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추억의 명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추억의 명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A Time to Love and a Time to Die)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 가슴 저며 잊을 수가 없다. 레마르크(Remarque) 원작, 존 개빈(John Gavin) 주연이었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 보름간 휴가를 나온 독일병사가 한 아름다운 여인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혼인식을 올린다. 꿈같은 신혼을 보내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간다. 전장으로 돌아온 그는 전쟁 와중에 아내가 보낸 편지를 읽다가 자신이 구해준 지하 조직원의 총을 맞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오직 삶과 죽음만이 교차되는 전쟁의 처참한 비극의 현장, 폐허의 잿더미 위에 암울하게 떠도는 젊은 영혼들의 호곡(號哭)소리가 가득하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다. 그런데 전에 그가 살려 준 게릴라 요원 하나가 그를 저격한다. 총을 맞은 주인공이 허물어지며 마지막으로 절규한다.
“이 편지를 다 읽을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 애원하는 그 말을 못 들은 체 적군은 방아쇠를 또 당긴다. 주인공은 쓰러지고 아내의 편지가 손에서 떨어져 강물에 흘러간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붙잡으려고 애타게 손을 뻗는다. 편지는 그만 그의 손을 벗어나 물결 따라 흘러가고 그의 손은 천천히 움직임을 멈춘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고 운명이라 했던가? 아니면 사랑이 슬프고 외로우며 고독한 것은 운명을 걸기 때문일까? 사랑의 신비로운 감각을 잃어버리면 삶은 꺼진 촛불과 같다. 구름은 바람이 없으면 못가고 인생은 사랑이 없으면 못 간다. 제 몸과 영혼조차 추스르지 못해 늘 헛헛하게 뒤척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랑할 때와 죽을 때, 비장한 종말을 꿈꾸며 오늘도 조용히 하루를 마감할지도 모른다.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 만남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는 게 축복이며 은혜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다. 인생이, 삶이, 그리고 사회가 낭만적이지 못하다면 목숨 말고도 더 절실한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한 여인과의 애절한 사랑을 뛰어 넘어 보다 큰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할 때 세상은 아름답다. 살아가면서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더없이 행복한 일이다. 그 벅찬 감정이 인생에 희열(喜悅)을 안겨주며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꿈을 꾸는 한 아름답다. 꿈은 팽팽한 현악기처럼 아름다운 음률을 내기 위해 삶을 긴장시키기 때문이다.
이타적 사랑(Unselfish Love)은 무조건적이고 헌신적 사랑의 표본이다. 이타적 사랑은 나보다 상대방의 필요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순교자적 사랑이다. 참된 사랑이란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것이며, 자신보다는 상대방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다.
그럼 큰 사랑은 무엇일까? 국한(局限)을 뛰어 넘는 사랑이다. 내 한 몸, 내 한 가족, 내 나라, 내 민족만을 위하는 사랑은 작은 사랑이고 소승(小乘)의 사랑이다. 이 국한을 뛰어넘는 사랑이 바로 일체생령(一切生靈)을 사랑하는 것이다. 큰 사랑을 하려는 사람은 먼저 큰 서원(誓願)부터 세워야 한다. 큰 서원이란 고해에서 헤매는 일체중생을 구원하고 제도(濟度)하는 성불제중(成佛濟衆)의 대원(大願)이다.
큰 사랑을 실천하다가 가는 것이 나의 꿈이고 소원이다. 이와 같이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아는 사람이 부처이고 성인이며 달인(達人)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