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수첩공주와 ‘갈매기 맹서’

문창극 총리 후보의 과거사 발언으로 나라가 몹시 소란스럽다. 이 나라엔 정승이란 대임을 맡을 인사가 정녕 없는 것인가? 보도에 따르면 그런 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두 청문회가 두려워 고사하거나 초야(草野)로 몸을 숨기기 때문에 재목을 찾지 못하는 것이라 한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시끄러운 곳이다. 늘 남과 경쟁하며 살아야 하고, 속한 조직에서 보직이라도 맡으려면 알게 모르게 중압감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들은 그곳을 벗어나려고 한다. 옛사람들이 자연을 벗하며 지내는 은자(隱者)의 삶을 동경한 것도 아마 그런 맥락일 것이다.

그들 곁에는 늘 갈매기, 즉 백구(白鷗)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예나 지금이나 사물을 읊을 때 시인, 묵객(墨客)들이 모두 갈매기에 가탁(假託)하여 한적한 아취(雅趣)와 표일(飄逸)한 자태를 표현하였다.

고려말, 조선초 문신 교은(郊隱) 정이오(鄭以吾, 1347∼1434)의 <동문선(東文選)> 제56권 ‘사백구문(謝白鷗文)’에 이런 글이 있다.

“내가 박복파(朴伏波)를 따라서 누선(樓船)을 타고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갈 때, 갈매기가 날다가 내려앉는 것을 보면 늘 선박을 정박하는 물가나 군사를 쉬게 하는 곳이었다. 그 새는 씻지 않아도 희고, 염색하지 않아도 탁하였으며, 그 정신과 태도는 무심한 뜬구름 같아서, 멀리서 관찰할 수는 있어도 새장에 가둬둘 수는 없다. 오랫동안 자세히 관찰해 보았더니, 그들이 배에 접근하는 까닭은 오직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가? 무릇 누선에 탄 군사들은 물고기를 잡는 자도 있고, 사냥을 하는 자도 있어서, 그 새나 짐승, 물고기, 자라의 비늘과 껍질, 간과 콩팥 등을 모두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마음 속으로 그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다, 또 금수가 목숨을 잃는 것은 대개 곡식을 탐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무부(武夫)로부터 탄환을 구해 쏘아 맞히려고 하면서, 그 상태를 살펴보았다. 내가 탄환을 얻어서 갖게 되자, 그때부터 갈매기도 감히 배에 접근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기미를 알아서였으리라.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좋지 않은 안색을 보고 훌쩍 날아올라 빙빙 돌면서 살피다가 위험이 가시면 내려앉는다’고 하였으니, 갈매기를 이르는 말이리라. 그것을 본 뒤에야, 시인, 묵객들이 반드시 시에다 넣어 읊을 적에 나름대로 취한 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아, 세상의 이익을 탐하고 부귀를 탐하는 자들은 형법에 저촉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니, 사람이면서 새만도 못해서야 되겠는가? 이에 글을 지어서 사례하노니, 그 내용은 이러하다.

새 중에 갈매기가 있으니, 구름보다 희네. 드넓은 바다를 날아다녀 길들이기 어렵다네. 나쁜 기색을 보고 날아올라 화살을 멀리 피하니, 너는 나면서부터 기미를 앎이 신령하기도 하구나. 내가 부끄러워 탄환을 버렸거니, 네가 다가와주지 않아 마음이 외롭구나. 세상 사람들 웃음 속에 칼이 있으니, 백구를 버리고 누구와 함께하리. 더구나 쉬파리들이 천지에 가득하니, 나의 마음을 누가 밝게 알아주리. 초연히 강호에서 끝내 너와 함께 짝이 되리라.”

바닷가에서 날아다니며 유유자적하는 이미지로 인해 갈매기는 예로부터 문사들이나 화가들 단골 소재였다. 여백(餘白)을 적절히 채워주는 회화적 요소로는 제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선비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은자들은 갈매기를 벗으로 인정하였다. 사람의 마음을 잘 알아준다고 여겨서다.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하는 ‘백구사(白鷗詞)’ 노래에, “백구야 펄펄 나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라고 한 것도 이처럼 기미에 밝은 갈매기의 속성을 재치 있게 노래한 것이 아닐까? 한갓 미물에 불과하지만 이렇듯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벗이다 보니, 옛 선비들이 혹여 조정에 벼슬하러 나갈 일이 생기면 갈매기에게 곧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떠났다고 한다. 그게 갈매기와의 약속, 즉 ‘백구맹(白鷗盟)’이다.

선인들은 오래도록 벼슬을 버리지 못하면, 백구와의 약속을 어긴 것처럼 늘 미안해 하였다. 심지어 갈매기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여기기도 하였다. 한갓 미물에 불과할 수도 있는 갈매기로 어떻게 보면 자신의 감정이입을 위한 하나의 설정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백구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 아닐까? 적어도 권력을 탐하다가 욕을 보는 일은 없을 터이니 말이다.

백구와의 약속을 못 지켜도 부끄러워하던 선비들의 고결(高潔)한 인품이 그립다. 한번 자리에 오르면 내려갈 줄 모르는 작금의 정치가나 권력자 모습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백구와 벗을 하던 현자(賢者)가 대통령이 부른다고 넙죽 그 자리에 나갈 수 있을까? 권력의 단맛에 취해 비틀거리지 않고서야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맨날 자신의 수첩에 있는 인사 중에서 사람을 골라 쓸 일이 아니다. 국한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언제까지나 인사에 불통이며 시비 속에서 모처럼 등용한 인사들이 낙마하는 슬픔을 곱씹어야 할 것이다. 사람은 있다. 백구와 더불어 벗을 하고 벼슬길에 나아가도 곧 돌아오겠다는 ‘백구 맹’의 현자를 널리 찾아야 한다. 삼고초려 해서라도 인재를 등용해야 나라가 편안하고 발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