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평상심’을 잃지 않으려면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 속에서 평상심(平常心)을 유지하는 일이 아닐까. 깊이 생각해 보면 오늘 벌어지는 일상보다 귀한 것은 없다. 인간의 일상생활을 모두 불도(佛道)의 전개로 보려는 사상이 있다. ‘평상심이 곧 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마조도일(馬祖道一, 서기 709∼788년)의 법어(法語)에 나온다. 마조의 제자 남전보원(南泉普願, 748∼834)이 ‘평상심이 바로 도’라며 스승의 말을 전수한데서 꽃을 피웠다.
비슷한 말로 ‘착의끽반 아시송뇨(着衣喫飯 ?屎送尿)’라는 말도 있다. 도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의복을 걸치고 밥 먹고 대소변을 보는 일상생활의 행위에 있다는 말이다. 도가 일상생활에 있다는 생각은 옛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그 일을 일상생활의 행위에 근거해 짤막하게 한마디로 단언한 것에서 역시 마조의 특출한 선기(禪機)를 느끼게 한다.
마조가 설파(說破)한 평상심이란 이렇다. “평소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부러 꾸미지 않고 이러니 저러니 판단을 하지 않으며, 마음에 드는 것만 좋아하지도 않고, 단견상견(斷見常見)을 버리며, 범성(凡聖)을 구분하는 생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경전에 이런 말이 있다. ‘범부처럼 행세하지도 않고 성인 현자처럼 행세하지도 않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다. 지금 이렇게 걷다가 곧 멈추기도 하고 다시 앉아 있다가 편안하게 눕기도 하는 등 형편에 따라 움직이는 이 모두가 바로 도다.”
아무리 청결하고 우아한 사람일지라도 하루에 몇 번 반드시 배설을 한다. 대소변을 배설하는 것은 인간이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다. 여기에 청결과 불결을 분별할 소지는 없다. 마조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 넘치거나 부족함이 없으면 거기에 진리가 있는 것이다. 자칫하면 철학적으로 생각됐던 생로병사의 진리가 마조 이후 식욕과 배설이란 가장 원시적인 생리 기능면에서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진리는 먼 곳에 있지 않다. 일상의 삶이 도 아닌 것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에서 진정한 정도(正道)와 중도(中道)란 우리 모두가 평상심을 회복하는 일이다.
마조는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이것을 일러 곧 평상심이라 했다. 일부러 조작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취하고 버리지도 않고, 죽으면 끝으로 단절된다거나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것이 바로 평상심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오염된 중생의 마음이 집착심이면서 분별심이고, 오염 안 된 본래 마음이 곧 평상심이고 불도인 것이라는 얘기다.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 이 셋은 차별이 없다”고 했다. 바로 ‘마음이 도’이고, ‘마음이 부처’라는 얘기다. 성인과 범부가 차이가 없다. 한마음 깨치면 부처이고 깨치지 못하면 범부이고 중생인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와 범부는 다만 깨끗하고 더러움에 물든 차이라는 말씀이다.
선입견, 편견 등은 분별심 없이 보면 본래 모습이 그대로 보인다. 집착하고 취사선택하는 애증심으로 보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서 그르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염된 중생의 마음이 억지로 꾸민 조작된 마음이고, 집착심이고 분별심이다. 오염이 안 된 본래의 마음이 평상심이다. 깨달은 도인이라고 별다른 특별한 마음과 신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중요한 평상심을 어떻게 운영하면 좋을까?
첫째, 지키는 바 신의가 여일(如一)한 것이다.
무슨 일이나 정당한 곳에 입각했거든 그 신념이 항상 환경을 초월하여 환영과 배척이 능히 마음을 더하고 덜하게 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환란과 영화가 능히 마음을 변하게 하며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평상심이다.
둘째, 교제(交際)의 정신이 항상 원만하고 순일(純一)한 것이다.
우리가 서로 은의(恩誼)로 맺어진 이상 그 정신이 능히 파당에 초연하고 증애(憎愛)에 끌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은혜를 베풀 때에도 마음이 순일한 것이 평상심이다.
셋째, 부귀빈천(富貴貧賤)에 처해도 감정이 항상 담박한 것이다.
가난하여도 가난한 바에 구구한 바가 없고, 부자라도 넘치는 바가 없다, 그리고 금의옥식(錦衣玉食)을 하더라도 교만하지 않고, 추의악식(醜衣惡食)을 하더라도 부끄럼이 없는 것이 평상심이다.
넷째,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당해 정신이 오직 전일(全一)한 것이다. 편안할 때도 항상 조심하고, 위급할 때에도 항상 규모와 절도를 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가히 지내거나 난중(亂中)에 처하나 그 부동(不動)하고 유유(悠悠)한 정신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것이 평상심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평상심이 그리 쉬운가? 그러니까 저마다 도를 닦아 평상심을 운영하려는 것이다. 평상심 공부 잘한 사람이 참 도인이다. 그리고 빈부귀천 고락간에 도심(道心)이 일관하는 사람이 큰 도인이다.