뜻밖에 하나님께서 해방을 주신 거예요. 미국한테 일본이 패배했기 때문에 우리한테 거저 해방을 갖다 준거다’라고 강연에서 밝히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KBS는 또 “문 후보자가 또 다른 강연에서는 ‘제주도 4·3폭동사태라는 게 있어서… 공산주의자들이 거기서 반란을 일으켰어요’라고 말해 제주 4·3 사건을 폭동으로 규정했다”고 전했다. 문창극 후보자는 또 지난 4월 서울대 강의에서 일본군 강제동원 위안부 문제와 관련, “일본으로부터 위안부 문제 사과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말은 과거사에 얽매여 일본과 각을 세우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일 외교노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문 후보자는 2005년 3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3·1절을 맞아 일본에 과거사 배상문제를 언급하자, ‘나라의 위신을 지켜라’라는 칼럼을 통해 “위안부 배상문제는 이미 40년 전에 끝났다…끝난 배상문제는 더는 거론하지 않는 것이 당당한 외교”라고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칼럼에서 “일본에 대해 더 이상 우리 입으로 과거문제를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며 “해방된 지 6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과거에 매달려 있는 우리가 부끄럽다”고 썼다.
그는 이같은 보도를 한 KBS를 고소하겠다고 해 또 다른 파문이 일고 있다. 문씨의 주장이 어떻든 “나는 옳고 남의 주장은 틀린다”는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신만 정의고 자신만 잘났다는 태도는 언론인 출신이면서 대학교수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설사 KBS가 문씨의 설교 또는 주장 가운데 필요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보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론의 편집상의 문제다. 그 보도가 거짓말이나 덧칠을 한 것이 아니라면 법으로 끌고 가는 것은 꼴불견이 아니다.
공자의 중용사상은 유학 4서(四書)중의 하나인 중용(中庸)에서 잘 설명되어 있다. 중용은 공자의 말씀을 손자인 자사(子思)가 정리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본래 예기(禮記)의 한편으로 있던 것을 송나라 때 주자가 별도로 분리하여 4서로 만든 것이다. <중용>은 4서 중에서도 대학, 논어, 맹자를 순서대로 배우고 난 다음에 비로소 배워야 하는 유교철학의 핵심이다.
주자는 “중(中)이라는 것은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어지지도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용(庸)이란 평상의 뜻이다”라고 했다. 또한 주자는 용(庸)을 ‘떳떳함’이라 하였으며, 주자의 스승 격인 정자(程子)는 용을 ‘바꾸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중용은 ‘중화(中和)’로도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다. 중용에서는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오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라고 하여, 희로애락이 발(發)하지 않는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하고 있다.
이같이 모든 것이 절도에 맞는 것이 ‘정의 즉 바름’이다. 그리고 어그러지는 바가 없는 까닭에 이를 화(和)라 한다. 중용에서는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요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라고 하여 중을 천하의 대본으로 삼고, 화를 천하의 달도(達道)로 일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듯 동양에서 말하는 중용이라는 것은 ‘희로애락이 편벽되지 않는 마음가짐(中)으로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하고 처신(和)하는 것을 평상의 생활로 꾸준히 떳떳하게 항상 지속(庸)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실천하면 수신(修身)하고 제가(齊家)하며 치국(治國)할 수 있다고 한다.
극하면 망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세우는 문창극 총리 후보자의 사상과 철학, 역사인식으로는 이 땅의 다양한 성향을 지닌 국민을 아우를 수 없다. 겸손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 같다.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오만한 자세로 갈가리 찢긴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을까 걱정이 크다.
그리고 하나님만 내세우는 편협한 종교관으로는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극성지패라 했다. 하나님을 앞세운 극우보수의 말로가 이 나라를 망하는 지름길로 이끌까 심히 걱정 된다. 이 땅에 ‘중화·중용·중도’의 덕을 두루 갖춘 지도자는 정녕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